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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권별설교/로마서

48.마음과 입이 해야 할 일(롬9:30-10:13)

by 오용주목사 2017. 11. 26.

2017.11.26.                                                          48.마음과 입이 해야 할 일

9:30-10:13

우리는 지금까지 로마서를 살펴보면서 한 가지 큰 줄기를 붙잡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용어로 이신칭의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되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면 그렇다면 율법은 왜 주셨는가?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인가? 율법을 폐기처분해야 되는가? 괜히 율법이 있음으로 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는 율법주의가 생겨났는데 그러면 율법을 폐기하면 율법주의도 사라질 것이고 얼마나 좋겠느냐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1. 그러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율법의 원래 의도 의미가 뭐냐? 율법의 용도는 무엇 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과정을 기록한 책이 출애굽기인 것 아시죠? 출애굽기는 총 40장으로 되어 있는데 크게 두 파트로 나눠져 있습니다. 전반부는 1-19장까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한 과정을 기록했고, 하반부는 20-40장까지로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율법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인도한 과정의 마지막 장 19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9: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그리고 율법, 십계명을 받아서 내려옵니다. 그러니 순서가 이렇습니다. 율법을 주고 그 율법을 지키면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된다가 아니고 구원이 먼저 오죠, 내가 너희를 이렇게 구원하였으니 이렇게 살아야 된다 라고 율법이 주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한 것은 단순히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애굽의 종 된 자리에서 꺼내 너희를 거룩한 존재, 거룩한 백성, 거룩한 임무를 주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알게 한 것이 율법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며, 우리 죄를 깨닫게 하며, 하나님을 믿게 만들며, 하나님과 화목케 하며, 하나님을 사랑케 하며, 우리를 무엇을 위하여 불렀는가를 알게 하며,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삶의 규범을 알게 하기 위한 자세하고 상세한 설명서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31:9-13 / 하나님 경외하기를 사랑하기를 배우는 것

31:9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10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11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12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13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율법을 악용해서 자기들이 의롭게 되는, 구원을 얻는 조건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뿐인 줄 아십니까? 오늘 날에 사서는 이 율법을 복 받고, 문제 해결하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능력 받고, 목회성공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들의 자부심이 되어버렸고, 또 이 조건에 미달되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멸시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신앙사상이 팽배한 가운데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죠?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환영했습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을 열심히 지켰고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유일무이한 자부심이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게 아니고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누가 그 복음을 받아들이겠느냐 말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쌓아온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데 이게 보통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거절하고 거부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지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9:31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10:3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며 의롭다고 인정받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오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믿음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지금 이 유대인들의 증상과 비슷한 사람들이 상당이 많습니다. 여러분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의 증상이 뭔 줄 아십니까?

1) 영적 우월감

2) 영적 열등감입니다.

둘 다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데서 나오는 감정들입니다.

 

2. 여러분 이렇게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의 치명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9: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 부딪칠 돌, 걸림돌, 거친 바위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라들에게 예수가 걸림돌 입니까? 어떤 사람들에게 예수가 거치는 바위가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걸림돌이 된다는 겁니다. 거치는 바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중세 로마시대에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십자가의 복음은 면죄부를 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는 거친 돌이요, 걸림돌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 가지입니다. 열심, 열심을 강조하면서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십자가 복음 또한 여전히 걸림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거치는 반석,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세상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예수가 걸림돌이요 거치는 반석이 될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은 괜히 돈 사랑하지 말라해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지, 아니 저놈의 인간 꼴도 보기 싫은데 예수님은 괜히 원수 까지 사랑해라 해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지, 아니 사람이 이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적당이 타협도 하고, 융통성도 발휘해야 살아남지, 그런데 예수님은 정직해라, 타협하지 말라 그래서 어떻게 살 수 있나...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는데 자꾸 넘어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꾸 시험에 들고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면 근원적인 점검이 필요합니다. 내가 교회는 나오지만, 예배는 드리지만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행위, 내 공로를 의지하고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 그럼 왜 이렇게 어리 섞은 잘못에 빠지게 되었는가?

왜 일까요? 지식이 없는 잘못된 열심에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한 마디로 몰라서 그런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은 있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부러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히 무지하고 잘못된 열심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열심은 있었지만 구원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습니다.

마치 요즘으로 말하면 여호와 증인이나 신천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다한 열심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국 멸망당할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유대인들 또한 구원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행위구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지식이 없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잡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밖아 사형을 시켰습니까?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가 빌3:6절에 눈물로 고백하는 자기의 과거의 과오가 이겁니다.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누구 못지않은 열심을 내가 가졌지만 그 열심에 바른 지식이 없으니까 하나님께 잘한다고 해드린 것이 도리어 하나님과 원수 되는 짓만 골라가지고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내 열심, 내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 섞은 짓입니까?

 

또 하나나 문제는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모든 율법을 온전히 다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성을 가진 인간이 모든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처방이 무엇입니까?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의 마침이 되었느니라이 말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오늘 놀랍게도 이 지식을 모르는 분이 너무 많습니다. 유대인들의 꽁무니 따라 다니듯이 열심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행위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니 신앙생활이 공허한 것입니다.

 

4.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말씀처럼 말씀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면 가장먼저 생각하는 말씀이 엡1:17절일 것입니다.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의 조화입니다. 말씀을 열 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항상 말씀과 성령이 같이 가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 말씀은 하는데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고, 성령 성령은 부르짖으면서 말씀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말씀과 성령이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찬양 / 말씀 앞에서

말씀 앞에서 경외함으로 주께 홀로 섭니다

말씀 앞에서 경외함으로 홀로 서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처럼 지식 없는 열심은 많은 부작용을 소음을 일으킵니다.

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

그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

하나님 말씀에 운명을 거는 자

순종하며 주 따라 가는 자

 

5. 그렇다면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습니까?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신약성경은 마음을 표현할 때 두 단어가 사용되는데 하나는 카르디아라는 단어이고요 또 다른 하나는 누스라는 단어입니다.

카르디아는 가슴, 심장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고요. 그런가하면 누스라는 단어는 머리, 이성,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여기에 나오는 마음은 누스입니다. 뭐가 강조된 것입니까? 지식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여기 나온 마음은 카르디아입니다. 마음이 기뻐다 할 때는 감정을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나오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의 마음은 카르디아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은 이성적으로 머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네 마음을 다오네 마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마음으로 믿기는 믿는데, 카르디아, 마음이 아닌, 누스, 지식으로만 믿는다면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했던 것처럼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조건으로 만들었듯이 지식적 믿음을 조건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으로 대신하고 그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 생각 했듯이, 지식적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믿고서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판단합니다. 믿음이 없는 것들이라고...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여 이 말은 히브리 문학의 댓구법인데 히브리 문학의 댓구법의 특징은 따로 따로가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30: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동시에 일어나고 있죠. 마찬 가지로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 다면 입으로 시인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입으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표현으로 완성되는 것 아시죠? 과거 성도들을 심방하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사세요? 물으면 목사님! 처자식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뭔줄 아세요? 자녀들이 그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모를까요? 표현을 안 하니까 모르는 겁니다.

 

여러분 남편을 사랑하세요? 아내를 사랑하세요? 자녀들을 사랑하세요? 그런데 왜 사랑한다고 표현을 안 하세요? 언제 하려고요? 아껴뒀다 언제 하시려고요. 여러분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아직 미완성 사랑인 것 알아야 합니다.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네 마음을 다오, 네 마음을 내게 주면 좋겠다. 그리고 네가 날 사랑한다면 입술로 표현해다오. 안 믿는 사람에게 표현하면 전도가 되고, 믿는 사람에게 표현하면 간증이 되고, 네 영혼에게 표현하면 신앙고백이 된다. 네 마음을 내게 다오. 그리고 그 마음을 입술로 표현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실까요?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밖히실 때 한편 강도가 생각이 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원받기를 틀린 사람, 모든 사람이 저 사람은 죄용서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십자가 처형을 선언한 사람, 그랬던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무슨 말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른 것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바울이 요엘2:32절을 인용한 말씀인데요.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 요엘서의 배경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 메뚜기 때로 대표되는 이방민족의 약탈로 고통당하는 때입니다. 어렵게 농사를 짓고 추수할 때가 되면 그 악한 것들이 와서 약탈을 해가지 죽을 거 같은 겁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 그들을 괴롭힐 때 주신 말씀이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말씀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왜 이 말씀을 인용해왔을까요? 너희들 삶 가운데 이러한 위기가 올 때, 너희들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도래할 때에 그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입니다. 그냥 입에 발린 주여, 주여가 아니라, 진짜 이 정말적인 위기에서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또한 요엘처럼 약탈자들로 인하여 그들이 괴롭고 힘들었지만 그 약탈자들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이게 그들의 영혼에 축복이 아닙니까? 여러분 지금 무엇으로 힘들어 하세요, 그러나 그 힘듦으로 인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이 아닌가요?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