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남은 자”의 삶
롬 9:14-29
로마서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상속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유업”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유업은 아브라함의 아들 중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에게 주어졌고, 이삭의 아들 중 에서가 아닌 야곱에게 주어졌듯이 하나님의 유업은 신앙의 본질, 삽자가의 복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하나님 중심적 삶의 토대위에 이 유업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하나님의 유업은 “남은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오늘은 남은 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특히 극도로 타락한 시대일수록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창6장을 보면 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때 남은 자가 누구였습니까? 창7: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 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 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바로 노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 노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타락한 아합과 이세벨이 통치하던 시대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국적으로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엘리야의 눈에는 아무런 소망이 라고는 없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였지만 이세벨의 협박이 두려워 도망을 가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다 호렙에 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왕상19:10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왕상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나님, 나만 남았습니다.”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선 엘리야에게 “아니야, 이 시대에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들을 칠천이나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들을 가리켜서 남은 자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셨습니다.
남은 자는 말 그대로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는 소수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로마서 9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롬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 시대마다 이,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 모든 교회, 모든 선교단체를 다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 남은 성도, 남은 교회, 남은 선교단체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에 종교인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교회를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럼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남은 자는 누구인가? 요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바로 신앙의 본질, 십자가의 복음의 토대위에 세워진 자들이 남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남은 자에 속한 자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남은 자의 반열에 있게 되었습니까?
1. 우리가 ‘남은 자’가 될 수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15절).
이 말은 바울이 출33:19절을 인용한 말인데 출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은혜를 체험하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악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 점이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애굽을 용서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백성을 용서하셨는가에 대하여 그 근거를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한다(출 33:16, 18).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나의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였다.
긍휼 = 불쌍히 여김 = 민망(스플랑크니조마이)
긍휼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되어 사용되는데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심판을 내리지 않는 것
소돔과 고모라 성의 남은 자 롯은 전적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여기 긍휼이 여겼다 라는 말은 그냥 불쌍히 여김이라는 말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냥 마음으로만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결과 고처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결과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결과 우리를 남은 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노예 되었던 애굽 땅을 떠나 출애굽 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건덕지가 있어서 애굽에서 구원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이 무슨 잘한 것이 있어서 광야 40년의 길을 하나님께서 먹이고, 마시게 하고 입히고 보호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전적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슬라엘 민족을 긍휼히 여기셔서 애굽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남은 자의 반열에 서 있다면 그것은 전적 하나님의 긍휼이 여기심,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짓신앙체계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신앙의 본질,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전적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라는 말입니다.
선택의 교리에 대해서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사도바울의 반론이 토기장이 비유입니다.
2) 우리가 남은 자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아직도 남은 자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우리의 굳은 신념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날마다 살아가는 내 삶의 현장을 하나님이 보실 때, 내 삶의 모습을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들을 향해서 징계하고 싶어 하실까요?
29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함과 같으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보면서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이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정죄하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바로 소돔이요, 고모라이신 줄을 모르십니까?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속에 우리의 삶이 끝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이유,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주님을 섬기는 주의 백성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어거스틴이 갑자기 어느 날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를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다가 “내가 하나님이라면 나는 벌써 나를 작살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주의 공의대로 우리들을 처리하였다면 벌써 너희들은 소돔이 되고 고모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남은 자로 남겨 두신 이유는 그의 끊임없는 지속적인 사랑으로 그가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용서의 교훈을 가르치실 때에 내 이웃이 네게 허물과 실수와 잘못을 범할지라도 일흔번씩 일곱번을 용서하라고 하셨을까요? 왜 일흔 번, 일곱 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까요? 그것은 끝없는 용서, 무한한 용서를 가르치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용서의 밑바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그 조건없는 긍휼의 풍성한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오늘도 지키시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아직도 남은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3) 우리가 남은 자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6: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살던 시대가 어떤 시대였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손에 만져지는 것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하나님의 자녀들조차도 죄악의 물결에 섞여서 살아가는 시대 아닌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6: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작정하셨는데 그런데 노아는 어떻게 그 사람들과 같이 멸망당하지 않고 “남은 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창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란?
1) 값없이 주시는 선물 – 구원
2)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
창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그러나’입니다. 여기‘그러나’는 창6;1-7절까지 내용, 죄와 심판을 함축한 말이 그러나 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그러나’ 안에는 노아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은 멸망의 저주에서 건져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나 의 은혜로’ 노아가 잘나서 구원해 준 것이 아닙니다.
창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2. 남은 자의 삶의 특징
사10: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10: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10:23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1)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사10: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당시 이스라엘이 의지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 애굽, 바벨론이었는데 결국 그들이 의지한 것에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가 의지한 것에 멸망을 당합니다. 권력을 의지하면 권력에 돈을 의질하면 돈에, 세상을 의지하면 세상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2) 하나님께 돌아오는 삶
사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몸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본질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렘31: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복음전파와 예배
사실 하나님께서는 열방 가운데 이스라엘을 남은 자 삼아 주셨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열방도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불충한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남은 자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 부르심의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입니다.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요, 교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남은 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남은 자 삼아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노아 혼자만 구원 얻고 천국가게 하기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노아를 통하여 새로운 구원의 역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남은 자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남은 자로 부르신 이유는 나 혼자 구원 얻고 천국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 본질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나의 온 삶을 동참하는 이 동역자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하나님의 행하심의 핵심이 회복과 부흥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죄 많고 패역한 세대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조금도 의롭지 않은 우리를 의롭다 칭하여 주시고 그 거룩한 구원에로 우리를 초대하셨으며, 죄로 인하여 더럽기가 한량없던 우리들을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잘 살고 계십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정말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잘 사는 것은 바로 남은 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내 삶을 드리는 삶이 잘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전성기는 언제입니까? 신앙의 전성기가 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내 삶을 드리는 삶을 드려야지 하는 분 안계십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내 삶을 드리는 삶을 드리기 시작할 때 우리의 신앙의 전성기를 맞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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