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회복탄력성
눅5:1-11
여러분 혹시 “회복탄력성” 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회복탄력성이란? 사람이 어떤 역경이나 좌절을 경험했을 때 그것을 잘 버티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회복탄력성이라 하는데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이 회복탄력성이 심각하게 약하다는 겁니다. 한번 실패를 하거나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입고 낙심하거나 시험에 들면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1. 행복이 회복되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1순위? 구원의 기쁨인데 그런데 그 구원의 기쁨이 회복이 된다는 겁니다.
통영에 있을 때 저희부부를 참 많이 사랑한 부부가 있었는데, 이유? 노모가 계셨는데 하루는 임종예배를 드려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기도가운데 다시 살아나셨어요. 그 뒤 몇 년을 더 사셨는데.. 이 기쁨은 다른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나에게 그 구원의 기쁨이, 구원의 행복, 즐거움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때가 언제였는지...만약 그 구원의 기쁨이 내게 없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심각한 중병에 걸린 겁니다. 따라서 이 문제부터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 2 순위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한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어떤 문제해결이나,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에서 오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함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삼상2;1 “한나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 하며” 창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이런 행복이 회복이 되지 않다는 겁니다.
어제 그제, 신천지에 빠졌다 나온 집사님을 만났는데 그 분에 말씀 중에 신천지에서 나온 분들이 이 진리가 참 진리라는 것을 알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신천지가 거짓이요, 이단이라고 해서 거기서 나왔는데 그렇다면 이제는 행복해야 되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말아닙니까?
왜? 이것도 가짜 같다는 겁니다. 아니 가짜를 진짜로 믿을 때가 더 행복하더라는 말아닙니까? 가짜가 진짜 같고 진짜가 가짜 같은 거예요. 신천지가 진짜 같고, 신천지를 믿는 사람들이 더 진짜 같고 교회와 성도들이 가짜 같다, 이거 심각한 문제 아닙니까?
2. 삶의 변화가 회복되지 않다는 겁니다.
세상사람들이 우릴 욕한느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도찐개진, 너희가 우리와 다른게 뭐냐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풍조를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가치관에서 성경적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창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보고 ~ 보았더라, 오늘의 문제는 “보며 보았더라”는 삶의 변화가 회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3. 회복이 불가능한 증거, 예수를 믿지만 교회 지체로서의 사역의 분배가 회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였고 그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고 그 지체들이 각각 제 기능을 발휘할 때 그 몸은 건강한 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초신자는 초신자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를 믿고 수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교회의 구경꾼처럼, 손님처럼, 방관자로 있는 성도가 통계적으로 80%에 달한다는 겁니다. 이거 심각한 것 아닙니까? 이유? 너무 깊이 빠지기 싫어서, 상처 받기 싫어서...
4. 하나님의 임재,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지 않다는 겁니다.
요즘 하나님의 임재. 복음의 능력을 구호처럼 외치지만 실제 우리의 예배나, 공동체 모임이나, 가정이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목음의 능력을 찿아보기란 쉽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주소입니다.
이렇다보니 교회는 교회대로, 가정은 가정대로, 성도는 개인은 개인대로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심각성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각 속에 꽉 차이는 것이 뭐냐? 이제는 안 돼, ‘해봐도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 한국교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어, 회복은 불가능해 이러한 열등의식과 패배의식, 부정적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다는 겁니다.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이나 목회자 중에 이런 생각아르안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이 사탄이 주는 생각인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 끝났어. 나는 실패한 인생이야, 우리 가정은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내 아내, 내 남편, 자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 한국교회 더 이상 소망이 없어...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 아닙니다.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탄이 가져다주는 생각에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에 반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렘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평안과 소망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라는 겁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들 가운데 실패하면 약방의 감초같이 거론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베드로입니다. 오늘 이 베드로가 어떻게 시패의 자리에서 회복의 자리로 가게 되었는지 살펴보면서 우리도 실패의 자리에서 회복의 자리로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와 그 배를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회복탄력성이 작동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배경은 게네사렛 호수가 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갈릴리바다라고 하기도 하는데 오늘 본문은 게네사렛 호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어마 어마하게 몰려드는 중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왜 그러냐 하니까 바로 앞장 눅4장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신적인 능력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겁니다.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요, 각종 병든 사람들을 신적인 능력으로 고쳐주신 겁니다. 이 소문이 나가지고 게네사렛 호수가로 수많은 사람들이 원근각처에서 예수님을 보려고 몰려들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몰려든 군중들의 초점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이 본문을 묵상하다가 참 감동적인 포인트 하나를 발견하는데 지금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한분에게 집중하는데 정작 예수님은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고 계시는가 하면 실패한 한 인생, 직업이 어부 인데도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 잡지 못해서 허탈감과, 낭패감에 빠져있는 시몬이라는 한 사람을 주목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예수 오빠)
지금 실패한 밤을 보내고 지친 몸으로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실패한 시몬의 배를 사용하셔서 수많은 군중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더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는데 마음에 막 감동이 찾아오는데... 아!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사람도 쓰시는 구나,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은 만선을 이룬 능력 있는 사람을 주목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이 세상 원리라면, 우리 주님은 실패한 사람도 주목하고, 실패한 사람도 찾아와 주시고, 실패한 사람에게 다가오시고, 실패한 사람의 배도 사용하시는구나... 이것이 왜 감동이 되었을까요? 이 주님의 원리 때문에 우리 모두도 지금 쓰임을 받고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실패한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나를 무시하지만 우리 주님은 실패한 나를 도구 사용하신다는 이 사실을 아는데서 부터 회복탄력성은 작동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어령 딸
몇 년 전 기도사역 시간에 미운 사람이 있는 분들을 초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50대 후반 여 성도님 -> 남편이 밉다고, 이유 - 결혼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바람피움
“그래서 내가 네 남편을 네게 맡겼단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남편도 사랑하셔서 나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구나 깨닫게 될 때, 회복탄력성이 작동되더라고요.
2. 아! 하나님은 실패한 나도 사용하시는구나, 이것을 알고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데서 회복탄력성이 작동됩니다.
눅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말씀에 의지하여” 그런데 사실 오늘 우리에게는 심각한 문제는 “말씀에 의지하여”가 없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삶이 없다는 겁니다. 대신 “내 경험, 내 논리, 내 판단‘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립니다. 내 경험, 내 논리, 내 판단은 지난밤에 실패한 것들인데 그것들을 여전히 붙잡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기적 같은 일이 둘 있는데 하나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가 하나라면 또 하나가 있는데 뭔지 아세요? 5절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여러분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 이것이 기적 아닙니까? 오늘 같은 시대에 우리가 하는 일이 대박난다면 그것이 기적이지만 하는 것 마다 안 되는 것 이것도 기적 아닙니까?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시몬이 밤새 고기 잡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베드로가 고기 못 잡게 쫓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밤새 을지 훈련한 것이죠
왜? 내 경험의지 한 것 내려놓고 말씀에 의지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 아닌가요?
여기서 질문?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셨는데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식견으로 어디에 고기가 있는가를 아시고 깊은데 그물을 내려라 했을까요? 아니면 깊은데 그물을 내려라 하니 사방에 흩어져 있던 고기들이 깊은 데로 몰려들었을까요? 정답은 몰라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음.
중요한 것은 내 경험, 내 논리, 내 판단을 내려놓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는 것이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만약 베드로가, 아니, 주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도 제가 이 갈릴리 바다에서는 잔뼈가 굵은 내로라하는 어부인데..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 말라고, 고암만 지르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제가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예수님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가 아니라 베드로가 밤새 그물을 던졌던 그곳에 예수님께서 그물을 내려라 하셨다면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똑 같은 방법이지만 내가 할 때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결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예) 부부 사이에 잘못한 것 있으면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반응이 신통찮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 하나님께서 너, 아내에게 용서를 구해라는 마음을 주십니다.
이 때 아이고 주님, 제가 저번에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는데 반응이 영, 신통찮았는데요, 이렇게 할 수 도 있고, 지난번에 용서를 구했지만 했지만 성령하나님께서 용서를 구하라 하시니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할 수 도 있습니다. 후자의 이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 말씀 의지하여,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순종을 통해 회복탄력성이 작동되는 겁니다.
3.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사건을 재해석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지난밤은 실패의 밤이었습니다. 내 인생에 피했으면 하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난 이후로 지난밤에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사건을 재해석 해보니 그것이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는 순종의 사람이 되게하였고. 또 하나 그 실패가 주님을 만나게 했던 축복의 통로가 되더라는 겁니다.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그 실패가 주님을 만나 평생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축복이 되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인생은 해석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 해석하는 힘, 그것이 인생입니다. 옛 날 우리 부모님들이 불렀던 찬양은 대부분 구슬픈 찬양이었습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우리는 순풍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잔인하게도 2절로 확 등을 떠밉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떠 빨리 갑니다.
풍랑이 내 가정을 엄습하고 있는데 좌절이, 실패가 내 인생을 뒤덮고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떻게 해석합니까? 이 풍랑 인연하여서 떠 빨리 갑니다. 인생은 해석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팔았지만 그 인생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창45:5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여러분, 인생은 해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어려우면 드는 생각이 뭡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 아냐? 하나님은 이제 나를 버리셨나봐? 이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4. 나를 이해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시몬, 시몬이란 이름의 뜻 (조약돌)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이름이 반석이라는 뜻인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예수님께서 불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요21: 1절에 “그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시해서 막달라 마리아, 도마, 그리고 많은 제자들을 만나 주십니다. 그런데 요21:1절에 그 후에란 이렇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을 만나주신 그 후에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놀라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요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옛 날로 돌아가겠다는 겁니다. 세상에 부활하신 주님을 자기 두 눈으로 목도한 베드로가 다시 옛날로 돌아가겠다. 이 구절을 두고 여러 가지로 해석하지만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 까요?
20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뛸 듯이 기뻤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하라 말씀하셨는데 졸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내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자기를 저주까지 하면서 주님을 부인했던 자기의 초라한 모습이 떠올려진 것 아닙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자기의 상처를 잊고 적당히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니 자기의 상처가 드러나 견딜 수 없어 다시 옛날로 돌아간 것 아닌가요? 여러분 이것 우리 모습 아닙니까?
여기 베드로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분이 한 두 분입니까? 그런데 왜 맨날 그렇게 우울하고, 자기를 자책하고, 죄책감에 빠지고 왜 그렇습니까? 그건 베드로처럼 그 신앙생활의 초점이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부활하신 주님으로 소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의 초점을 자기 자심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신앙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두니 그러니 어떤 부작용이 일어납니까? 옛날로 돌아가 물고기 잡으러 간 거 아닙니까?
그날 베드로가 연약한 자기를 주목하지 않고 과거에 매여서 연연하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더라면 어처구니 없는 옛날로 돌아가는 실족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와 제자들을 주님이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시는 장면을 생각해보세요. 요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여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얘들아”라는 표현입니다. 애들아 이 말은 헬) 파이디아인데 이 말은 가정에서 부모가 애들을 부를 때 사용되던 일상용어인데 이 용어를 지금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를 때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20장 도마를 만나주시고,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실 때는 이 단어를 안 썼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파이디아, “애들아” 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주님께서는 시편에 나와 있는 표현처럼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또다시 옛날로 돌아가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영육간에 결핍된 생활을 하는 베드로를 보고 마음이 아프시고 내가 너희에게 온 것은 너희를 야단치고, 책망하고, 왜 그따위로 사느냐고 잔소리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너희 눈에 눈물을 닦아 주고, 너희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왔다. 이것이 애들아 입니다.
또 요21: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여 나오는 “숯불”은 헬) 안드라키아 로 이 단어서는 성경 전체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데 한 번은 요21:9절이고요, 또 한 번은 요18: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여러분 이 배경 아십니까? 지금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전후의 장면인데 여기에 나오는 “불”이 원어로 ‘안드라키아’입니다.
여러분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 왜 이 “안드라키아”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베드로를 만나주시는 주님을 그렇게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던 그것을 자각하기를 원하셨든 겁니다.
그리고 요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네, 주님 네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또 물으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 네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또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이나 물으시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상처를 떠올리면서 하나씩 하나씩 그를 용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겁니다.
제가 이 장면을 묵상하니까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너를 안다, 너가 나를 부인한 것은, 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가 약해서였다는 것을 내가 안다. 너가 약해서 나를 부인했지만 그 부인한 순간에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
여러분 이 주님의 마음이 그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드는 회복탄력성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실 우리는 성도로써 해서는 안 될 죄를 참 많이 짖고 살아갑니다. 마음을 짓는 죄, 생각으로 짓는 죄, 행위로 짓는 죄, 들키지 않는 죄가 참 많습니다.
이럴 때 이런 기도를 해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몰랐습니다. 실패한 나를 하나님도 관심이 없다고 생각 했고,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기 보다는 내 경험을 의지했으며, 모든 환경을 내 관점으로만 해석하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분노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넋두리를 쏱아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순간에 제가 주님께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면 주님 이 순간에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하지 않아서 이런 것이 아니구요, 내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주님 더 의지하기 원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베드로가 왜,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고 계시듯,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십니다.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왜 그렇게 분노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아시고, 이해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실패한 그 자리에 찾아오셔서 하나씩, 하나씩 우리의 아픈 상처를 만지시며, 치유하시며,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설교를 녹여 놓은 찬양입니다.
전능 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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