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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믿음에 의한 삶

40강 믿음시리즈(24) 믿음의 시련(벧전1:5-7)

by 오용주목사 2018. 10. 8.

40강 믿음시리즈(25) 믿음의 시련

벧전 1:5-7

 

벧전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우리는 지난주일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으로 찬송하는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베드로전서 1-2장은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인사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득달같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여기 찬송하리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찬송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성도에게서는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성도에게서는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몇 주 전 서진이와 민성이에게 선물을 준적이 있습니다. 그 선물은 아내와 함께 서진 이와 민성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 고민하다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주는 자가 받는 자에게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을 주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받는 자는 선물로 인해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 성도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받는 자에게 가장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렇다면 성도에게 삶의 모든 것은 기쁘고 좋은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내 삶을 모든 것을 진심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여긴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감사와 찬송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보편적으로 성도들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게 되면 교회주보에 이렇게 광고를 합니다. 아무 아무게 가정에 하나님께서 귀한 아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 아이를 낳은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귀한 아들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헌금을 드리기도 합니다. 그럼 자녀만 선물로 주셨을까요? 아닙니다.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18:22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그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선물로 채워 가십니다.

 

1. 그런데 우리에게 찬송이 없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감사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찬송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현재의 삶에 대한 불평, 불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삶을 주셨는지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삶의 내용물이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내용물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도 주님을 찾습니다. 왜 찾은 줄 아세요? 내 삶을 내가 원하는 것으로 채워 달라는 목적으로만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손을 구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내가 원하는 것을 빨리 채워달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다가 채워지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원망하고 떠납니다.

 

여러분 오늘 날 가정을 들여다보면 부부 싸움이 말로 다할 수 없고, 이혼율이 급증하는데 왜 죽고 살지 못해서 결혼해 놓고 서로 치고 박고 싸우고, 이혼하는 줄 아세요? 내가 원하는 것 채워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보세요. 결혼은 왜 합니까? 사랑하니까 하죠? 그러면 사랑이 뭡니까?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는 서로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인데 이게 엉뚱하게도 상대방을 통해 내 필요만 채우려고 하니 맨날 삐거덕 그리는 것 아닙니까?

 

어디이게 부부뿐이겠습니까? 교회도 마차가지고 오이코스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채워지면 붙어있고, 내가 원하는 것 채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나는 것이 오늘 성도들의 모습 아닙니까? 과거에 불렀던 찬송가에 보면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내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정말 이 찬송가 가사처럼 사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로 떠돌이처럼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내용물이 담겨 있지 않으면 늘 불평하고, 원망을 쏟아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찬송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채워 가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기에 언제나 감사와 찬송이 생활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를 가리켜 생활신앙을 한다 말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삶의 내용물이 내 마음에 들지 않기에 늘 불평, 원망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에 대한 관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도, 예수님을 향해 가는 것도 아니기에, 삶의 목표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쉽게 흔들리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등산가들이 히말라야나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위험한 등반이라고 해서 기피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 이해를 못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르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고 나면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산을 오르지 않으면 안 되는 급박한 상황 때문도 아닙니다. 또는 누군가의 강제에 의해서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산이 좋아서 산을 오르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 전문 등반가들의 하나같은 얘기입니다.

 

어떤 유명한 등산가는 왜 산을 오르는가?’라는 물음에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거기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등산가가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라면 성도는 예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가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가는 길이고 예수님을 소망하는 마음이라면 그 길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다른 길로 가고자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5: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5: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여러분 이 사람들이 왜 이러한 행동을 했습니까? 다른 이유가 없어요.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니까, 중풍병자를 메고 왔고, 지붕에 올라갔고, 기와를 벗겼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던 겁니다.

 

이처럼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가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등산가의 눈에 산만 보인다면 성도의 눈에는 예수님만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성도라면 이러한 삶의 길을 소원하는 것이 당연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고난이라는 것이 걸림돌도 방해물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산이 좋아 산을 가는 사람들에게 빙벽이든 암벽이든 방해물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선물하신 삶의 내용물이 고난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선물 안에서 성도만이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기쁨과 감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시험과 시련을 허락하는가?

 

1) 하나님을 의지 하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고후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보세요. 여기 바울이 극심한 환난을 경함하는 것은 그 환난을 통하여 나 자신을 의지하는 내 삶속에서 더 이상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의지하십니까? 말로만 하나님, 하나님 하지 마시고, 정말 내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전히 나를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고, 세상적 방법을 의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의지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경험을 의지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들의 경험으로 그 풍랑이 해결되었습니까? 이제 정말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내 경험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구나 하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운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배우고 그 결과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능력,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만약 없다면 여러분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왜 불쌍하냐고요? 고난을 당해서 불쌍하고, 또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배우지 못하고 그러나 이보다 더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2)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시험과 시련을 허락하는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의 눈물의 고백을 보십시오.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보세요. 지금 요한이 강단에서 이렇게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로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갇혀서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그 고난 가운데 있는 요한이 절대 좌절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는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요한은 자기가 당한 고난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요한은 자기가 겪고 있는 그 극심한 고난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인식하니까 몸은 힘들지 몰라도 마음의 갈등은 없는 겁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고난이 있습니까? 주님의 일에 내 온 삶으로 동참함으로 오는 이 거룩한 고난이 있습니까? 아니면 맨 날 이 땅의 것들로만 채우기 위해 발버둥 치다 당하는 고난은 아닙니까?

 

내가 간혹 tv에 나는 자연인이라는 프로를 보는데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에 혼자 들어가 수년씩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 딱 두 종류입니다. 한 종류는 건강 문제며, 또 한 종류는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연인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는 욕심에서 자유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 가시길 바랍니다. 이 때 당하는 고난, 이 고난이 진정 아름다운 고난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시험과 시련을 허락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하여

벧전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시험이나 시련은 모든 인간을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시련이나 시험으로 인해서 근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 근심은 잠깐 동안의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쁨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험과 시련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란 자체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환난 중에 즐거워하나니는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환난이 가져다주는 열매를 볼 때 즐거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환난이 가져다주는 열매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 열매가 뭡니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한다는 겁니다.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닥터 김사부 : 수고했어

그런데 왜 꼭 시험과 시련으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것입니까? 남들보다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그 대가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까?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은 이 세상의 길과는 다른 길입니다. 세상의 길은 자기 영광을 위한 길이지만 주님이 가신 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라는 겁니다. 이 길은 믿음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고난을 믿음의 고난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이런 믿음의 고난이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과거 내가 걸어가던 이 세상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이 가신 길을 걸음으로 인해 그들로부터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환난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 하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끄심을 믿음의 시련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련은 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증표가 기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을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들기 위해 시련을 주시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기 위해 시련을 받는 것이라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잠간 당하는 고난을 기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험이나 시련은 진노도 심판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때문에 시험이나 시련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준비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시험과 시련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오셨을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실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벧전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우리를 붙드시고 절대로 놓지 않으시고 시험과 시련의 길을 가게 하시면서도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것이 결국 우리를 기쁨과 영광의 자리에 있게 하기 위함임을 안다면 성도는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련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시련과 시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과 시련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내용을 하나님이 채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골라서 채우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것으로 인해 원망과 불평과 실망에 주저앉을 뿐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시련을 환경적 고생이나 고통의 의미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고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자에게는 시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시련이 없는 삶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 하나님의 붙드심과 계획안에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우리의 운명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서 신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그러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고, 어떤 일에서도 기뻐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