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2. 27. 의의 종 된 자의 삶
롬 6:15-2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은 나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죽음이었습니다. 그 결과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 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단지 이것 하나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제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죄를 짓지 않아야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야합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롬6:19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제는 우리 몸을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때 죄의 종 된 삶에서 진정한 자유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랬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이코스에서 주일성수 때문에 고민을 내놓으니까 리더가 그 문제에서 자유 하라고 했다고요. 여러분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당신은 어차피 구원을 받았으니 죽으면 천국 갈 것이니까, 너무 주일성수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주일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을 하나님도 이해하실 테니까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말 아닙니까? 이게 자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주일성수 문제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주일을 잘 성수해야 자유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불평, 원망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형편을 아시니 내가 원망하는 것 다 이해 하실 거야, 그러면 자유 합니까? 아닙니다. 감사해야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죄를 안 짓겠다고 결심하면 죄에 대해 자유 해 질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언제 또 죄를 지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또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하신다. 이것 붙들면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의 종 된 자리에서 자유 할까요? 그 답이 17,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롬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적극적으로 의의 종, 의의 근원이 되신 유일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복종하는 삶을 살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죄의 종으로 살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도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삶이 예수를 믿으면 자동으로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자동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죄의 종 된 삶을 청산하고 의의 종,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죄의 심각성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이 정도 죄는 괜찮겠지” 생각합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삶을 그렇게 사는 성도들이 꽤 많습니다. 그 증거가 뭔 줄 아세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하면 세상 사람들이 짓는 죄 정도 생각합니다. 술 먹고, 담배피우고, 간음하고, 남들 속여서 등쳐먹고 그러면서 자기를 이런 죄를 짓지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죄가 뭡니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하는 것 당연히 죄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 하지 않는 것은 더 심각한 죄입니다. 항상 기뻐해라, 범사에 감사해라, 쉬지 말고 기도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여러분 이것 하지 않는 것 심각한 죄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6,12,14절에 하나님에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것 법하는 것 아주 심각한 죄입니다. 여러분 몰랐습니까? 몰랐다면 지금 잘 들으세요. 구약 이스라엘이 죽고 사는 것이 제사에 달려 있었습니다. 제사를 잘 못 드리면 나라가 망했습니다. 개인의 죽고 사는 것이 제사에 달려있었습니다.
레10:1-2절에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왜 즉사했습니까?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엄청난 도덕적 죄를 지어서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 잘 못드려서입니다. 이렇게 예배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성도들은 예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과 피 흘리기 까지 싸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대중 타협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도 내가 바쁜 것, 힘든 것, 아픈 것, 이해하실 꺼야... 정신 차리세요. 이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바쁜 것이 도대체 뭡니까?
예배드리는 것을 중단 할 만큼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드리면서도 예배에 집중하지 못할 만한 중요한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디 예배뿐입니까? 우리가 자주 불평 원망하는 것, 이것 시시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쉽게 불평, 원망합니다.
몇 가지 예를 더 들면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엡4:25이하에 기막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버리라, 왜 거짓말을 버리라고 했느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분을 내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왜 이런 충고를 하고 있습니까? 실제 이런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대 교수님이 2만7천명을 대상 설문조사를 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나라는?
일본이 74% 1위 (0.5%도 안 되는 기독교인)
우리나라는 정직하면 잘 살수 없다고 답한 사람이 무려 73%, 그것도 10, 20대가 80%를 차지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적당히 거짓말을 못 하는 자가 바로라는 취급을 받는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에 여러분들은 자유 할 수 있습니까? 거짓말은 죄라고도 인식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거짓말은 마귀가 처음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타락시킬 때 사용한 것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여러분 사탄이 사용하는 무기 중 가장 강력한 무기가 거짓말인 것 아세요. 그런데 우리는 그 거짓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융통성이라는 이름하에....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겼던 대표적인 우상이 뭐였습니까? 풍요의 신 바알이었습니다. 바알이 비를 내려 자기들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고 섬겼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섬기는 바알이 무엇입니까? 돈 아닙니까? 돈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돈에 울고 돈에 웃는 이것이 심각한 죄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기 남편들 계시는데 아내들이 남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게 남입니까? 부부입니까? 돈에게서 위로 받고, 돈만 의지하고, 도만 사랑한다면 그게 남이지 부부이냐 말입니다. 이런거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모든 것들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심각한 죄인 것조차도 모를 뿐 아니라 설령 안다고 해도 죄들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습니다. 싸우기는커녕 적당하게 융통성을 발휘합니다. 나는 구원 받았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야, 하나님도 허용하실 거야, 그런데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이해하지 않으십니다.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죄에 대하여는 그 무엇보다 단호하십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런데 우리 모습은 어떤지 아세요? 미워하고, 시기, 질투, 불평, 원망 다하고, 또 적당하게 세상과 타협하며, 죄의 종노릇 하며살다 주일날 예배당에 나와 하나님 제가 또 죄를 지었습니다.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실 줄 믿습니다. 적당하게 회개도 건성 건성으로 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이제는 죄 짓지 않아야 합니다. 이제는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죄에서 벗어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복음은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2. 죄의 열매는 전적 나의 책임임을 자각해야합니다. 결과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합니다.
나는 이미 구원 받았으니 적당히 죄의 종이 되어 죄 짓고 살아도 천국 가겠지 생각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사도바울의 경고를 보시기 바랍니다.
롬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여기 16절이 말하는 대상은 로마서의 독자, 곧 이미 예수님을 믿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자들을 향해 뭐라고 합니까? 죄의 종으로 살면 결과물이 뭐냐? 죄의 지배를 받게 되고 결국은 사망이요, 순종의 종으로 살면 의에 이른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짓고 살아도 천국은 간다’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죄짓고 살면 마지막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만 믿으면 무슨 죄를 지어도 천국 간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지금처럼 적당하게 죄를 지으며 살라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아직 복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죄에 대하여 동일한 기준이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20절) 마지막은 죽음입니다.(21절) 또 여러분이 하나님의 종일 때에는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22절)
예수님을 믿어도 죄짓고 살면 마지막은 영원한 죽음이다. 좀 혼란스럽죠? 구원은 한번 받으면 영원히 받는다고 배웠는데... 맞습니다. 한번 받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영원히 받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구원이 진짜입니까? 아니면 가짜입니까?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혹 가짜를 진짜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진짜 구원받은 자라면, 내가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면 죄에 종으로 그렇게 막 살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도 하나님이 이해하실 거야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죄의 종노릇을 한다면 어디 그게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믿는 척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정말 예수를 믿는 다면 달라지는 것이 있는데 지난주일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는 것이고 결과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함께 죽었기에 더 이상 죄의 종노릇에 자기를 방치하지 않습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웁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기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이 뭡니까?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왜 예수님께서 죽고 사셨습니까? 우리 몸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 위하여 살게하기 위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종으로 살게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셨습니다.
여기 의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종, 다 같은 말인데, 하나님의 종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말이요,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죄의 심각성과 죄의 결과물을 살펴보았습니다.
3.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죄를 종노릇을 청산하고 의의 종 된 삶이 가능한가?
롬6:17-19절을 보십시오.
롬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열쇠는 우리 마음이 쥐고 있습니다. 이것을 롬6:19에서 사도 바울이 좀 쉬운 방식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롬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내주어” “내주어”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러움과 불법”에 내주기도 하고 “의”에 내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법의 종이 되느냐, 의의 종이 되느냐 하는 열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사실 과거 우리가 죄의 종일 때는 아무리 마음이 원하여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 옛사람이 죽어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고 새 생명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육신의 욕망을 따라 죄의 종노릇하며 살 것인가? 이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종으로 살 것인가? 이 순종이 우리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시108: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시57:6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시57: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잠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가룟유다 : 마음을 지킴에서 실패한 사람
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어느 목사님께서 일본에서 목회하실 때, 한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는데, 예배 중에 남성 중창단의 특별 찬송 순서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찬양하러 나온 세 명의 남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야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큰 체구에다가 걸어 나오는 자세나, 입고 있는 라운드 티, 그리고 팔과 목에 있는 문신들이 보기에도 위압적이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자, 그들의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감동이었답니다. 그들이 찬양을 부른 후에 그 중의 한 사람이 짧은 간증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세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다 야쿠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아내가 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었고, 남편인 우리를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하고 금식하여 결국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는” 하면서 세 사람이 다 왼손을 앞으로 펼쳤는데,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세끼손가락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그 자리에 있는 일본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기에 모두들 숙연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은혜를 알고 나니, 그들이 비록 야쿠자의 중간 간부였지만 더 이상 그 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쿠자 두목에게 찾아가서 조직에 더 이상 몸담을 수 없다고,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에 조직을 떠나겠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야쿠자의 두목이 농담으로 받고 믿어주지 않다가 결국 진심임을 알고 모든 조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탁자에 칼을 꽂더랍니다. 그들은 그 칼로 자신들의 손가락을 자르고서야 조직에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을 잘라내었습니까?
또 여러분은 무엇을 결단하였습니까?
우리가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단1:9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여기 다니엘서 8절에 다니엘이 뜻을 정하였다, 결단했다는 다니엘의 의지, 결단이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9절입니다. 왜냐하면 9절 없는 8절은 아무런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8절을 다시보세요.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그랬더니 하나님의 응답이 뭡니까? 단1:9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먼저 선행되는 것은 다니엘의 의지적 결단입니다. 그랬더니 뒤따라오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예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헤쎄드)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을 향하신 변함없이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하던 단어가 ‘헤쎄드’입니다. 그 다음 나오는 ‘긍휼’도 하나님 성품인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산모가 태아를 자궁에 품고 있을 때 나타나는 사랑과 연민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 긍휼입니다. 다니엘의 의지적 결단과 그 결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이 8절과 9절의 조화를 보십시오.
마찬 가지로 우리도 나는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겠다. 죄의 영향을 받지 않겠다. 죄와 타협하지 않겠다. 이제는 의의 종으로 살겠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 거룩한 삶을 살겠다, 마음의 결단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함께 함으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룩한 삶이 작동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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