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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친밀함으로 나가는 길

09.친밀함으로 나가는 길(9) 친밀함의 유익 (시25:14)

by 오용주목사 2018. 3. 4.

09.친밀함으로 나가는 길(9) 친밀함의 유익

25:14

 

1. 우리가 하나님 친해지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일에 온 삶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제가 한때 야구를 참 좋아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떤 스포츠도 마찬가지겠지만 잘하는 팀과 못하는 팀의 경기를 자세히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작전수행능력입니다. 강팀 일수록 감독의 작전을 수행능력이 좋습니다. 그런데 약체일수록 작전수행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감독이 번트 사인을 냈는데 감독의 의도대로 작전수행을 하지 못합니다. 도루 사인을 냈는데 실패합니다. 그러면서 경기에 이긴다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선수가 감독의 작전지시니까 의무적으로 수행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독 마음을 알고, 그 작전이 내 마음에 와 닿고, 나도 그 작전대로 하고 싶고 이럴 때 작전 수행이 더 원활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감독이 번트 사인을 냈는데 자기는 아니 여기서 왜 번트 사인을 내냐고, 여기서는 강공으로 나가야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작선수행이 원활하게 되겠습니까? 분명 그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과 친밀함이 없이 그저 의무감만으로는 작전 수행능력이 떨어질 것입니다. 또는 작전 수행을 잘 못하면 감독되신 하나님이 야단칠 거야, 나를 2군으로 내려 보낼 거야, 이런 마음만으로는 작전수행능력이 효과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친밀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친밀하면 감독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 감독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 되어 작전을 수행하니 그 작전은 잘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퇴근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여보 오면서 뭐 좀 사와요.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탁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알고, 아내의 필요를 알고, 남편도 자기의 필요를 느낄 때 그 부탁을 잊어버리고 않고 잘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나타나셔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외치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작전명령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니느웨의 정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기 위해 배를 탑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요나는 작전수행에 실패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친밀함이 없으니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니느웨를 회개시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데 요나는 니느웨가 심판을 받아 멸망받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친밀함은 우리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작전수행을 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면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는 다는 말이 있고, (걷는 모습도, 자는 모습도), 부부는 서로 닮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서로 가까이서 늘 보게 되면 서로 닮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면, 다시 말해 친밀하면 주님의 성품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굳이 우리가 하나님을 닮으려고 흉내를 내지 않아도 나로 모르게 닮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큰 바위 얼굴 /나다니엘 호손 [Nathaniel Hawthorne, 1804.7.4~1864.5.19]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살던 어니스트는 어렸을 때부터 큰 바위 얼굴을 보며 자란다. 곧 큰 바위 얼굴의 모습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을 믿으며, 그 사람을 기다리며 산다. 매일 큰 바위 얼굴을 보며, 인자하고 온화함, 강건함을 가진... 사람을 기다리던 어니스트는 어느새 큰 바위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해있다는 내용이다.

 

참 단순한 줄거리이고, 실제로 애들이 읽는 동화이기에 그림도 많고 쉽게 읽히는 책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사하는 바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 과연 우리는 누구를 롤 모델(Role model)로 삼으며 살아갈 것인가?? 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합니다.

 

오늘 많은 신학생들에게도 롤 모델(Role model)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을 롤 모델로 삼고 목회를 준비하는 신학생들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의 바라봄이 잘 못된 것은 아닌가요?

오늘 많은 크리스천들의 고민은 내가 왜 하나님을 닮지 못할까? 내가 왜 이렇게 변화지 않을까가 고민입니다.

우리가 오후에 공부하는 삶 공부 교재 십자가의 복음 교재 서론에 여주봉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를 몇 십 년 믿었는데도 삶이 변화되지 않는가?” 이거 우리의 고민 아닌가요?

우리가 부부싸움 하지면 약방의 감초처럼 하는 말이 뭡니까? 당신 예수 믿는다고 해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하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무엇인 문제일까요? 우리의 바라봄이 시선이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은 일하기 시작하네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낄 때

세상은 주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그러나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그래서 늘 그분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 오직 성령의 열매는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으로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라는 말입니다.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3.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면, 죄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집니다.

성경에 나온 인물들 중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아세요? 한 결 같이 죄에 대한 인식이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사물엘도, 다윗도, 엘리야도, 느헤미야, 다니엘...

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1: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1: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1: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9:4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9:5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9:6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과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9:7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9:8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9:9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9:10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9:11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9:13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9:14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9:15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9:16 주여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따라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 9:17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9: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9: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반대로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고 세상과 친밀한 자들의 공통점이 뭐냐? 죄에 대해 무감각 하였다는 겁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타락하고 악이 득세할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공금을 행령하고, 불법을 자행하고, 외도를 하고, 심지어 사람을 살해하고도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만큼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당연히 죄와 가까워 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죄에 대한 무감각은 불신자들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조금 후에 살펴보겠지만 우리 믿는 자들에 죄에 대한 무감각이 위험 수위를 벋어난 지는 이미 오래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5:20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서 죄를 많이 지어야 하는가? 이러면 괴변이 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더욱 많습니다. 그러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죄의 인식이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입니다. 죄를 깨닫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긍휼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과 친해질수록 나타나는 것이 죄에 대한 인식이 더 선명해 진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햇빛이 창문을 통해 방안을 비출 때 그동안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얼마나 많은지 볼 때가 있죠? 마찬 가지로 성령님과 친해질수록 죄에 대한 인식이 더욱 선명해 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 그 첫 번째 증가가 뭔가? 내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은 유명한 선지자 이사야의 소명장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본 순간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 무엇인가요?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가 죄를 인식하고 자백하면 그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자백을 들으시고 숯불로 그의 입술을 지져 정하게 하시고 사용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죄를 인식하는 곳에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베드로를 만나 부르실 때, 베드로가 한 말이 무엇이었나요?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를 떠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부르시고 동행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친해지는 과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분명한 죄에 대한 인식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은 성령님과의 교제에서 장애물이 아니라, ‘통로가 됩니다.

 

죄의 인식이라는 것을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령님과의 관계에서 죄의 인식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범주에서의 죄 된 행위와는 조금 다릅니다. 흔히 크리스천들이 생각하는 죄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세상의 오락을 즐기는 것, 사치하는 것, 세상의 유행을 따라 사는 것. 우리는 참 쉽게 그런 것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용서하지 못한 마음, 깨어진 관계, 예배를 드리러 나오면서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것, 예배시간에 자신의 경건함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불쾌하게 하는 것,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것, 자신의 의로움을 돋보이려고 누군가의 불의함을 드러내는 것, 그런 일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성령님 앞에서 죄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친해진다는 것은 그분을 근심시키지 않는다는 것이고, 죄란 그분을 근심하게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죄는 사실 너무나 명확하게 우리가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서 불편해하시면, 근심하시면, 금방 나타는 것이 우리 속에 평안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무서운 징계나 실수로 인한 고통을 당하기 전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작은 증거는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할 때입니다. 이때,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저는 점검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민감함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분을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죠.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이런 점검의 과정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때, 평안이란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안함은 절대로 죄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4.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면, 우리의 마음속에 더 큰 기름부음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친밀하면 할수록 더 큰 기름 부음을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기름부음이란? 한마디로 성령의 능력을 말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정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은사와 기름부음은 때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들이지만 기름부음이 가진 역동성은 은사를 최고조로 발휘시킵니다. 은사에 기름부음이 부어질 때 더 강하게 그 능력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여기 예언의 은사를 가진 분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은사에 기름부음이 부어질 때 다시 말해 성령의 능력이 부어질 때 그 예언은 더 쉽게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R.T. 켄달 목사님은 자신의 책 내일의 기름부음”p23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994년에 스프링 하베스트에서 강해설교를 했을 때 당시 나는 마인헤드와 스케그네스 두 곳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마인헤드에서 이사야 49장을 가지고 설교하던 중 나는 특별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설교에 분명 기름부음이 있었다.(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난 그 다음 주에 스케그네스에서도 같은 설교를 하면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두 번째 설교는 힘겹고 초조했으며,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똑 같은 원고를 가지고 했지만, 두 설교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우리의 예배, 기도, 찬양에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을 때 다른 것을 느낍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있으면 더 큰 친밀한 교제의 기름부음을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과의 동행의 기름부음을, 성령님의 인도의 기름부음을, 성령 하나님의 통치의 기름부음을 더 갈망하게 됩니다.

 

주님 난 알기 원해요 더욱 깊고 참된 사랑을

왕의 침소로 날 들이소서 성숙케 하소서 내 사랑

나에게 입맞춰주소서 날 안아 주소서

주의 향기 맡게 하고서 주 얼굴 보게 하소서

나를 들이소서 주여 오소서

주님 사랑해요 내 생명보다 더

주님 사랑해요 내 생명보다 더

 

이것은 우리가 갚아야 할 부채가 있어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과 친밀함, 동행, 인도, 통치는 우리가 받은 은혜의 기쁨을 누리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의무적인 동행이 아니라, 자의적인 동행이 시작됩니다.

 

만약 더 큰 기름부음에 대한 갈망이 혹시 우리의 이기심이나 세속적 욕심으로 나의 뜻을 이루거나, 자신의 업적을 쌓으려는 것에서의 갈망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일어나는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다면, 자기 뒤에 줄 세우기를 한다면 분명히 그러한 갈망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망이 끊임없는 성령님과의 교제를 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이기심을 넘어선 세속적 욕망이 아닌 성령님의 역사가 분명합니다. 지속해서 우리가 성령님께 맞추고 집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친밀함의 기쁨이 있어서 갈망하는 것이죠.

 

여러분, 내가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진심으로 우리가 바라는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성령님을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성령님의 통제 속에 맡길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 성령 하나님과 더 친해지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려는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이 찬양으로 설교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우리춘천이레찬양 76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정말 귀한 찬양이 아닌가요?

더 큰 기름부음에 대한 갈망은 내 삶의 패턴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삶으로 패턴을 바꾸고

내가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삶의 패턴을 교정하고

내가 죄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짐으로 죄를 멀리하고

내 마음속에 친밀함의 더 큰 기름부음에 대한 갈망을 갖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망은 우리의 삶에서 그분의 임재를 환영한다는 의미이고,

우리의 삶에서 그분을 떠나시게 하는 이유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이러한 갈망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성령님을 환영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갈망은 성령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표현이며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