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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믿음에 의한 삶

36강 믿음시리즈(22) 믿음과 고난 (고후 1:1-5)

by 오용주목사 2018. 9. 9.

36강 믿음시리즈(23) 믿음과 고난

고후 1:1-5

 

고후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세상의 모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믿음이 복과 직결되어있습니다. 복 받기 위해 종교생활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도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경향이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아니 복 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데 그기에 대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으면 고난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전혀 반갑지 않은 말입니다. 귀에 거슬리는 말입니다.

 

왜 거슬립니까? 여러분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고난은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또 우리가 믿는 것도 고난을 피하고 좀 더 나은 삶을 기대하기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믿으면 고난 받는다라고 하면 믿음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달가운 말로 들릴 수 없는 것입니다.

 

1. 왜 믿음의 고난을 당하는 것일까요? 안 당하면 안 되나요?

 

부부 싸움을 왜 하나요?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 아닙니까? 마찬 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걷는 길과 믿음의 성도들이 걷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은 믿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왜 예수님이 유대인들로부터 조롱, 멸시를 당하셨나요?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들은 타락한 세상과 같아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타락한 본능이 추구하는 길과 믿음의 길은 서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타락한 본능이 추구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자기 뜻, 자기 목적,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길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성경에 말한 고난은 어떤 고난일까요?

 

성경에서 말한 믿음의 고난은 한 마디로 정의하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이 말은 내가 잘 못하고, 내가 실 수하고, 내가 게을러서 당하는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과거, 제가 알고 있던 한 여 성도님이 교회에 나간다고 남편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는데 이 여 성도님은 그것을 예수님으로 인한 고난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성도님이 교회에 나간다고 아내로서 엄마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도 않고, 교회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교회 나가지 마! 핍박을 받은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핍박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뭔 줄 아세요? 이런 고난이 아닌 고난을 받으면서도 잘 견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견디면 복이 주어진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고난을 주신 이유는 자기의 믿음을 연단시켜 더 좋은 믿음이 되게 하여 복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의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고난 후에 두 배의 복을 받았다고 여기는 욥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내가 받는 고난이 예수님으로 인하여서 인지, 아님 단순히 나의 잘 못(선택), 나의 실수, 나태함, 게으름에서 온 것인지를 분별해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고난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외부로부터 오는 고난도 있지만 내부로부터 오는 고난도 있는데 그 내부로부터 오는 고난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믿음과 복에 대해여 알아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복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한 믿음이고, 그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자기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살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주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으면 고난을 받는다는 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 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산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원하는 길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성도로 하여금 자기 뜻의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라고 믿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무엇입니까? 내 뜻을 비우고 주님의 뜻으로 채우고 그 뜻을 위하여 죽기 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 믿음은 나를 위해 사는 것밖에 모르는 인간을 다스리심으로써 자기의 뜻 밖에 보지 못하는 인간을 아버지의 뜻을 보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내고, 붙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때문에 누구든 믿음이 아니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내 뜻이 있고, 아버지의 뜻이 있습니다. 어느 뜻이 옳을 까요? 하나님 아버지,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외우고 있는 모범답안이고 실제 삶에서는 내 뜻이 옳다 생각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원망이 왜 나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일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하나님이 하신일이 부당하다는 생각 때문에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원망이 나온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옳지 않을 것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신뢰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마는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 일에 순종하게 하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여기 선하다) “토브영어로 “good”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 그의 뜻은 최선

하나님은 전지 - 하나님의 인도는 항상 옳다

하나님은 전능 -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다.

 

A.W. 토저가 지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자책에서

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이것 역시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입니다. 왜 그분이 죄를 용서하시는가?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뜻에 따라 우리를 도울 방법을 정하셨습니다. 그 방법들은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부어지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몸이나 영혼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을 보고 하나님이 당신을 떠나시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죄가 많고 더럽고 이상해도 하나님은 선하시기때문에 여러분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긍휼)<하나님의 선하심>에서 흘러나옵니다.

 

만일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우리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하나님에게 자비(긍휼)가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비(긍휼)이십니다. 자비(긍휼)는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영원합니다.

 

그래서 지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선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그렇게 다스려가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필히 고난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것은 양적인 의미에서 넘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성도를 이끌어 가는 길 자체가 그리스도가 가신 고난의 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애초부터 고난을 기대하고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씀은 고난이 넘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은 자기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고 또한 고난의 길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얘기하면 대개 육신적 고통과 수치를 상상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고난도 그처럼 육신적 고통이 주어지는 것으로 상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원치 않은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기 싫은 십자가를 억지로 지셨다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 자체가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오실 때부터 낮은 자리에 오신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3. 성도는 이러한 예수님을 증거 할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뜻대로 살면서 예수님을 증거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뜻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높아지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높아지는 것에 뜻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을 통해서 낮아지신 예수님이 증거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성도들의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시면서 성령님이 내 인생에 들어와 계심을 날마다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찬송가)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여러분! 지금 우리의 인생은 나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나 홀로 산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인생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은 모두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내 뜻대로 안될까요?

 

내 생각과 계획대로라면 틀림없이 되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 인생이 운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로 구분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운이 아니라, 그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며,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는데 내 인생에 들어와서 간섭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상령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로 성도가 부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성도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 다른 길을 가기 때문에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그런데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위로도 함께 언급합니다.

 

교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또한 위로라는 말이지만 이 위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는 성도에게 함께 넘치는 위로입니다. 즉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한을 풀어주는 위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말하지만 이 말씀은 환난 때문에 고생 했으니까 그 상으로 환난 대신에 세상의 풍요를 주심으로 위로해 주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런 위로를 기대하지만 그러한 위로는 참된 것이 아닙니다.

 

욥이 고난을 견딤으로써 축복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 축복이 위로가 되었을까요? 욥이 나중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전에 자녀를 잃어버린 아픔이 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고난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욥의 위로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성도가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흔히 고난을 믿음을 연단하여 더 강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욥은 왜 고난을 받았을까요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보세요. 여기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욥은 믿음에 있어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 자신도 자신이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힘들어 했던 것입니다.

 

성도에게 고난이 주어지는 것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이 더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 신평로교회 장로님, 심정지로 죽을 뻔 하였는데 가까스로 살았습니다. 그 장로님이 퇴원을 하고 주일날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데 그날 그 장로님이 드리는 예배는 지금까지 그 장로님이 드렸던 수많은 예배보다 더 풍성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무엇이? 고난이 그렇게 만들어 가더란 겁니다.

 

또한 고난은 거울과 같습니다. 고난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하고, 고난을 통해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자리로 가게 됩니다. 이렇게 성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복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욥에게 고난이 주어진 이유도 이것입니다. 욥은 죄를 범하지 않는 자기의 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주어지자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정당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욥에게 고난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것은 욥 자신은 정당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아무리 바르다고 해도 그것으로  정당한 사람이 될 수 없고 정당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난 욥은 자신의 정당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을 통해서 욥에게 더욱 풍성하게 된 복입니다. 그리고 이 복이 위로로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고난의 길에서 자신에게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만이 정당할 뿐임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신자는 정당하신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들어와 계심이 말할 수 없는 복임을 깨닫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의 풍성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풍성한 복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이나 믿으면 고난 받는다는 말이 같은 말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고난이 넘치는 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 믿음이 성도를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는 길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고난의 길에서 그리스도의 복으로 풍성해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이 위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