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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믿음에 의한 삶

21강 믿음시리즈(8) 믿음과 행함의 관계 (마16:24-27)

by 오용주목사 2018. 5. 27.

21강 믿음과 행함의 관계

16:24-27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오늘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서로 상충되는 것 같은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갈2:16절입니다.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여기 의롭게 되는 것은 다른 말로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만 가능하다는 말씀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 진리입니다.

 

그런데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 합니다. 여러분 이 둘 중 어느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까? 사실 둘 다 옳습니다. 그런데 왜 다르게 보이는가하면 우리가 믿음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어떤 오해입니까?

 

믿음에 대한 오해

1) 믿음에 대한 오해는 우리는 믿음이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이 속죄의 교리만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 참 다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2) 또 하나 믿음에 대한 오해는, 믿음과 행함을 따로 따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행함은 따로 때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믿음이 있으면 행하게 되고, 행한 것을 보면 믿음이 참 믿음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의 행함에 대한 오해

1) 의식을 잘 하는 것을 믿음의 행함으로 보는 오해

그런데 여러분 대개의 교회에서 말하는 행함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주일성수, 성경, 기도, 헌금, 봉사, 헌신, 전도, 구제, 착한 일이러한 말들이 교회가 말하는 행함의 대부분일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생각할 때는 이러한 것이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증거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사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인간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제사의 의미는 관심이 없이 다만 제사라는 종교 형식을 가지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유지하겠다는 그 생각이 악했음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성경 보고,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보는 자신을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 인정하려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헌금을 하면서 헌금하는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서 나오는 인간의 행함을 믿음의 증거물로 여기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행함이 믿음의 증거물이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함으로 믿음으로 보여주겠다고 하는 것은 믿음을 멸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목사가 교회를 바라보면서 발생하는 욕망의 결과인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이 곧 목사 자신이 커지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커지고 싶은, 그래서 이름이 드러나고 힘이 있는 목사로 존재하고 싶은 욕망이 목사로 하여금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행함은 하등의 가치가 없으니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가 없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행하든 그 행함은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행함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가질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2) 믿음의 행함을 윤리적 도덕적인 실천으로 보는 오해

행함의 문제에서 크게 오해하는 것은 행함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실천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믿음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실천에 의해 증거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행함의 기준이 없는데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를 행함으로 인정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윤리와 도덕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은 함께 사는 사회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서로 지켜야 하는 질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윤리 도덕적 수준의 행함은 인간에게 있는 양심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일 뿐입니다.

 

3. 믿음의 행함의 기준은?

그런데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내 믿음이 참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런데 그 행함이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행함을, 또 어느 정도 행해야 믿음에 의한 행함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반대로 어떤 짓을 얼마만큼 해야 믿음의 행함이 아닌 것이겠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가 가장 피부에 와 닿은 헌금문제를 예로 들어보면, 우리가 믿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면 분명히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액수를 각각 다릅니다. 그러면 그 헌금을 얼마만큼 드려야 믿음에 의한 행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이 행함이라면 그런데 기도하는 시간이 다 다릅니다. 성경 보는 양도 다 다릅니다. 하루에 10분 기도하는 사람, 1시간 기도하는 사람, 성경을 하루에 1장 보는 사람, 10잘 보는 사람, 다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믿음으로 행한 것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으면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헌신하게 되죠? 그러면 얼마나 예배를 드려야 하며 얼마만큼 헌신을 해야 믿음에 의한 행함이라고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한 예로 말씀을 드린 것이지만 행함의 문제에 들어가면 이런 혼란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어느 정도 행해야 믿음에 의한 행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그 기준을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함을 무시하고 믿음만 강조할 수도 없습니다. 행함을 무시하고 믿음만 강조한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행함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행함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4. 믿음의 행함에 대한 성경적 이해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여기 갚으리라는 헬) ‘아포디도미, ) ‘reward’ 로 보상, 대가, 상을 말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참된 믿음은 행함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행함을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믿음의 행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행함을 윤리와 도덕, 그리고 종교적 실천으로 이해한다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행함과 믿음이 아닌 행함을 구분할 분명한 기준을 세울 수가 없게 됩니다. 얼마만큼 해야 믿음의 행함이 되고 안 되는지 그 기준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행함이란 무엇인가?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한 행함의 기준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한 행함은 기준은, 주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과 그리고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주를 버리는 것으로 구분됩니다. 주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살았고 누가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로 살았는지 그 행함을 따라 갚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실천이 있으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찾는다고 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실천을 해야 합니까? 실천을 해야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합니까? 기독교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는 나라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 죽는 것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실천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한 실천이라면 우리는 지금 한가롭게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에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어야 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다 같이 이슬람지역으로 가서 예수를 외쳐야 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 같은 실천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함을 육신적 활동, 실천으로 이해하지만 예수님이 말씀 하신 행한 대로라는 말씀은 구체적인 행동을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잃어도 좋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주를 위해 죽는다는 말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연관된 그런 말인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날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사고방식입니다. 날 위해 주가 계신다.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 내거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성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예수를 믿어서 복 받겠다는 생각은 잘 못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이 예수님이 날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도 내게 마땅합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 믿음에 의해서 주를 위해서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그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가리켜 믿음의 행함이다.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성도의 삶에 분명 영향을 끼칩니다. 세상은 오직 자신을 위해 살아가지만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내가 손해를 본다고 해도 예수님이 증거 되는 길로 이끌어 가는 것으로 그 믿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5. 믿음으로 산다는 것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은 신자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길로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을 자신이 가야할 인생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신자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것이 행함입니다.

 

세상에 내 살고자 하는 길이 성도의 길이 아니고 주를 위해 죽고자 하는 것이 성도의 길이다. 이런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마음이 있다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을 내 인생의 가치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성도는 세상에서 못되었다고 실망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 사람이 세상에서 조금 잘 못된다고 실망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내가 주를 알고 주를 믿게 되었다는 것을 내 인생의 최고의 가치고 여기면서 그렇게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런 것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의 행함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어라이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해 죽고자 하는 그런 믿음 가운데 살아간다면 내 인생 가운데 주님이 계시는 것으로 기뻐할 것이고 감사할 것이고, 그렇다면 뭔가 안 되어도, 실패하여도 기쁨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함이라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내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고방식 가운데 살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성공하기를 원할 것이고 실패하면 낙심하게 됩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 절망하게 되고, 예수를 믿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믿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욕망이 있고, 이 욕망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내 목숨을 살리는 길로 가게 합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든 살든 관심이 없고 오직 내가 사는 길에만 마음을 둡니다. 자기 부인은커녕 나의 잘남과 나의 성공, 나의 이름을 드러내고 높이는 것을 더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이것을 우리 힘으로 어쩌지를 못합니다.

 

,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내 안에서 나를 장악하고 있는 욕망을 처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문제는 욕망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우리가 부인해야 할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것을 탐욕, 욕망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어 하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부흥시켜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겠다는 것도 인간의 탐욕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루는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 모든 것을 부인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도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신자의 기도입니다. 내가 살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이름이 증거 되고 예수님이 살기 위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고 믿음에 의해서 나타나는 행함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지키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자존심입니까? 아니면 체면입니까? 혹은 명예입니까? 예수 안에서 그 모든 것은 다만 부인되어야 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의 자존심이나 체면, 명예는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가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자기 자존심을 위한 싸움으로 나가지 않게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좋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이기는 헛된 싸움에 빠져들지 않게 합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자신 또한 부인되어야 하고 죽어야 할 존재로 여기면서 예수님이 증거 되는 것에만 모든 마음을 두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행함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함은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행함이며 행함이 곧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이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행함입니다.

참 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 믿음의 행함은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믿음의 행함은 주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삶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에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 갚으신다, 보상한다는 말의 보상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떤 것으로 보상을 하면 좋겠습니까?

 

19:15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9:16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9: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9:18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여기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라는 말은 힘으로 다스리는 권세가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권세를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