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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믿음에 의한 삶

34강 믿음시리즈(21) 믿음과 삶 (엡5:8-9)

by 오용주목사 2018. 8. 26.

34강 믿음시리즈(21) 믿음과 삶

5:8-9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지난 두주 동안 롬1;1-2절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삶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고 그 삶을 사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빛의 자녀들처럼 사는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말씀하면서 우리 인생을 BCAD, 어둠과 빛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성도를 주 안에서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빛이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되었으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여 자신이 빛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빛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힘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빛으로 존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빛으로 존재한다라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의 오해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최소한 몇 번은 접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보통 두 가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의식을 잘하는 것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식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식을 잘 하는 것이 성경에 말하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 의식을 잘 하는 것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이라면 바리새인들을 누구보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의식을 철저히 행하였지만 행함이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한 행함이요, 자기만족을 위한 행함이요, 사람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는 행함이요,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 삼는 행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둠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행함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삶을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윤리적 도덕적 삶이 성경에서 말하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에 말하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윤리적 도덕적 삶을 포함하지만 이보다 훨씬 깊고 넓고 높은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은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의 삶과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은 윤리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윤리와 도덕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는 얼마든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성도가 자신의 삶이 달라져야 한다는 말은 윤리적인 삶을 통해서 주변의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윤리적인 삶은 구원 받은 자와 구원 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8,9)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신자는 어둠에 있다가 주 안에서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이제부터는 빛의 자녀처럼 행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즉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사는 것을 신자가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신자의 빛 된 삶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 수 있습니까? 조건은 내 기분 따라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라도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아이를 데리고 배를 탔는데 배가 침몰할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구명조끼는 하나밖에 없고 또 다른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럴 때 신자가  하나 밖에 없는 조끼를 먼저 집어 들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착함을 실천하는 신자다운 것이겠습니까? ‘내 아이 말고 당신의 아이에게 이 조끼를 입히세요라고 하는 것이 착함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런 착함이 가능할까요?

 

의로움이나 진실함도 다르지 않습니다. 의와 진실이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때 사람들은 의와 진실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따라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빛의 자녀로 사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라는 것은 빛에 의해서 발생한 새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양심과 윤리를 실천하여 빛이 된 것이 아니라 빛에 의해서 빛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 실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빛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빛의 자녀는 착하고 윤리적인 행동과는 상관없이 주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어둠이 아니고 빛으로 구분이 된 것입니다. 믿음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성도됨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성도라면 성도가 아닌 사람보다 더 나은 윤리적인 삶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성도 아닌 사람과 윤리적인 삶을 내세우며 경쟁하는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착하게 살면 내세의 문제는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착함과 윤리적인 삶을 보시고 성도로 택하셨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택하심의 기준이라면 가장 억울하고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착함과 윤리는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것이었으니까요. 예수님의 부르심은 무조건 적입니다. 부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불러내신 것뿐입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학에 입학 원서를 내거나 회사에 입사 원서를 낼 때 요구되는 자격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에 미달되면 원서도 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실 때는 아무런 조건이 없이 하나님이 택한 자를 예수님이 불러내신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해서 빛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빛이 되었으니까 빛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칭찬하는 윤리적인 삶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빛의 자녀인 성도는 빛 안에 거한다는 그것으로 이미 빛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아빠 엄마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라고 할 때 어떻게 사는 것이 엄마 아빠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까? 그냥 엄마 아빠 안에 거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빛이니까 빛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들이 성도로 하여금 강박관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걸인을 볼 때 동전이라도 하나 주지 않으면 빛의 자녀답지 않은 것 같은 생각에 붙들리고 결국 동전 하나라도 줘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 그런 것이 강박관념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분명히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말합니다.

 

 

2.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빛의 자녀라는 확고한 신분의식을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분의식입니다. 사람은 종종 자기의 신분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분에 대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이것을 사도바울은 에베소서2장에서 과거 우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그런데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과거에는 어두움이었는데 지금은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그들과 섞여 살아가는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 빛의 자녀가 되었다 이 신분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신분을 인식할 때 어둠의 삶을 청산하고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문제가 뭡니까? 여전히 어둠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둠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 없이 내가 주인 되어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하면서 왜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 사는 삶을 살까요? ? 이러한 삶이 청산이 안 될까요? 여러분이 교회 오셔서 회개하는 것을 보면 날마다 새로운 죄짓고 그것 회개하세요? 아님 똑 같은 거 회개하세요? 날마다 새로운 것 아니잖아요, 매일 똑 같은 것 회개하고 또 하고, 또 하고 하지 않습니까? 왜 일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자기의 신분을 인식하지 못해서 그래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감정과 느낌과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빛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여기 5만 원짜리 지폐가 있습니다. 이 돈은 깨끗한 돈이나 구겨지고 발로 짓이겨진 돈이라 할지라도 5만원 자리의 돈의 가치에는 조금도 손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어둠을 물리치는 빛의 자녀가 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신분이 바로 이와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일시적으로 실패하고 고통에 빠지기도 하고 입고 있는 옷이 남루할 수 있고 살고 있는 집이 반 지하 작은 집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신분을 훼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빛 되신 주님을 만나는 만나고 난 후 이 빛을 얼마나 강조한 줄 모릅니다. 빛을 경험하고 난 후 그에게 찾아온 것은 확고한 신분의식이었습니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확고한 신분의식, 확고한 신분의식이 그로 하여금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갈 수 있었고, 또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4: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우리가 빛 되신 주님을 만나 신분의식이 회복이 되면 일시적인 어려움과 상황과 초라함으로 인해 낙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12장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이런 아브라함 -> 목숨 부지를 위해 아내를 누이로 속임.

16:15 약속 믿지 못하고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음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12-17장 사이에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선포하시는 겁니다.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이 선포가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였음.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에요. 우리가 어둠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지만 기억해라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 그 선언이 우리를 우리 되게 만든 것입니다. 늘 빛의 자녀임을 선포하십시오. 패배의식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자식, 남편을 향하여 전엔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빛이라고 선포하십시오. 네 같은 게 어떻게 빛의 자녀야 라는 사탄의 속임수에 속지 마십시오. 과거 어둠의 영향력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십시오. 이 믿음이 작동되기를 축복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의 의미 두 번째는 바로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께 속한 자로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야 할 빛의 자녀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고상한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기 위해 오셨습니까? 물로 예수님의 삶에는 윤리와 도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와 도덕의 삶이 예수님이 오식 목적이 아니며,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은 고상한 윤리와 도덕적인 실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행하는 것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처럼 행할 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마치 도덕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릴 수는 있지만 이것은 빛의 열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도덕적 의미와는 다른 주와 연관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착함은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즉 신자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알게 되는 것은 자신의 죄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에 대해 눈이 열리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신을 기준으로 이웃을 비판하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착함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도 타인을 비판하고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누구가가 죽일 놈이라면 나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죽일 놈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음을 안다면 이웃에 대해서도 비판과 판단이 아닌 서로를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착함은 도덕과는 다릅니다. 주 안에 있는 빛의 자녀들에게 오직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이 열매로 신자는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임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나의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가 기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의가 우리를 의의 세계로 이끌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의를 높일 뿐이며 따라서 자신의 의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의가 있음에도 그 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어떤 의도 자신에게는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의로운 길로 행하는 신자는 자기 의를 자랑하는 것이 없으며 자기 의를 기준으로 타인과 차별하는 것도 없습니다. 비록 행함과 실천이 다르다고 해도 그것으로 차별하지 않으며 다만 주의 의가 나를 의로운 자가 되게 하셨음을 감사하고 기뻐할 뿐입니다.

진실함은 거짓이 없는 참된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것은 무엇이고, 그 진실함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진실된 인간의 모습은 사도처럼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참된 모습이기에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이야 말로 진실 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함 역시 주 안에 있는 신자에게서만 맺어질 수 있는 열매입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 행동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쉽게 말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둠의 길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길입니다. 하나님의 주인 됨을 거부하고, 자기가 자기에게 주인 되어 자기 뜻, 자기 목적, 자기 영광을 위한 길입니다.

 

그러나 빛이신 예수님의 길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된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됨을 위해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길로 가셨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빛의 길입니다. 그것이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특별히 나타내고 실천해야 할 행함을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의식을 생각하기도 하고, 또 윤리적 도덕적 삶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둠과 빛은 생활환경이나 행실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어둠의 세계는 범죄가 상대적으로 많이 발생하는 빈민가와 같은 모습이고, 빛은 그런 어둠의 세계에 도움을 주어 환경을 개선하고 범죄가 줄도록 도와주는 선행을 베푸는 것 정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과 빛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어둠은 곧 죄의 세력에 장악된 상태를 뜻합니다.

어둠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기에 용서가 없습니다. 이것이 어둠의 특징입니다. 반변에 빛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 아래 있습니다. 빛의 자녀라는 것도 용서로 인해 거룩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어둠이었던 우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용서로 이미 빛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특별한 선행이나 종교적 행함을 요구하는 의미의 행하라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어둠에 있게 되면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함으로 죄를 씻고 구원 받고자하는 열심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항상 자신의 행함을 보면서 구원을 확신하기도 하고 자기 구원에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빛의 자녀로 존재한다면 자신의 행함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로 인한 용서에 마음을 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행함으로 거룩하게 되었음을 믿기 때문에 자신의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되고 따라서 교회의 관계로 함께 했을 때도 행함을 기준하여 형제의 믿음을 평가하거나 차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빛은 우리가 만들어 내어야 할 덕목이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으로 우리가 빛으로 증거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힘과 실천으로 스스로를 빛으로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어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고 우리가 빛의 자녀라면 빛의 지녀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의로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전으로 믿는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모든 의를 부인하는 그가 빛의 자녀인 것입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를 부인하게 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전으로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율법은 자연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빛의 자녀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지켜야 할 율법은 없는 것이고 다만 율법의 완전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운 자로 여김 받는 생명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자신의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함과 상관없이 의로운 자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행과 종교적 실천이 없어도 이미 의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로운 자로 사는 것이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의 근거를 자신의 행함에서 찾는 습성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어둠에 깊이 길들여져 있습니다. 때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이미 그리스도로 의로워 졌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둠의 사고방식이고 고질적인 습성일 뿐입니다.

 

복음을 말하면 많은 신자들이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살라는 말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살라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복음이 납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인한 자유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기 때문에 율법에 매이지 않은 자유자로 사는 것이 빛의 자녀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어려워합니다. 행함이 있는 것을 신앙인의 삶으로 인정하는 어둠의 습성에 오랫동안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자유가 되고 그 자유가 빛으로 드러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