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6.11. 24.환난 중에 즐거워하나니
롬5:1-11
본질과 현상이란 말을 많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본질이 사물을 그 자체되도록 하는 고유한 성질을 말하는 것이라면, 현상은 바깥으로 나타나 보이는 상태를 가리켜 현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감기에 걸렸을 때, 감기 바이러스가 본질이라면, 열나고 기침 하고, 콧물이 나는 것은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상을 통하여 본질을 알 수 있고, 본질을 통하여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동전의 양면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문제는 이 둘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부모님을 사랑한다, 이게 본질이라면 현상이 무엇입니까? 부모님께 수시로 전화를 드려서 안부를 묻기도 하고, 찾아뵙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 드리기도 하고, 용돈을 드리기도 하는 것이 현상입니다. 그런데 나는 부모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전화도, 찾아뵙지도, 용돈도 드리지 않는다면 이 사랑은 가짜일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기자도 믿음이 있느냐? 그렇다면 그 증거가 뭐냐?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 본질하면서 그래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지 하기는 하는데 의식이 없다면 그 신앙은 가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질과 현상은 따로 때어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본질은 있는데 현상은 없다. 반대로 나는 현상은 있는데 본질이 없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새해에 들어와 복음의 보고인 로마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복음의 본질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타난 현상이 무엇인가?
롬5:1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 하나님의 은혜에 보좌에 들어가는 것, 기뻐하는 것이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또 하 나 살펴볼 것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겁니다.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여러분에게 심각하게 묻습니다. 여러분 환난을 즐거워합니까? 아니면 낙심, 절망, 불평 원망합니까? 그런데 환난을 즐거워한다. 이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어느 누가 환난을 즐거워합디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난이 떠나야 즐거운 것 아닙니까? 그런데 환난을 즐거워한다, 이게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환난이란 단어의 원어는 ‘들마세신’으로 억압, 압제인데 원래 이 단어는 포도즙을 짜기 위한 틀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단어라는 겁니다. 여러분 포도즙을 짜는 틀 안에 포도를 넣고 돌리면 포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무게감이 느껴지죠? 본문이 말한 환난이 이러한 정도의 무거운 환난이라는 말입니다.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여기 “우겨쌈을 당하여도”가 환난과 같은 단어입니다. 또 “즐거워하나니” 헬) '카우코메다' 는 '기뻐 날뛰다', '의기양양해 하다', 또는 '자랑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할 때 환난은 내가 잘 못해서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당하는 고통,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얻어지는 고통을 말합니다. 신앙을 양보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고통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까? 여러분 지금 시대는 정직하게 사업하면 망하는 나라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정직하게 산다면 그 고통에 빠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늘 내가 예수 믿는 다는 의미는 그동안 이 악한 세상에 동화되어 살다가 이제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지고 지금까지 내게 우호적이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등 돌림을 당하는 것 왕따를 당하는 것 이게 신앙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사람은 이러한 환난 가운데 어떻게 반응하느냐? 환난을 즐거워합니다. 환난을 자랑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며 사십니까?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느냐?’ 를 보면 그가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 말은 환난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란을 좋아하고 자랑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환난을 가져다주는 열매를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졌기 때문에 환난을 즐거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유학을 가게 되면 좋아하고 자랑합니다. 장교 시험에 합격하면 좋아하고 자랑합니다. 국가대표선수가 되면 기뻐하고 자랑합니다. 이 길은 한 결 같이 힘들고 고생스런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은 그로 인하여 얻게 될 결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란과 시험을 당연히 힘든 것이지만 자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인격으로 성숙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 입니다.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내가 지금 그 주님을 닮아가도록 주께서 역사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이러한 환난을 허락하시는가?
그것이 3절과 4절의 말씀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1. 환난은 인내를...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란? 심한 압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오래 견딜 수 있는 힘, 이것이 인내입니다. 다시 말해 흔들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시간이 가니까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인내란 흔들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방향을 바꾸지 않는 성품을 인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환난을 즐거워 할 수 있습니까? 환난을 통해 하나님을 견고하게 붙들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인내라는 아름다운 덕목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이 땅의 자녀를 두고 있는 모든 부모님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심한 압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오래 견딜 수 있는 힘을 다 소유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환난을 통하여 가능하답니다.
그래서 우리 큰 애를 군대 보낸 것 아닙니까? 여러분 제가 우리 큰 아들이 싫어서, 미워서 그래서 니 군에 가서 죽을 고생 좀 해봐라 그래서 군에 보냈겠습니까? 아니에요.
그렇다면 하나님도 마찬 가지 아닙니까? 왜 환난을 허락하셨다고요? 인내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아닙니까? 그래서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면 기쁘게 여기라 고 한 것입니다.
약 1:2-3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
우리나라 사람 인내하지 못합니다. 서양의 엄마가 아이에게 질문 5-3 = ? 43초 기다리는데 반해 우리나라 엄마는 3초 밖에 못 기다린다고 합니다. 남편을 기다려 주지 못해요, 아내를 기다려 주지 못해요, 자녀를 기다려주지 못해요. 여러분 변하지 않는 상대방을 보고 속상해 할 것이 아니라 그만한 것도 포용하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속상해 해야 합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오직 성령의 열매는 하고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뭐냐? 우리가 사랑장으로 알고 있는 고전13장을 보면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 시작해서,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인내하는 것 아닙니까? 사랑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가 뭐냐?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십니까?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기다려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기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그런데 이 인내는 환난을 통해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제발 저에게 인내를 주시옵소서. 인내하게 하옵소서” 기도했다고 당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이란 과정이 필요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즉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만들어져 간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우리는 바울사도처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인내는 연단을....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5:4 인내는 연단을
여기서 ‘연단’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경에는 “연단‘으로 번역했는데 썩 잘된 번역은 아닙니다. 영어 성경에 보시면 연단이라는 단어가 Character(인격, 개성)이라는 단어로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표준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 연단을 “연단된 인격, 단련된 인격”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냥 인격이 아니라 시험에 합격되어 통과된 인격이라는 뜻입니다. 검증된 인격을 말하는 것이죠. 인정된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1세기 로마시대 은행제도가 있었답니다. 금속을 녹여 동전을 만드는데 재련 기술력이 약해 동전을 만들어도 단단하지 않아 많은 시람 들이 동전 끝을 조금씩 때어 그것을 모아 동전을 만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가리켜 “도키모스”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바로 오늘 성경에 연단에 사용된 단어 “도키모스”입니다. 검증된 인격, 인정된 인격이라는 말입니다.
왜 환난을 즐거워 한다구요? 환난은 우리에게 인내력을 만들어 주고요, 인내는 우리에게 연단된 인격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시키시는 최종목적이 무엇인가?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 ->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 -> 연단된 성품
여기서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만들어 낸다면 나에게는 연단된 인격이 있는가? 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뭡니까? 연단된 인격이 없는 것 아닙니까? 말은 청산유수 같이 잘하는데 연단된 인격을 찾아 볼 수 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정에 엉망이 되고, 직장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교회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고, 쪼개지는 것 아닙니까?
부부간에 니 탓이다 내 탓이다. 야단인데 내가 보면 둘 다 탓이에요.
그런데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만들더라는 것입니다. 욥을 보세요. 욥이 어 힘든 환난을 통하여 그가 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자기를 티끌과 같은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문제의 출발이 뭔 줄 아십니까? 자기는 대단한 존재이고 상대방을 티끌로 보는 것이 문제 아닙니까? 그렇다면 문 제 해결의 출발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티끌로 보는 눈을 돌려 내가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에게 여보, 티끌과 같은 나를 버리지 않고 살아줘서 고마워요.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에게 여보, 티끌과 같은 나를 거둬줘서 감사해요.
이런 인격이 어떻게 가능하다고요,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그래서 환난 중에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의 마지막 종착지가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환난을 즐거워한다고 하는데 그 소망이 무엇입니까?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 의 십자가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그런데 문제는 혹시 그 소망이 부도수표면 어떡하느냐는 겁니다. 위의 찬양 가사처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의 십자가지고 좁은 문, 좁은 길을 걸었는데 그래서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 이 소망을 품고 살았는데 그런데 그 주님이 안 나타나면 어떠합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 소망의 근거가 뭐냐? 롬5:5말씀인데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수시로 흔들리는 인간의 약속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둔 소망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알기만 하지 실제로는 안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히려 자기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뭔 줄 아세요? 돈입니다.
돈이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 같고, 반대로 돈이 없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돈이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고, 가난하면 하나님이 버린 사람입니다. 복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잘되면 하나님의 사랑이고 잘못되면 하나님의 저주라고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평가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좋다면서 여전히 돈에 목을 매고 살며 성공 성공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성장으로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초대교회 일곱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는 가장 크고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반면에 서머나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교회였고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달랐습니다.
계 2:9 (서머나교회)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계 3:8 (빌라델비아교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목회자나 교인이나 교회 크기나 예배당이나 교세에 연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든지 복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믿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자가 아니어도 실패했어도 환란을 당해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미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입니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의 사랑 이 사랑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만약 십자가를 바라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분들이 있다면 성령님의 역사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롬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여기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것을 시제로 보면 현제 완료형입니다. 현제 완료형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일어난 그 행위가 지금까지 계속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 때 사용하는 시제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기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는 말은 과거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그 시점에 한번 왕창 부어주시고 끝낸 것이 아니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계속적으로 부어주시는 사랑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먼저 여러분이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반드시 먼저 깨달아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롬5: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였다’ 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십자가를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 눈이 뜨이면 비로소 십자가의 영광,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죄인이었을 때도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 구원받은 지금은 얼마나 더 사랑하실까,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롬5: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더 확실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이 믿음이 엄청난 복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을 바꿉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에게 무슨 좌절과 낙심과 수치심이 있겠습니까?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교리로만 알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셔도 우리가 바로 믿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환난은 어쩌다 보니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환난은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왜 허락하셨습니까?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은,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자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즐거워 할 수 있는 자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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