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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교회의 기초

02.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행10:1~16)

by 오용주목사 2016. 1. 23.

02.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

10:1~16

 

 

얼마 전에 종방 되었던 응답하라 1988” 드라마가 케이블TV 역사상 유래없는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이렇게 인기가 있었다던 이유는 1988년대를 배경으로 먹을 것이 생기면 이웃 간에 서로 나눠먹고, 집안의 대소사를 함께 했던 이웃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서민 드라마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남편이 갑자기 퇴근해서 밥이 없을 때 이웃집에 달려가 밥 한 공기 얻어 와서 저녁을 차릴 수 있었던 인간에 대한 향수가 있고,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맞다, 인간이 바로 저랬었지를 생각나게 한 그런 드라마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곳에 이사를 와 이사 떡을 돌렸는데 사람들이 너무 좋아라하더라는 겁니다. 왜 일까요? 먹을 것이 없어서도 아니고 이사 떡이 특별이 맛이 있어서도 아닐 텐데, 왜 좋아할까요? 이것이 바로 사람 사는 맛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초대신약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행복이 넘치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고,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서로를 섬기는 사역의 분배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임재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며 구원 얻는 성도가 더해지는 교회공동체... 지난 주일은 우리 모두 이러 교회공동체를 꿈꾸어 보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행복, 변화, 분배, 임재가 회복된 신약교회, 이것이 구호가 아닌 정말 이런 21세기신약교회로 회복되는 꿈을 꾸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교회를 꿈꾸고 이런 교회로 회복을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응답하라 1988” 입니다. 우리가 이런 교회를 꿈꾸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런 교회를 세우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통해 21세기 신약교회를 세워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사도행전10장은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 중, 가장 중요한 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0장은 그동안 구원은 유대인에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구원이 유대인이라는 장벽을 뛰어넘고 이방인으로 흘러간 첫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마16:16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했던 신앙고백이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면 행10: 34~35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는다하는 신앙고백은 선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고넬료가 환상 중에 10: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는 말씀에 순종과 베드로가 환상 중에 부정한 짐승을 잡아 먹으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방인 고넬료 집에 청함을 받고 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둘 다 쉽지 않은 순종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한 상에 앉아 식사도 하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아침마다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기도를 했던 상황에서 유대인인 베드로 그것도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를 이방인이 자기 집에 청한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청함을 받고 간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왜 일까요?

 

1. 자기의 신념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신념의 사람이었습니다. 신념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 외에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환상 중에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을,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 이 때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10: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베드로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저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없나이다. 저들은 절대로 구원받아서는 안 되는 이방사람들입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베드로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스라고 응답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까? 바로 자기 신념입니다. 구원은 유대인만 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라고 반응 하고 있는 겁니다.

 

요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니느웨 사람들은 구원받아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그로 다시스로 도망가게 만든 것 아닙니까?

 

우리도 각자 나름대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신념은 어디까지나 신념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누가 들어도 좋다 합당하다고 칭찬해 주는 신념이 있다 하지라도 신념은 신념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 다리를 저는 것으로 인해 열등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늘 강한 모습을 보이고, 무엇을 해도 주도적으로 하려고하고, 설교도 아주 긍정적인 설교를 하고, 성도들을 웃게 하는 그런 목회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신념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신앙이라고 붙잡고 있는 것들, 심지어 자녀들에게까지 전수 하면서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 가운데 신앙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에 머물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념과 신앙의 차이점? 신념의 사람은 나를 믿고 내 생각을 신뢰합니다. 교회생활은 이런 모습이어야지, 신앙생활은 이렇게 해야지, 예배는 이렇게 드려야하고, 금식은, 구제는 이렇게 하고, 선교는 이렇게 해야 해....자기 생각을 믿고 신뢰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내가 믿고 신뢰하는 것이 신념인지 신앙인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생활이란? 자기의 신념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신앙으로 바꾸어가는 작업입니다.

 

신념이 나를 지배할 때 치명적 인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여! 그걸 수 없나이다 로 반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기도함해서 되는 것이 아니야 직접 나가서 전해야지, 이런 사람은 기도하자하면 안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자기 신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신념과 신앙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신념의 사람이 아니라 신념을 넘어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에스로 반응 하는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2.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하는 삶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의도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실 때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이유? 하나님의 의도를 몰라서였습니다. ? 부정한 짐승을 잡아먹으라 하는 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를 몰랐던 겁니다.

 

 

요나도 마찬 가지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의도를 모르니 불순종의 길로 가는 것 아닙니까?

 

마찬 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왜 이 일로 나를 부르시는지 그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 마음을 모르니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오해가 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만 좋고, 우리는 죽어라 고생만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분명히 뭔가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의 유익보다 내 유익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유익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했다 해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게 무슨 신앙생활이라 할 수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로 부르심입니다.

 

너 이거 한번 해봐, 너 이거 한번 해 볼래....그럴 때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이런 저런 핑계되지 마십시오. 그때 하면 하나님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때 네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이 하라하시니 한번 해 보겠습니다. 할 때 그 때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3.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하는 삶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내 것을 내려놓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 반응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생각, 내 형편, 내 문제들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 보세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하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제가 누구입니까? 이방인들과는 식사도 같이 하지 않는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나에게 이방인이게 가라하십니까? 여전히 유대인이라는 자만심, 기득권이 내려지지 않은 겁니다.

 

모세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얼마나 많은 핑계를 됩니까? 나는 입술이 뻣뻣하다. 나는 혀가 둔하다, 나는 말을 못한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핑계는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도리어 방해만 됩니다. 이런 핑계와 이유가 내려져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일로 부르실 때 내려놓기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마 가족일 것입니다. 때로는 남편이 걸리고, 아내가 걸리고, 자녀가 걸립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부모님이 걸리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지난 성탄절에 일사각오 주기철다큐멘터리가 방송 되었죠?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를 앞두고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당하는 고문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가족들이었습니다.

이 때 이 자세가 굉장히 중요한데

하나님 내 아내(남편)는 더 이상 내 아내(남편)가 아닙니다. 아내를 하나님께 내어 내어드립니다이런 자세입니다. “하나님 내 자녀는 더 이상 내 자녀가 아닙니다. 자녀를 하나님께 내어 내어드립니다자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게 그 영혼을 섬기라고 붙여 주신 것 제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 하느라고 아이를 챙길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내가 그 사람을 챙길 테니까 하나님께서 제 아이를 좀 키워 주십시오. 이 자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만약 하나님께서 네가 알아서 키워봐 하신다면 잘 키울 자신 있으십니까? 자녀들을 매뉴얼대로 키운다고 그렇게 잘 크지 않습니다. 아이는 럭비공 같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키워주시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자녀를 우상의 자리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아이를 키워 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자세

 

1)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모든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부르신 일에 두겠다는 자세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이 자세가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일을 잘 감당해 내고 싶은 열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열정만 가지고 안 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하면 우리의 눈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말은 나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이 부르신 일에 두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나의 눈을 두면 내 가족들의 눈도 나를 따라오게 됩니다. 내가 어디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가족들의 관심도 따라오게 됩니다. 나의 우선순위가 이 만큼이면 가족들도 그 만큼의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오이코스로 모이게 될 텐데 오이코스 순장이 우선순위를 오이코스에 두면 지체들도 우선순위가 오이코스에 있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신앙의 삶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부르신 일에 두어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 주겠습니다 의 자세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말은 다들 잘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크리스찬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과 삶이 다르다는 겁니다. 말을 못하면 밉지는 않지...말은 청산유수처럼 잘하는데 삶을 보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 주겠습니다 의 자세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10% 말하고 90%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반대 90% 말하고 10% 겨우 삶으로 보여주니 욕을 먹는 겁니다.

 

3)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정말 아낌없이 사랑하겠다는 자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일 중에 가장 큰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혼을 살리는 일로 부르심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정말 아낌없이 사랑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붙이시면 먼저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음 까지....

 

) 도배하신 사장님을 만나게 하셨어요. 그러면 우리는 가장 먼저 뭘 생각하느냐? 어떻게 교회로 모시고 올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틀린 겁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그 분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그 방법을 찾기 시작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은 섬김과 기도인데 그 섬김과 기도 안에는 희생이 들어가야지 되더라고요. 그런데 희생이 뭔가? 희생은 내가 없는 것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희생입니다.

 

) 돈 많은 사람이 음식을 많이 차려서 섬기잖아요. 그걸 와서 먹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희생했다는 생각 별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 돈 많으니 자기들 밥 먹는데 숟가락 하나 더 놨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돈이 없는 사람이 돈을 써서 섬기면 그것을 희생이라고 봐 주더라고요. 정말 건강이 없는 사람이 건강을 가지고 섬겨주면 그것을 희생이라고 봐 주더라고요.

 

내가 없는 것을 가지고 섬길 때 그것이 희생이라고 받아들여지고 희생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것이 상대방에게 감동으로 받아들여지고, 감동이 될 때 그게 리더십이 생기고 이러는 거다 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희생이 있어야 하나? 시간과 물질()

지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급하면 새벽이라도 달려가고, 먹이고,

 

5. 이 때부터 열매가 맺혀지지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애기하는 열매는 두 가지로 사역의 열매, 성품의 열매입니다.

 

1) 사역의 열매

 

개인, 가정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열매

기도응답의 열매

영혼을 살리는 열매

 

2) 성품의 열매

 

우리가 상처 없이 자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화하나 조절하지 못하고, 그런데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애들에게 모범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하다보면 내가 변합니다.

 

예수 믿고 가장 행복한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변화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내가 싫은 내 모습이 있습니다. 내가 너무 싫고, 내가 너무 증오스럽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내가 너무 싫은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싫던 내 모습이 내게서 조금씩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이게 행복입니다. 이게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내가 변하니 가정도 변하고, 우리도 모르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있는 겁니다.

 

이런 인생이 어렵지 않습니다. 많은 희생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에 한번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할 때 우리 삶 가운데 이런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예스라고 반응하면 나는 전혀 그런 삶을 살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삶을 살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초대신약교회의 비전을 품게 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주님이 디자인하신 교회입니다. 행복, 변화, 분배, 임재가 있는 교회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꿈꾸게 하신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 부르심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혹시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베드로는 이 삶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잘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근거가 행10: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말씀입니다. 삼세번 하면 생각나는 것 있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죄책감에 빠져 다시 갈릴리 호수로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였지만 주님은 사명을 잃고 깊은 절망의 골짜기에서 방황하는 이런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갈릴리 호수로 찾아오셔서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던 주님,

 

이방인들은 구원 받을 수 없다, 구원받아서는 안 되다는 자기 신념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 그래서 일어나 잡아먹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부인했던 베드로가 똑 같은 말이 세 번 반복될 때에 그 날 밤이 떠오르지 않았겠습니까? 주님의 온유하신 음성이 떠오르지 않았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신념으로 똘똘 뭉쳐진 베드로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찬송가 : 우물가에 여인처럼, 임재 후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