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강 믿음시리즈(15) 믿음과 잘못된 열심
암 4:1-5
암4:1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4: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4:3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4: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단어가운데 하나는 “열심”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마음에 열심히 해야 하는데 생각합니다. 예배도 열심히 참석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봉사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 할 것은 우리가 왜? 열심히 하려고 하는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열심을 내면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그 배후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열심을 믿음의 증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열심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는 “열심을 내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열심을 내라 할 까요? 그것이 기업이라면 열심은 그 기업의 성장과 직결되어 있고, 교회에서 성도들의 열심은 곧 교회의 성장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부흥에 모든 목적을 두고 있는 목사라면 자연히 열심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어떤 설교를 해도 그 설교의 결론은 ‘열심을 냅시다’라는 말로 끝날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목사가 교인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열심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한 사람의 열심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로 인해 교회의 분위기도 뭔가 활기차고 흔히 말하는 ‘살아있는 교회’처럼 보이기 때문에 열심을 믿음의 증거로 말하면서 열심을 낼 것을 호소하게 됩니다.
1. 그렇다면 성경은 열심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요?
물론 성경을 보면 열심을 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이 구절을 보면 분명히 성도가 내어야 할 열심은 있습니다. 또한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열심을 내게 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의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열심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는 개인이 잘 되기 위한 열심을 말하고, 교회를 향한 열심을 말하지만, 성경은 교회를 향한 열심이 아니라 주를 향한 열심을 말합니다.
2. 열심에 대한 잘못된 이해
1) 열심을 인간의 행함과 연결하여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지런한 교회생활이 곧 열심으로 등장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기도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십일조도 철저히 하면서 봉사와 헌신도 많이 할 때 누가 봐도 그런 사람은 믿음의 열심이 있고 신앙이 좋다는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은 우리가 생각하는 열심을 갖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암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4: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은 아침마다 제사를 드렸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또
‘수은제’를 드리고, '낙헌제' 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 가운데 “번제‘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인데, 번제를 드려 죄사함을 받은 다음에 드리는 감사제를 가리켜 ’수은제‘라고 말합니다.
낙헌제란 건물이나 성전을 건설했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예배당 봉헌예배와 같은 성격입니다.
민15:3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사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을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
번제, 소제, 전제는 제물이 무엇인지에 관한 분류입니다.
번제는 제물이 소,양같은 짐승이고, 소제는 제물이 곡식가루이며, 전제는 제물이 술입니다.
화제, 거제, 요제는 제사 드리는 양태에 관한 분류입니다.
화제는 불로 태우는 제사이고, 거제는 제물을 높이 들었다가 내려놓는 제사이며, 요제는 제물을 들고 흔드는 제사입니다.
속죄제, 화목제, 서원제, 낙헌제는 제사의 목적에 관한 분류입니다.
속죄제는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고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하여 평화로운 분위기를 갖기위하여 드리는 제사이고 서원제는 맹세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고 낙헌제는 건물이나 성전을 건설했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은 그러한 이스라엘을 열심히 있다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망을 합니다.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에게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에서를 피해서 도망을 칠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하늘로 연결된 사닥다리와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을 보여준 곳입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자신이 베고 잠들었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곧 이름을 벧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곱은 위대한 조상입니다. 그런 위대한 조상이 하나님을 만나고 기름을 붓고 친히 벧엘이라고 이름 붙인 곳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신앙의 성지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또한 길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제일 처음 밟은 땅입니다. 그리고 사무엘도 이 길갈에서 제단을 쌓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벧엘이나 길갈은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한 땅이었고, 그래서 이곳에서 아침마다 희생을 드리고 다른 온갖 제사도 부지런히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들의 종교 열심을 책망합니다. 왜 그들이 책망을 받아야 할까요?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요? 분명히 열심이 있었던 이스라엘이 책망을 받는다면 오늘 우리도 동일한 책망을 받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과 동일한 수준의 열심이라면 우리 역시도 선지자의 책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고 말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행한 그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기쁨,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을 위한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열심을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선민이고 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즉 열심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이 강조하는 ‘십일조를 하면 복 받는다’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이 말대로 복을 염두에 두고 십일조에 열심을 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을 위한 열심입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면 벌 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한 번도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면 그 또한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한 것입니다.
이처럼 열심의 중심에 자신이 살아있을 때 성경은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말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도에게 무조건 열심을 강조하고 열심을 신앙으로 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를 교회 성장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여기고 그 신앙을 이용해서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하는 거짓선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열심이 없는 게으름으로 인해서 예수님께 책망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다수이지만,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행함이 없다는 것 때문에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행함을 두고 책망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즉 열심히 기도하고 주일 잘 지키고 십일조도 잘하고 있는 신자를 책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열심 때문에 복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인데 성경은 오히려 책망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과 지식이 무너져야 함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세워두고 있는 신앙의 기준이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3. 참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나를 위한 열심(기쁨)에서 주님을 위한 열심으로 나가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종교적인 열심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합니다. 나를 보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용서가 어떤 것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용서에 온 마음을 빼앗긴 자가 되어서 다만 그 크신 용서를 증거 하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⓵ 사도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에는 자기를 향한 교회를 향한 열심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⓶ 그러한 그가 믿음이 온 이후의 삶은 주를 향한 열심히 로 바뀌어졌습니다.
⓷ 열심의 방향성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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