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10.29 44.하나님의 유업(2) 교회의 기초 십자가 복음
롬9:1-9
로마서 1-4장을 요약하면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상속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유업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함께 하셔서 무엇 하시려고? 열방가운데 하나님을 드러내심으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 가운데 그쳤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여 의식에서도, 삶에서도 멀리 떠나서 하나님도 우리를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유업이 다시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내 모든 것으로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요,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나님도 오셔서 하나님의 유업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유업이 회복되기 위해서 교회가 반드시 십자가 복음의 터 위에 서야 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 롬9:6-7절 말씀인데 바울은 로마서 8장 까지 기록하다 9장에 와서 잠시 펜을 놓고 구약의 아브라함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롬9:6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9:7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무슨 말인가 하면?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남은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차남은 사래에게서 난 이삭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아브라함의 유업이 장남 이스마엘에게 주어지지 않고 이삭에게 유업이 주어집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시 그고 근동지역 풍속으로는 아버지의 유업은 맏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왜 일까요?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는 성경이 갈라디아서 4장입니다.
갈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4: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보세요,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후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곧 바로 거짓선지자들이 들어와 거짓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참 복음은 무엇입니까?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참 복음인데,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플러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 거짓 복음에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하면서 육체를 따라 난 거짓복음으로 비유된 이스마엘에게는 유업이 없고, 성령의 약속을 따라 난 참된 복음, 십자가의 복음으로 비유된 이삭에게 유업이 주어진다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유업은 거짓 복음이 아닌 참 복음에서만 받을 수 있는 데 그 참 복음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의” 이것이 참 복음인데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유업은 교회에 출석한다 해서 아무에게나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참 복음인 십자가 복음의 토대 위에 선 자들, 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이 진리의 토대 위에 선자들에게 유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십자가의 복음이 하나님의 유업을 받게 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이 십자가의 복음위에 만 서야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바울은 고전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무슨 말씀입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요, 교회의 기초를 놓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것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것이 바로 고전3:10절 비유입니다.
고전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비유에서 사도바울은 교회의 기초를 놓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3:11절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을 이해할 때 이 구절에 나오는 “터”는 교회의 터, 즉, 교회의 기초를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초는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유일한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 즉 십자가 복음이라고 말할 때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 즉 십자가의 복음 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십자가의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복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이론이나 교리나 진리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고전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그가 전한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뭐냐? “십자가의 도”라고 말합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리고 그 십자가의 도가 뭔가?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사도요한은 그가 전한 복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일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 복음 하는데 이 십자가의 복음은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교리를 지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관한 교리를 좀 안다고 해서 복음을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입니다. 사도바울은 롬1장에서 복음은 능력이라 했는데 복음의 능력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듣고, 그것들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울이 혈기가 왕성하여 예수를 믿는 자는 잡아 죽이고 옥에 가두는 일에 생명 걸고 앞장섰는데 그가 율법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빌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무슨 말입니까? 당시 바리새파는 구약의 율법을 연구하며 그대로 따르는 자들이 바리새파인데 바울은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나(행23:6) 바리새파에 입문한 자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존경받는 선생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한 자로서 율법으로는 흠이 없이 지킨 자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바울을 변화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그가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 아닙니까?
오늘도 교회 안에 가장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평신도입니까? 아니면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 소위 중직자라고 하는 분들입니까? 중직자 아닙니까? 그런 그들이 성경을 몰라서 그런 짓을 합니까?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아니까 중직자가 된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의 문제는 십자가, 십자가, 복음, 복음 하는데 이것이 이론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교회의 터가 십자가의 복음이어야 하는 이유?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세기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창세기 1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 택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열방 가운데 세워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에 흩어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대안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말고 다른 어떤 민족을 세워는 것이 아니라, 육적 이스라엘을 패하시고 영적 이스라엘,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기초는 박사도 아니요,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어떤 큰일을 이룬 것도 아닌,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즉 십자가 복음인 것입니다.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교회의 터가 십자가 복음이 된다는 말의 의미?
성령의 조명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살아나신 인격체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 암으로 시한부 생명을 사는 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신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이 약은 어떤 암에 걸렸든지 먹으면 완쾌 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이 소식은 분명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환자에게 이 복음이 복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약을 먹어야 복음이 복음 되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십자가의 복음이 교회의 타가 되는 것은 그냥 십자가를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고전1:3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1:30의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바울의 고백처럼 인격체이시고 살아계신 그분이 내 개인에게 실재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는 것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이 교회의 터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리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지 몰라도 그 교회의 기초는 실제적으로는 전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인 교회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유업은 그 교회 가운데 함께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에서 '지혜'라는 개념과 '의로움, 거룩함과 구속함'의 개념이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오히려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지혜를 설명하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속죄(贖罪)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가 '의, 거룩, 구속'의 개념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여기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의롭다함'을 입은 것, 곧 '칭의'를 의미하며, “거룩함”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상태를 의미하고, “구원함”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대가로 인간을 죄의 속박에서 풀어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롤 말미암아 거룩다 함을 받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롤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성령의 조명을 깨닫고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의롭게 됨, 거룩함, 구원함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는 반드시 십자가의 복음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이 온전히 주인 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고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복음을 터 삼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 되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주인 되지 않는 성도는 성도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신자와 성도의 차이점?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인가입니다. 주님이 내 주인 되시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이들이 구약 이스라엘이죠, 그래서 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열방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이 엄청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약의 이스라엘은 불충한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대안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말고 다른 어떤 민족을 세워는 것이 아니라, 육적 이스라엘을 패하시고 영적 이스라엘,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기초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즉 십자가 복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터 위에 선 교회에 하나님의 유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교회의 터인데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의로움, 거룩함, 구원함이 되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것이 섞이면 안 됩니다. 섞이면 거짓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의로움, 거룩함, 구원함이 되는 사실을 믿으면 그리스도가 주인 된 삶을 살게 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주인 된 삶을 살게 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위에 오직은혜, 오직 믿음, 오직성령, 오직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삶 위에 하나님의 유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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