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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권별설교/로마서

26.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죄(롬6:1-14)

by 오용주목사 2017. 6. 25.

2017.6.25.                                                      26.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죄

6:1-14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이신칭의, ,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강조하였다면 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삶을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6장에서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나는 구원 받았다고 하기는 하는데 문제는 여전히 죄 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딤후 3:2 그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돈만 사랑하며, 뽐내고 교만하며, 다른 사람들을 헐뜯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3:3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도 없고 용서도 없으며, 나쁜 말을 일삼으며, 절제하지도 못하고 잔인하며, 선한 것을 싫어할 것입니다.

딤후 3:4 가까운 친구를 배반하고 성급하게 행동하며, 교만하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3:5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위에서 사도바울이 열거한 죄목들이 누구에게 있는 것들입니까? 나에게, 내 속에 다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5;20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을 들이 대면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니까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더 많이 죄를 짓자라는 궤변을 늘어놓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당시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 자들을 향하여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6:2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럴 수 없다라고 굉장히 강한 어투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15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오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외국에 나가 허랑방탕하게 탕진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거지가 되어서 아버지 집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어찌나 면목이 없던지 나를 아들로 여기지 마시고 품꾼의 하나로 여기소서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잔치를 벌이고 금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까?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탕자는 아버지의 이 은혜를 더욱 더 누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효도해야죠. 그런데 은혜를 더 받겠다고 다시 허랑 방탕의 길로 간다는 것을 아니지 않습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병든 자녀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은 더 간절해집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사랑을 더 받겠다고 일부러 병들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롬6;1-2절 말씀인 것입니다.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6:2 그럴 수 없느니라

 

그렇다면, 죄에 거할 수 없다면, 오늘날 성도들이 죄와 더불어 싸워 승리하는 삶은 가능할까요?” 여러분 대답해 보세요. 죄와 더불어 싸워 승리하는 삶이 가능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한가? 오늘 본문은 이 죄로부터 자유한 삶, 그리고 실제로 승리를 누릴 수 있는 삶의 열쇠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세 가지의 단어가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알라’, 둘째는 여기라’, 셋째는 드리라는 단어입니다.

 

1. 알라

알라라는 단어는 3절에도, 6절에도, 9절에도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무엇을 알라는 말입니까? 내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내 신분이 어떤 신분이었습니까? 전에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내 인생의 왕 노릇을 해서 죄와 사망에 끌려 다니는 인생이었는데 이제는 의와 생명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왕 노릇하는 자리로 내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이 신분의 변화를 사도바울은 엡2장에서 이렇게 설명 합니다.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런데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뀐 내 신분을 자각하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한 벌에 천만 원 하는 옷이 있다고 합시다. 그 옷 아무데나 입고 가겠습니까? 아무데나 풀썩 풀썩 주저앉겠습니까? 절대 안 할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내 영적 신분을 알면 아무데나 죄악의 자리에 덥석 주저 않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이 신분의식에서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6: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보세요. 바울의 정체성을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하님의 은혜로 죄로부터 해방되어 이제는 의의 종이 된 사람이다. 이게 바울의 신분의식 아닙니까? 이런 신분의식이 바울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는 힘, 이게 자기정체성, 신분의식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거룩도 마찬 가지 아닙니까?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나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다. 이런 자기 정체성에서 나오는 것이 거룩이라는 열매인 것입니다.

 

요일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이거 자기 정체성 아닙니까?

여러분 이러한 자기 정체성이 있는 성도는 이 땅에서 실패한 것, 어려움에 빠지는 것,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 이러한 것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그렇게 비참한 자리로 몰고 가지 않습니다.

 

dignity(디그니티) 1.존엄 2.품위 3.자존감 4.위엄 5.품격 자기 정체성

군인 군인의 정체성이 있을 때 군인다운 품위가 나오는 것 아닙니까?

 

2. 여기라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를 안 지으려고 날마다 죽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계속 죽는 훈련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다른 곳에 있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는 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과거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과거에 한 번 죽는 죽음을 말합니다. 과거에 한 번 완전히 죽었던 죽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과거 동사를 사용합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라, 명령형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 이해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여기라하니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라라고 이해합니다. 원래는 안 죽었는데 죽은 것으로 여기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여기라는 말은 분명한 사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실제로 죽지 않았는데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럼 언제 죽었습니까? 바울사도는 이 사실을 연합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보세요, 전혀 남남이던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 그 순간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촌수가 무촌입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이 순간이 주님과 영적으로 결혼하는 순간인데, 이 때 우리는 주님과 영적으로 연합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결혼순간)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십자가의 사건에 동참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 나도 죽은 것이고 그가 다시 사셨을 때 나도 다시 산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화하는 의식이 세례입니다. 침례교회에서는 물을 뿌리는 대신에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옵니다. 물속에 들어갈 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의 새 생명을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표시로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럼 나는 죽었다할 때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옛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죄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죄에 반응하는 옛 사람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옛 사람은 무엇인가? 1:26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타락한 본성을 가리켜 옛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옛 사람의 특징은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이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 옛사람이 실제로 죽지 않았는데 죽는 것으로 간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암행 순시차 나가셨다가 다리 밑에서 거지 소년을 보았는데 어쩐지 마음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거지 소년을 데리고 궁궐에 들어오셔서 만조백관 앞에 서서 오늘부터 이 소년을 내 아들로 삼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이제 분명한 왕자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 거지는 죽었고 왕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저녁에 주무실 시간이 되었는데 왕자가 막 대궐 바깥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어디 가냐고 묻자 그는 나는 본래 거지라서 다리 밑에서 자야 편하다고 대답하자 신하들이 아닙니다. 왕자님, 왕자님의 주무실 곳은 대궐 안에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이 왕자가 다시 대궐 밖으로 달려 나갑니다. 시녀들이 좇아가면서 왕자님 어디 가십니까?”라고 묻자 내가 본래 거지라서 내가 세수하는 곳이 다리 밑에 있다고 하자 시녀들이 아니에요 왕자님, 세수하실 곳이 대궐 안에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질문 드리겠습니다. 이 왕자가 왕자다운 행동이 나타나려면 거지 의식을 가져야 할까요? 아니면 왕자의식을 가져야 할까요? 나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라 거지는 죽었고 새롭게 왕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당분간은 거지같은 행동이 계속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워낙 오랫동안 거지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았음에도 죄인 같은 삶은 계속될지 모릅니다. 그래도 계속 확인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하셨다면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계속적으로 의식화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죄 지을 일이 생길 때, 막 성질이 나려고 할 때, “나는 죽었는데..”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죽은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초로 하여 끊임없이 그렇게 여겨야 할 의식화의 과정입니다.

 

3. 드리라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 옛 사람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너희 지체를 죄에 반응하며 살지 말고, 하나님께 반응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알라여기라는 단어가 지적 인식과 연관되어 있는 단어라면 드리라는 단어는 우리의 의지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알라, 여기라, 그 다음은 나는 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제는 죄에 더 이상 반응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반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애굽 바로 왕의 통치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 노예들은 악덕주인 시키는 것이 절대복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를 불쌍히 여긴 한 사람이 이 노예를 그 악덕주인으로부터 값을 지불하고 샀습니다. 그러면 이 노예는 더 이상 과거 악덕주인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거 죄가 우리의 악덕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의 명령을 따라 살았습니다. 염려하라면 염려하고, 화를 내라면 화를 내고, 불평하라면 불평하고, 판단하고 후욕하라면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에게 새 주인이 생겼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다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알라! 여기라! 드리라!

이거 교리적으로는 아는데 실제 삶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안 될까요? 크게 세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패배의식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죄와 싸워 늘 패전하는 이유는 패배의식 때문입니다. 해도 안 되더라 그러면서 패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코끼리 사육하는 것 보셨습니까? 이 당에 존재한 동물들 가운데 가장 힘이 세다고 하는 코끼리가 어떻게 어린 꼬마가 줄을 잡고 끄는 데로 갑니까? 코끼리를 조련할 때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쇠줄에 묶어두면 처음에는 그 줄을 끊고 갈려고 발버둥 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끊을 수 없어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나면 이제는 아주 약한 줄에 매놔도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과거 죄의 종으로 살 때 그 패배의식이 가득하여 이제 나는 더 이상 새롭게 될 수 없어, 나는 죄를 이길 힘이 없어, 우리 가정은 이제 끝났어. 우리 가정이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해...이거 우리 모습 아닙니까?

 

둘째는 하나는 죄의 노예근성 때문입니다. 이거 또한 무서운 것입니다.

오래전 TV에 국민 코미디 프로인 개그콘서트에 누려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과거에 가난하고 어렵게 살던 한 가족이 갖은 고생 끝에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된 뒤 생활하는 모습을 다룬 내용입니다. 시부모님과 며느리가 나오는데 이들은 현재 돈이 많아 원하는 것들을 누릴 수 있지만 그들의 과거 삶이 몸에 배여 있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과거의 행동을 하곤 한다. 예를 뷔페에 갔는데 검은 비닐봉지에 음식을 주어 담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모습에 놀라며 서로 현재의 호사를 누리라고 격려해 주며 큰 목소리로 누려를 외치는 그런 코너였습니다. 왜 입니까? 그 가난의 근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영향을 자꾸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는 것 아세요? 죄의 노예근성 때문에 이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음에도 그 영향을 계속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상처 받았다는 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상처를 받았으면 치료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상처가 치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처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 그 말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습니까? 지금까지 그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으니까...

 

쇼생크 탈출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또 하나 세 째는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여기 대항하여 라는 말은 이 죄악의 물결이 사정없이 물밀 듯 밀려오는데 믿는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기 위해하여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여 싸우는 모습을 설명하는 차원에서의 대항하다입니다. 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는 것을 말하는데 어떻게 싸워야 하느냐?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왜 우리가 우리 내 신분을 알고,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내 삶을 죄에 드리고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안 되느냐?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피 흘리기까지.....

 

여러분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이 싸우는 것 영화를 통해 보셨지요. 요즘 격투기 하듯이 심판이 있고, 3분 싸우고 1분 쉬고 그런 싸움이 아닙니다. 둘 중 하나가 죽을 때 까지 싸우는 겁니다. 피 흘리기 까지 싸우는 것 아닙니까?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죄에 대하여 싸우데 어느 정도의 각오로 싸워야 하느냐? 이 죄에 유혹에 넘어지면 나는 망한다. 나는 죽는다. 이것으로 내 영혼 끝장이다. 이런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금 애쓰다가 넘어지고서 하는 말 내 나름대로 애를 썼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안 되는 걸 어떡하나, 조금해보고 아이고 누구도 죄 짓는데 나라고 별수 있습니까? 이거 아닙니다.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싸우고 있습니까?

 

오늘 이 죄악의 물결이 우리 개인이나, 가정과 교회 안에 물밀 듯 밀려오데 마땅히 지켜야 할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기 까지 대항하며 싸우고 있습니까? 이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조금해보고 아이고 누구도 죄 짓는데 나라고 별수 있습니까? 이거 아닙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싸우고 있습니까?

 

여러분 가정에 도둑이 들어 자녀들을 해치려고 하는데 어떠하겠습니까? 도둑님 그냥 조용히 가 주실래요. 좋은 말로 말할 때 가주세요. 그리고 나는 할 만큼 했는데 안 가는 것을 어떡하겠나. 할 수 없지 그러

겠습니까? 아니잖아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겠습니까?

 

마찬 가지 아닙니까? 여러분을 통해 그 죄악의 물결이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가정에,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흘러가는데 어떠하시겠습니까? 해도 별 수 없네 하고 마시겠습니까?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지요.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지만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힘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여기 은혜 아래 있음이라 말이 뭘 의미합니까? 변화된 우리는 주님의 다스림과 통치아래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변화된 우리는 더 이상 악한 죄의 영향력 아래가 아니라 날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주님은 그것을 살아낼 수 있는 힘주시는 분이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모습을 은혜아래라고 말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렇게 너희들이 몸부림을 치면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애쓰고 내가 싸우는 것 같지지마는 실상은 그렇게 애쓰는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 확신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힘을 다하여 수고한 것 같지만 실상은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 이것을 맛보고 경험하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내가 나를 잘 아는데, 내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 것을 아는데, 내가 얼마나 유혹에 잘 넘어지는 자임을 잘 아는데,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면서부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강환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오늘도 이 유혹을 이겨내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황홀한 감격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