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강 믿음시리즈(18) 믿음의 분량
롬12:3-5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믿음의 분량대로” 라는 말의 오해
우리는 보편적으로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는 말씀을 근거해서 믿음에도 크고 적음의 분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강한 것은 믿음의 분량이 많기 때문이고, 연약한 것은 분량이 적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데,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많이 받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적은 믿음을 받았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믿음에 크고 적은 분량이 없고 모든 성도가 동일한 분량의 믿음을 받았다면 똑같은 믿음의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런데 분명 모든 성도가 동일한 믿음의 결과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처럼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십자가의 한편 강도처럼 구원은 받았지만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구원 받은 믿음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 구원받은 한 편 강도의 믿음이 동일한 믿음일까요? 다른 믿음일까요?
우리의 상식으로 사도 바울의 믿음과 그 강도의 믿음이 동일하게 여지지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적고 많음으로 구분하면서 믿음의 분량이 큰 사람이 많은 일을 하고 그에 따라 천국에서 받는 상이 크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에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2. “믿음의 분량대로” 라는 말을 오해하는 이유
사람이 믿음에 대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한 가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신자의 믿음은 동일하지만 일치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함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로우심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종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순종을 최고의 순종으로 믿기 때문에 별도로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고 이러한 믿음에 있어서는 모든 신자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모든 신자의 삶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며 살았던 사도들이 똑같은 형편에서 똑같은 결과를 남기지를 않은 것과 같습니다. 사도들의 삶도 다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길에 서게 된 것은 동일하지만 복음이 동일한 삶과 동일한 형편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저기 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여러 교회가 세워지는 결과가 나타났지만, 모든 사도에게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사도 바울과는 다르게 바돌로매, 안드레, 다대오, 야고보 등의 사도들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의 이름이 거론 될 때 언급되는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야고보는 일찍 순교를 해서 복음을 전하는 기회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도들을 소위 업적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 믿음의 분량을 나누고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업적이 기준이 되어서 천국에서 받는 상도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3절의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구절에서도 ‘믿음의 분량’이라는 말을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분량을 양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분량이라는 말의 의미를 양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결국 신자마다 믿음의 양이 다르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고, 믿음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가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봄으로써 믿음을 키워야 하고, 믿음이 커야 강한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구절을 보면 분명 신자에게 주어진 믿음이 분량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분량을 양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양의 믿음의 주셨다는 것이 되고, 따라서 작은 양의 믿음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적게 봉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적은 양의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다’는 핑계도 가능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믿음의 분량대로” 라는 말의 의미
1)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길을 정하시고 그 길에서 신자로서의 할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두고 믿음의 분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의미로 믿음의 분량이라는 말을 하는가는 4,5절의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하나라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지체는 여럿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체는 서로 다양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동일하지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믿음이 증거 되는 삶은 동일하지 않고 서로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믿음은 동일하지만 일치는 아니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를 향한 사도들의 믿음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사도들을 동일한 삶으로 이끌어 간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삶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동일하지만 야고보는 예수님 때문에 일찍 죽은 반면에 사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한 것처럼 그 삶은 다양했던 것입니다.
6-8절을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의 분량으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증거 되는 것이 한가지의 모습을 통해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 나가서 전도하는 것만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처럼 설교를 하는 것만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기 주어진 다양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하는 일을 하면서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지체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지체들 신발을 정리해주는 그 마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예수님은 증거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목사가 가장 복음을 잘 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받은 은사가 모두 같지 않습니다. 은사는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는 도구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은사가 더 낫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주어진 은사로 형제를 유익하게 하는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사는 다양하지만 한 몸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은 동일하고, 그 마음으로 각기 주어진 은사로 봉사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모이는 것이 일치이고, 각기 주어진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은사를 고르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은사를 원할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거나,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는 그런 은사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섬기고, 가르치고, 구제하는 그런 은사를 누가 선뜻 환영하겠습니까? 그러한 은사는 모두 자신의 수고를 요구하는 것들이기에 가능하면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한다면 누구나 자신이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방법을 통해서 영광 돌리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죽을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워 지내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죽는다고 해도 예수님의 의가 나를 생명의 나라에 있게 할 것이니까 죽음이 두렵지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기뻐하고 예수님을 알게 된 것으로 감사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려서 고통을 겪다가 일찍 죽는 것을 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길을 정하시고 그 길에서 신자로서의 할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두고 믿음의 분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믿음을 키워서 큰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주장되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삶은 그 형편과 환경을 떠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엡 4:7절에서도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는 말씀처럼, 모든 삶이 분량대로 주어진 은혜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병에 걸려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면 그 또한 예수님의 선물의 분량대로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에는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은혜를 육신을 기준으로 해서 좋다, 나쁘다고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함입니다. 선물을 선물로 받지를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오직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선물로 인정하려고 할 뿐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악함이 나의. 죄 때문에 저주의 자리로 내려가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처럼 우리의 악을 보게 하시고, 저주 자리까지 내려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도록 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길을 따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량대로 가게 하신 길에서 다만 예수님을 좇을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분량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그 어떤 차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의 분량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누구에게 무엇이 있는가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보게 합니다. 이 믿음 안에서 신자는 하나라는 관계로 모이는 것입니다.
4. “믿음의 분량대로”의 삶을 살기 위해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은 많이 알려고 하지 마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목사가 교인들에게 담임 목사가 전하는 설교만 들으면 되지 다른 곳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성경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고 가르칠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는 것은, 신자로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선을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각자 분량대로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은사를 받았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불평할 이유도 없고 모자람을 느낄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의 것에 대해서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타인이 내 옆에 등장을 할 때 그 사람의 것과 내 것을 비교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느끼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더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5.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기 위해서는
1)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기 위해서는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많이 받은 이웃이 내 옆에 있다고 해도 자신의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로서 마땅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옆에 등장할 때 우리는 꼭 비교하게 됩니다. 누가 많은가를 따지면서 잘남과 못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2)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한 지체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한 몸이지 서로 다른 지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4-5절에 보면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이 교회를 한 몸이라는 관계로 설명을 하는 것은, 성도는 바로 한 몸에 소속된 지체와 같은 관계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바에 대해서 불만이 있고 공평치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주어진 것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몸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시다.
우리들의 몸에서는 지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이 달려 있습니다. 손이 있고 발이 있으며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태어날 때 스스로 되고 싶은 것을 고른 것이 아니라 그냥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태어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손이 손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손을 위해서 손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손은 몸을 위해서 있습니다. 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발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해서 발이 있습니다. 모든 지체가 같습니다. 모두가 몸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지 각자 자기를 위해서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몸입니다.
몸이란 어느 특정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만을 가지고 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체가 곧 몸입니다. 손도 몸이고 발도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손이 발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또 발이 자기 역할에 대해서 불평을 하고 손이 되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말도 이런 의미입니다. 교회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체들에게 주어진 것은 각자가 다릅니다. 부자로 태어나는가 하면 가난한 자로 태어납니다. 똑똑한 자로 태어나는가 하면 미련한 자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비교가 발생하고 잘남과 못남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잘난 자는 못난 자의 위에 있게 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의 아래에 위치하게 됩니다. 만약 이것이 교회에서 보여 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님을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관계를 말합니다. 몸 안에서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 지체란 오직 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손이 손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해서 삽니다. 발이 발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해서 삽니다. 몸을 위해서 손은 손의 역할을 하고 발은 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지체가 있지만 그리고 여러 모양으로 존재하지만 존재 이유는 동일합니다. 그것은 몸을 위해서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뭔가 남보다 못나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해서 그 못나 보이는 자리에서 몸을 위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관계입니다. 그럼으로 교회에서는 각자에게 주어진 것으로 자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손이 손으로 지음 받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6-8절에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가 있고, 구제하는 은사를 받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은사를 받아서 그 은사로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목사로 봉사하는 은사가 귀하고 그냥 일반 성도로 봉사하는 은사가 못하다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가르치는 은사를 주셔서 목사로 살아갈 뿐입니다. 믿음이 좋아서 목사된 것도 아니고 목사라는 직이 귀해서 특별히 주신 은사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지체의 관계입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일뿐입니다. 이것이 한 몸 된 관계입니다. 그 어떤 환경이 주어졌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 하는 것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로 따로 구별될 수 없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주님을 증거 하라고 세워놓으신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게 좋은 역할을 원한다면 이것이 바로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12: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너희 것으로 여기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를 위한 몸,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지체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구원하시지 나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개인을 보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몸 된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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