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믿음과 성화의 관계
벧전2:1-3
벧전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2: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오늘은 믿음과 성화와의 관계에 대해 살펴 보고자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게 되어짐을 배웠습니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여러분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가는데 왜? 오늘도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헌금, 봉사를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받은 구원이 뭔가 부족해서 그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입니까? 만약 이러한 이유라면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구원은 부족함이 전혀 없는 100%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입니까? 구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은 행함으로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은혜 받은 자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삶을 “성화”로 이해하고, 이 삶이 구원받은 성도의 표요, 믿음이 좋은 증거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벧전2:2과 엡4:15을 듭니다.
벧전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성화 : 성스러울 성, 될 화, 성스럽게 된다. 거룩하게 된다.
성화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것으로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을 닮는 삶, 점점 자라가는 삶, 신자의 성숙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자라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믿는다하면서 전혀 자라지도 변화되지도 않는다면 그 믿음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성화를 우리의 키가 자라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러면 자라고 있는 과정에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버리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자람이 원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자람인가?
여러분 성화가 성화 다우려면 계속자라야 합니다. 퇴보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도는 성화되려고 노력해야 하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도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한번 성질내면 그동안 쌓았던 성화는 물거품이 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성화라면 온전한 성화를 이루고 죽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성화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자라는 것이라면
1. 첫 번째 생각할 것은 인간은 스스로 성화될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 본질을 알게 되면 성화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계속해서 완성을 향해서 나아간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롬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사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인간은 선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처럼 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이 과연 성화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우리는 아니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그렇게 성질을 잘 내는 사람이 성질도 줄이고,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이 미워하지 않고, 시기 질투하던 사람이 시기 질투도 많이 줄었는데 그게 성화가 아니면 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겉으로 표현되고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우리 내면에는 이러한 것들이 그대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해서 그 사람이 성화되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속으로 미워 죽겠는데 겉으로 웃으면서 악수하면 그게 성화되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격이 급한 사람보다 부드러운 사람이 성화가 잘되겠죠? 믿음과 상관이 없이, 그래서 여러분, 정말로 성화되었다면 미움 자체가 없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위의 구절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있기 전의 이야기고 믿음이 있게 되면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성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대로 인간이 믿음으로 인해서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면, 선을 행할 능력이 있는 인간이 여전히 악을 행하면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명확히 설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면, 악을 이길 능력도 있어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악을 행할까요? 여기에 대해서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라는 말로 변명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선을 행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완벽한 인간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악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인간의 연약함과 함께 악을 행하는 것이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악을 행하는 인간에게 온전한 성화가 가능한 것일까요? 선을 행할 수가 있어서 성화되어 갈 수 있다는 말을 인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악을 행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성화를 이루어 가다가도 악을 행함으로 인해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뜻이 됩니다. 결국 성화되어 가다가 무너지고, 또 다시 성화되어 가다가 무너지는 것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성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만약 열심을 성화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만약 열심이 성화라면 바리새인들은 가장 성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온전한 성화가 아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본질, 본질, 하는 여러분은 신앙의 본질로 인한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까? 우리나 바리새인이나 도찐개찐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는 뭔가를 하고 안하고를 가지고 성화 되었다, 안 되었다. 믿음이 좋다, 안 좋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성화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점차 완성되어 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주어졌다고 해도 죄의 본성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를 붙들고 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본성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화를 우리가 키가 자라듯이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 기도 10분하던 사람이 1시간을 한다. 헌금 천 원 하던 사람이 만원을 한다. 예배에 잘 빠지던 사람이 예배 참석을 잘한다. 이러한 것은 성도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이것을 성화되었다 말할 수 는 없다는 말입니다.
2. 그렇다면 성도가 자람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이 말은 의미는 무엇을 하고 안 하고가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서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으로 바뀐 것을 뜻합니다.
성도에게 믿음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동안 살아오던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환경이나 형편 또한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성격이나 본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죄를 안 짖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믿음이 있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서 세상을 보고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것이 없으면 안 되는 삶을 삽니다. 세상의 것이 기쁨의 이유가 되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고, 또 원망과 불평의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믿음이 주어지면 그 믿음으로 인해서 세상의 실체와 함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린다고 해도 그리스도 밖에서의 인생은 희망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의 것이 기쁨의 이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의 이유가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성화입니다. 전에는 돈이 없으면 한숨이 나왔는데 믿음이 주어짐으로써 돈이 없어도 함께 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참된 성화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라간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더욱 굳건히 세워져 가는 삶이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가 전부인 삶이 되어가는 것이 진정한 성화며 자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처럼. 성화도 나의 행함과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성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우리를 성화된 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엡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과 밖이라는 두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의 세계는 악함, 분노, 노함, 떠드는 것, 훼방이 있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인자함, 불쌍히 여김, 용서가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악함, 분노, 노함, 이러한 것을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 안의 세계가 아닙니다. 나에게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분노와 시기와 악함과 노함을 보면서 나 같은 자는 생명의 세계에는 도무지 들어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와 용서가 나를 깨끗하게 하고 그리스도 안의 세계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의 세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믿음으로 할 것은 분노가 나쁜 것이니까 분을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죽을힘을 다해도 나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가 나 같은 자에게 얼마나 큰 은혜며 선물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용서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은총과 복을 누리고 있음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게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인자를 맛보아 그 맛을 알게 되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제부터 성화되어야지’라는 결단을 하게할까요?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한다면 순전하게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젖은 그들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인자를 맛보아 알게 되면 자신을 살리는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씀을 사모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단지 성경을 많이 보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를 사모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수 안의 세계를 살아가는 성도가 진심으로 구할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자비를 더욱 풍성하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변화고, 이것을 성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점차 거룩해져가는 성화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애당초 우리의 행함과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으로 베풀어진 은총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함을 가지고 거룩에 차별을 둘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오후 삶 공부시간에 율법주의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율법주의가 무엇입니까? 자기 의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의는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전혀 우리를 구원하기에 전혀 부족함이나 하자가 없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또 다른 의를 이루기 위해 하여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더 의롭게 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합시다. 그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의를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토록 심각한 율법주의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하게 된 자는 이 거룩이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믿음 조차도 하나님이 선물로 내게 주셔서 내가 믿어짐을 받게 되어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게 되었음을 알고 나를 거룩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 에버랜드의 자유이용권
따라서 스스로 거룩해지겠다고 하는 것은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를 멸시하는 것이고, 인간의 힘과 공로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겠다는 악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죄를 지으면 예수님이 자신에게서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떠나고 복도 떠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는 자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죄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죄에 붙들려서 눈만 뜨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신의 죄를 보게 되면 예수님의 함께 하심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심으로써 자기 백성을 통하여 말씀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성도에게서 사랑이 나타나고, 인내가 나타나고, 절제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성도의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이 자기 부인이 믿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성도의 성화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자녀가 철들었다 할 때 뭐가 철든 것입니까?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이 철이 든 것 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성화가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것, 이것이 곧 자기부인인데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믿음이 가능케 합니다. 믿음이 그리스도 밖에서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으로 가능하게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고전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2) 성화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우리는 성화를 내가 무엇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왜 이런 이해를 가지게 되느냐하면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잘난 척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일 말씀드린 것과 같이 내가 한 것을 가지고 뭔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백하게 되이 성화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성화’(성스러울 성, 될 화)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성화다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닮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까?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본받으라는 겁니까? 순종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이유는 그가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뜻으로 채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화가 무엇입니까?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이 뜻 앞에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화를 어떻게 합니까?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화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자기의 계획, 자기의 뜻을 비우로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자기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계획이,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옳은 것임을 믿고 그 계획을 완성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감사와 감격 우리의 헌신, 충성, 봉사는 하나님의 것을 알게 된 자의 소원이요, 간절함에 대한 표현이지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셨으니 나도 무엇인가 보답을 하리라, 이것은 없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갖다 바칠만한 것을 스스로 만들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진정한 성화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은혜와 용서, 사랑과 자비, 긍휼, 평강을 누리는 것이 성화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는 것이 성화인데 이것조차도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 우리를 그 자리로 인도하는 것임을 알고 믿음에 순종하는 삶이 성경이 말하는 성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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