37강 믿음시리즈(24) 큰 믿음
마17:1-20
마17: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7: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큰 것을 좋아합니다. 차도 작은 소형차 보다는 큰 것을 원하고, 집도 작은 집보다는 더 큰 집을 원합니다. 그러면 왜 큰 것을 원할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큰 것을 소유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가진 힘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한 결 같이 큰 건물을 원합니다. 큰 사택을 원합니다. 큰 승용차를 원합니다. 왜일까요? 이것이 그 사람의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윤재홍 목사님, 새물결선교회 좋은 점은 교회가, 성도가 작다고 무시를 하지 않는 다는 겁니다. 그런데 노회에 가면 교회가 작다고 아주 무시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지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큰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큰 믿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성도들이 생각하는 큰 믿음은 무엇인가?
보편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큰 믿음은 귀신을 쫓아내고, 기도하면 즉각 응답되고, 예언을 능수능란하게 함으로 족집게 같이 알아맞히는 이런 믿음을 큰 믿음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또 어떤 환경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큰 믿음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믿음으로 밀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믿음을 큰 믿음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믿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다, 이런 믿음이 큰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믿음이 큰 믿음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여러분 이런 놀라운 능력을 행한 이들이 큰 믿음의 소유자이겠습니까? 아니면 작은 믿음의 소유자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해 뭐라 말씀하십니까?
마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 큰 믿음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면 이런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성도 맹세합니다.
막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10: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3. 성도들이 큰 믿음을 원하는 이유?
큰 믿음이 있으면 지금보다 더 큰 일 을 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어야 큰 교회를 이룰 수 있고, 큰 사업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큰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을 수 있고,합니다. 큰 믿음이 있어야 천국에서도 상급이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큰 믿음이 있어야 사람들로부터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큰 믿음 = 큰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큰 믿음을 원한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큰 믿음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 뜻, 내 목적,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큰 믿음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수요일 중보기도 모임시간에 찬양했던 것처럼 누가 “위대 하신 주”입니까? 자신을 이 세상에서 힘 있는 자로 만들어 주는 하나님만을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혀 위대 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4. 성경에서 말씀하는 큰 믿음이란
오늘 본문 마17장은 예수님이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가신 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시고 나머지 9명의 제자는 산 아래에 남겨 놓으신 것입니까? 어떤 목사님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이들만 데리고 올라가셨다고 설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에수님게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신 것은 변화산의 주님의 영광을 본 자와 보지 못한 자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큰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 큰 믿음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왜 그 같은 체험을 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왜?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을까요?
주님이 가신 길을 그들도 걷게 하기 위하여 입니다. 이것은 마16:24-26절의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는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을 무척 당혹하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 제자들은 십자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정확히 어떤 것인가를 모릅니다. 오히려 장래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따랐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목숨을 잃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당혹해 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목숨을 잃는 것이 곧 찾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것을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16:27절)는 말씀으로 증거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예수님이 변형하신 사건으로 미리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28절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변형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길, 즉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맹목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자기 신념 때문도 아니고 사상 때문도 아니며 이념 때문도 아닙니다. 육신으로 사는 세상보다 더 영광되고 찬란한 세상이 있음을 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것도 거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즉 목숨을 잃는 것이 잃는 것이 아니라 영광된 참된 생명을 찾는 것임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자에게 임할 영광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제자 셋을 산으로 데리고 가셔서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대해서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생각들, 장차 이루어질 그들이 원하는 영광의 세계가 예수님이 이루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서 나타내고 계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변형된 예수님, 즉 예수님의 영광된 세계를 봄으로써 우리의 헛된 생각들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이루실 참된 세계에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보다 하나님이 이루실 세상에 더 마음이 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살고 싶고 내가 누리고 싶은 세상을 살게 해달라는 요구를 할 뿐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5절을 보면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을 베드로를 위해서 그 같은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이 주를 따르는 것이고 제자들이 가야할 길임을 말씀하셨지만,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 결코 낙심하고 절망스런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변형된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실제 그 길을 감으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증거해야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본 영광의 세계에 머물기를 원했지만, 다시 산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앞으로 자신이 본 영광의 세계를 추억 하고 자신이 체험한 것을 자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영광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아들의 말을 듣는 것은 아들과의 관계에서 살아감을 뜻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이 이루실 참된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변형된 예수님과 심지어 모세와 엘리야까지 목격을 했습니다. 거기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까지 체험을 합니다. 하지만 하늘의 음성은 오직 아들의 말을 들을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신자가 보게 되는 것은 영광된 생명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눈으로 보는 참된 세상입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현실에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보기 때문이고, 결국 세상에만 모든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영원한 영광된 세계에 대해 증거를 해도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반응이 있지 않습니다. 관심 밖일 뿐이고 육신의 영광을 누리는 세상에만 마음을 두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무엇을 봅니까? 말씀은 예수님만을 증거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만 남게 합니다. 어떤 신비한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다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게 합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이 남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말씀 안에서는 영원한 세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신자는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세계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안다면 세상의 영광은 초라하게 보일 것입니다. 세상을 이런 믿음의 시각으로 보게 된다면, 예수를 믿는 것으로 뭔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자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2)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큰 믿음 두 번째는 내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변화산 아래 있던 제자들, 즉 주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한 제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밑에서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귀신이 들려서 간질병이 들린 아이를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데려왔는데 제자들이 고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이를 데리고 온 한 사람이 예수님께 꿇어 엎드려서 아이를 고쳐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17절에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는 책망을 하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은 세상에서 주의 말만 듣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만 따라가면 그것이 곧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가 고분고분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수 없도록 환경을 악하게 허락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속에서, 몽땅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세대 속에서 어떤 것이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참된 믿음이고, 어떤 것이 주님의 이름만 이용하는 가짜 믿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을 악하게 허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린 이 말씀에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자'라고 하면서 금식기도하고, 철야기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바로 패역한 세대의 모습이고, 세상의 힘의 방식을 가지고 믿음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믿음을 자기들이 뭔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와서는 단지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만 있으면 됩니다. 주님이 힘이 아니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자로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그 고백이 곧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대개가 자신이 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것이지 나는 할 수 없으니까 주님께 맡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것은 그 힘을 이용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큰 자가 되어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힘을 위해서 힘을 구하는 패역한 세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가 높아지는 것을 위해서 믿음을 이용하고 있는 믿음 아닌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자, 장차 주님이 나를 붙들어서 영광에 나라에 들여보내신다는 것을 아는 자, 그리고 그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 그 믿음을 큰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은 산을 옮기는 믿음보다도 더 큰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능력이 자신을 구원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능력이 있는 믿음은 오로지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때문에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 믿음은 겨자씨 만한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산을 옮기는 그러한 능력이 있는 믿음을 바라는 것은 패역한 세대에서 함께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믿을 때 우리도 주님과 함께 다시 살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괜찮다는 믿음이 큰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산을 옮기는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이 있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원합니까? 산을 옮기는 능력의 믿음을 원합니까, 아니면 사흘만에 다시 사신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원합니까? 주님이 세상에서 죽으신 것은 주님의 힘이 세상이 원하는 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혀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그런 힘이었기 때문에 세상은 주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혹시 오늘에도 여러분은 주님은 거부하지 않는지를 돌아봅시다. 세상의 힘을 얻는데 도움이 안 되는 힘이라고 외면하지 않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은 힘 있는 자가 행세하고 다스리는 곳입니다. 힘없는 자는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 의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의 힘을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걱정과 근심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큰 힘이 있습니다. 우리를 장차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는 전혀 상관없는 힘입니다. 그 힘을 의지하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으면 찾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을 믿고 땅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자가 큰 믿음을 소유한 자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리즈설교 > 믿음에 의한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41강 믿음시리즈(25)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1) (눅5:1-7) (0) | 2018.10.14 |
---|---|
40강 믿음시리즈(24) 믿음의 시련(벧전1:5-7) (0) | 2018.10.08 |
36강 믿음시리즈(22) 믿음과 고난 (고후 1:1-5) (0) | 2018.09.09 |
34강 믿음시리즈(21) 믿음과 삶 (엡5:8-9) (0) | 2018.08.26 |
33강 믿음시리지(20) 믿음의 분별 (롬12;2) (0) | 2018.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