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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믿음에 의한 삶

20.믿음시리즈(7) 믿음의 약함과 강함과 자람 (롬14:1-3)

by 오용주목사 2018. 5. 20.

20강 믿음의 약함과 강함과 자람

14:1-3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특징은 바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느냐? 하나님의 약속, , 계획을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믿음이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믿음은 인간 스스로가 가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또 인간 스스로 믿음을 자라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믿음을 약한 믿음, 강한 믿음, 뜨거운 믿음, 부지런한 믿음, 큰 믿음, 작은 믿음을 말하고 그러면서 믿음에서 자라가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오늘은 믿음의 약함, 강함, 자람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약한 믿음

대개의 성도들은 믿음을 강한 믿음’ ‘약한 믿음으로 구분하여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두 강한 믿음을 원합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강한 믿음이란? 의심하지 않고 믿는 믿음이 강한 믿음이다. 또는 어떤 어려움과 시험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잘 견디고 이기고, 낙심하지 않는 믿음을 강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봉사에도 열심히 하는 것을 강한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반면 약한 믿음은 조그만 어려움에도 쉽게 흔들리고 주저앉아 버리고, 낙심하고, 절망하며 교회에도 소홀한 것을 약한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강한 믿음을 가지라고 촉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타락한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강한 믿음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애당초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입니다. 따라서 이 믿음을 인간이 만들 수 있다. 키울 수 있다.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믿음에 대한 대단한 착각이고 교만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누구에게는 약한 믿음을 주시고, 누구에게는 강한 믿음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모두에게 동일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연약한 믿음, 강한 믿음은 무엇인가?

 

본문 1,2절을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열심히 있느냐 없느냐 이런 것으로 믿음이 약하다. 강하다고 말하는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먹는 문제로 믿음의 연약함과 강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당시 배경을 알아야합니다. 당시 로마교회의 성도들 사이에 먹는 음식 문제로 분쟁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채소만 먹는 부류와 또 한 부류는 고기를 먹는 부류였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는 사람들은 왜 고기는 먹지 않고 채소만 먹었는가하면 이것은 그 당시 상황에 비추어 생각해 봐야 하는데, 그 당시 시중에 유통되던 고기는 우상에게 바친 고기가 시중에 유통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거절하여 먹지 않고 채소만 먹은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제사를 지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잘한 것입니까? 못한 것입니까? 믿음이 강한 것입니까? 연약한 것입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자로 표현을 합니다. 왜 일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의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무엇을 먹고 먹지 않고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먹는 문제로만 해석한다면, 채소만 먹으면 믿음이 약한 자이고, 고기를 먹으면 믿음이 강한 자가 된다는 오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상의 고기를 먹지 않아서 믿음이 연약하다면 믿음이 강해지려면 우상의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바울은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바울의 핵심은 고기를 거부하고 채소만 먹는 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부정해진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 음식을 먹으면 자기가 부정해 진다는 생각을 사도 바울은 믿음이 연약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장에 보면 베드로도 이방인과 같이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슬거머니 이방인을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물러난 사건을 두고 바울에게 호되게 책망 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베드로는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를 같이 하면 부정해 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바울이 한 유명한 말이 무엇입니까?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롬14장에서 고기를 거부하고 채소만 먹는 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부정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채소만 먹는 자들의 생각이 부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의 깨끗함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없다, 깨끗하다는 선언을 받습니다. 이제는 거룩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 거룩함은 예수님의 피로써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와는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 그리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를 더러운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채소만 먹는 것이 연약한 믿음이 되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다고 하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붙들고 있기에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멸망으로 밀어 넣을 수 없음을 믿지 못하는 것이 연약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제 내 마음껏 살아도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에 따라 거룩게 되고 안 된다는 생각이 연약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의롭게 되는데 연약한 믿음이란 십자가 플러스 내 의, 이것이 연약한 믿음입니다.

 

연약한 믿음이란? 믿음 자체는 연약하고 강하고 가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이 연약한 믿음입니다. (예 선지국)

 

또 연약한 믿음이란?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우린 이 말씀에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자'라고 하면서 금식기도하고, 철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믿음을 자기들이 뭔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에 병자들을 고치실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은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대개가 자신이 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것이지 나는 할 수 없으니까 주님께 맡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연약한 믿음, 믿음이 작은 것입니다.

 

2. 강한 믿음

그러면 반대로 믿음의 강함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는 믿음이 강한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거부하고 채소만 먹는 것이 믿음이 연약한 것이라면, 반대로 고기까지 먹을 수 있는 것이 강한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강한 믿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 여기 제사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이 연약한 믿음이라면 제사 음식을 먹는 자는 강한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강한 믿음은 주 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강함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의 강함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 때문에 비록 죄 가운데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고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고자 할 뿐입니다.

 

) 세리의 믿음, 예수님의 한편 강도의 믿음 -> 강한 믿음

 

이 말이 악을 행해도 된다는 의미로 들리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붙들린 신자는 악을 미워하게 됩니다. 악을 미워하는 사람이 악을 즐길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무리 힘써도 자신의 힘으로 악을 이길 수 없는 나약함을 절감하고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를 더욱 깊이 강하게 깨달으며 감사하게 될 뿐입니다.

 

주 만 바라보는 믿음은 자신의 행함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행함의 여부에 따라 흔들림이 없습니다. 종교적이 행함이 많을 때는 자기 믿음에 대해 안심하고, 행함이 적을 때는 불안해하는 흔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나의 행함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의의 행하심이 나를 붙들어 의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 환자의 강한 믿음이란? 자기의 질명을 보지 않고 의사만을 바라보는 믿음

 

그런데 고기가 자신을 부정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되기에 연약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행하심만 믿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함을 보면서 믿음을 저울질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뭘 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의로우심이 자신을 의롭게 했음을 믿을 뿐입니다.

 

3절을 보면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받으시는 일에는 외적인 조건이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적인 조건을 보시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닌데, 우리가 형제의 외적인 것을 보면서 그를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주 만 바라보는 것, 그리고 주님의 의의 행함만 의지하는 것이 믿음의 강함입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에 거하는 성도는 타인을 비판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예수님께 비판을 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예수님의 은혜가 그 모든 비판을 덮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판을 받아야 할 자신을 예수님의 은혜가 붙들고 있음을 안다면 그 믿음은 타인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하다 강하다는 것은 서로 비교하고 높고 낮음을 정하는 의미의 말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함을 근거로 해서 나는 너보다 믿음이 강하다고 하면서 연약한 자를 자신보다 낮은 믿음의 사람으로 본다면 그것이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는다는 것은 믿음이 연약한 자 앞에서 자신 또한 그의 믿음을 비판할 자격이 없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나는 강한 믿음, 너는 연약한 믿음이런 구별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믿음에 있어서는 연약한 자일뿐이고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믿음의 길을 한발 한발 걸어가고 있을 뿐임을 아는 것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자람

살후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1: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믿음이 더욱 자랐다는 것은 외적인 행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믿음의 자람을 새벽기도를 하지 않던 사람이 하게 되고, 십일조를 하지 않던 사람이 하게 되고, 봉사와 헌신을 더욱 많이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자람이라면 믿음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얼마든지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물론 믿음의 자람에는 신자의 변함이 있는 것이 당연하고, 그 변함으로 성경도 보게 되고 기도도 하고 교회의 지체에 관심을 가지고 봉사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를 믿음이 자란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람이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혜택을 누리고 있가를 알아감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과 기쁨이 더욱 깊어지고 충만해 지는 것이 믿음의 자람입니다. 이것을 아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강하게 내 안에서 부각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자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각되는 만큼 우리가 어떤 존재였던가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나 같은 자를 성도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고, 크신 사랑과 은혜로 다가오면서 감당할 수 없는 기쁨으로 내 마음에 확산되어 가는 것이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 됨으로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자람입니다. 이러한 자람은 성령이 함께 하신 성도에게서는 자연히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우리의 힘과는 상관이 없는 자람인 것입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의 자람과 함께 사랑이 풍성해지고 핍박과 환난 중에서 인내했음을 말합니다. 즉 이것이 믿음이 자란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자람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풍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시련과 환난에서도 자연히 인내하게 됩니다. 억지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과 환난에서 주님의 고난을 보게 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의 현실을 보기 때문에 시련과 환난 또한 신자가 가는 생명의 길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믿음의 자람으로 인해 나타나는 흔적들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성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라고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고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이 행하시는 어떤 일에서도, 비록 그 일에 나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고 해도 아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신뢰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벗어난 적이 없고, 하나님의 약속은 선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실패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일에 대해서도 아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자람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이 만난다면 서로가 예수님의 은혜를 전달하고 증거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사랑이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람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부흥입니다. 믿음에 의해서 인간의 본질로 끝없이 내려가고, 자신의 본질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그동안 자랑거리였던 세상의 것을 내려놓은 채 생명 되신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는 심령이 늘어가는 것, 이것이야 말로 교회의 참된 부흥입니다. 믿음의 자람이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부흥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