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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권별설교/로마서

20.구원받는 참 믿음이란?(롬4:17-25)

by 오용주목사 2017. 5. 14.

2017.5.7.                                                     20.구원받는 참 믿음이란?

4:17-25

 

우리는 지난주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그의 행위나, 할례나,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지만 그 구원의 놀라운 감격이 없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거의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믿는데 감격이 없다. 믿는데 기쁨이 없다면 분명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무엇을 믿는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보면서 구원받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현대어성경)아브라함은 그런 약속이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아브라함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었으므로

(표준새번역)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무슨 말입니까? 도저히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의 배경이 된 창12장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말씀하죠?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나이가 75이지만 아직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을 믿고 정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75세에 약속을 받은 지 자그마치 2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아브라함은 이제 100세 할아버지가 되었고, 아내 사라는 90세가 되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아내 사라는 이미 생리가 끊어져 아이를 낳은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은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쉬운성경) 4:19 아브라함은 백 살이나 되어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사라도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단순히 지식적으로 동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한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단순한 진리를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살아 계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그것을 채우시는 분이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모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습니까? 이 모든 질문에 아멘 아멘한다 해도,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진리를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진리에 단순히 지식적으로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오늘 본문이 말함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열매만 보아도 금방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는 다고 하면서 막상 그들이 필요에 처하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이나 세상적인 수단이나 인간적인 방법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도 그 필요가 채워지지 않을 때, 그들은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자세입니다.

 

쉬운 예로 삼상17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이 하게 되었는데 블레셋 장수가 누군가하면 바로 골리앗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삼상17:4~7절에 보면 골리앗에 대해서 상세히 가록했는데,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 283cm,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 57.5kg, 창 날은 철 육백 세겔 : 7kg

이런 골리앗 앞에서 사울과 이스라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삼상17: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그 블레셋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몹시 놀라서 떨기만 하였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까? 하면 그들이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믿는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정말 믿었다면 다윗처럼 행동해야만 했습니다.

다윗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삼상17:45 그러자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에게 말하였다.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이 믿음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상황이 모든 상황이 불 가능해 보이는 아브라함이나, 골리앗 앞에 선 다윗과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 때 우리가 취할 길은 두 갈래길 아닙니까? 하나님이고 뭐고 없다. 믿을 수 없다. 응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제 나는 누구도 믿지 않겠다하면서 그 길로 가는 한 길이 있고 아브라함처럼 끝가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이 있는데 하나님은 후자를 의롭게 여기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단순히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도 구원 받기 위한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야 합니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은 대상은 하나님, 예수님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천국 간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나요, 예수님을 보았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옆에서 그 현상을 목격한 것도 아닙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 그렇게 단순한 것 아닙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믿는 것은 인간 편에서 보면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합하면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보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바랄 수 가 있느냐? 그것이 있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 대답은 간단합니다. 네가 믿는 것 보니까 그렇다는 겁니다.

 

24절을 보세요. 4:24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도 믿어야 되는데 무엇을 믿어야 되느냐?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야하죠?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도 믿어야 되죠?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도 믿어야 되죠? 또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분이 하나님을 믿어야하죠? 이 모든 것을 믿어야 하는데 우리가 무슨 제주로 믿습니까?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보세요. 예수님이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긍정할 수 있지만 그 죽음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무슨 제주로 믿습니까? 예수님이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긍정할 수는 있지만 그로 말미암아 내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무슨 제주로 믿습니까?

더욱이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저주의 대상들인데 그런데 아무런 공로 없이 오직 예수를 믿는다는 이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이 모든 것이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 아닙니까? 이 믿음이 구원 받는 믿음입니다.

 

2. 그러면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특별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특별하게 알았다는 것은 우리가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을 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성경공부를 통해서 아는 앎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들어서 아는 앎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통하여 아는 앎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알다야다로 신약에서는 기노스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부부가 서로 아는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아는 앎은 무엇인가?

4:17 아브라함은 그가 믿은 하나님, 곧 죽은 사람도 살리시며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허산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를 대신하여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야다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성경 창세기 1장을 보면 우리 성경에는 두루 뭉실 하나님으로 나와 있는데 원어를 보면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광대 하셔서 그때그때 그분의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따라 호칭을 부르는데 창세기 1장에서는 엘로힘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엘로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이름인데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무에서 유를 만들고,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고, 어둠에서 빛을 만드신 그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하기위하여 엘로힘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해서 그 이름을 썼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보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있는데 하나님이 이르시되 ~~~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 그대로 되니라7번이나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어떻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이 이르시되 ~~~ 그대로 되니라말씀처럼 하나님 말씀하시고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겠다고 말씀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실 줄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확신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에 반응할 때 작동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확신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강한 신념이나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여깁니다. 잘 될 것이라고 믿고, 기도 응답을 하실 것을 믿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하여도 무조건 믿으세요!’ ‘구원 받았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확신이 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마음의 상태를 믿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는 약속도 하지 않으셨는데 하나님! 저에게 아이를 주실 줄 믿습니다. 믿습니다.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 법칙은 동일합니다. (모세, 여호수아도)

여기서 중요한 법칙 :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 책임을 지신다는 사실입니다. (물위로 걷은 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은 이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였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 15장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5: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15: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창세기 15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과 약속을 믿었다는 사실은 알 수가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그 설명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가 있냐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모든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복을 받습니까? 이것은 구체적으로 아브라함 그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을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자손들이 어떻게 인류에게 축복이 될까요?

갈라디아서 3장을 계속 읽어보시면 16절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이 무조건 많은 자손을 둘 것이다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자손 가운데서 한 중요한 자손이 올 것인데 그 자손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가운데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자신의 선행과 자신의 결심만 가지고서는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는 무력한 인류, 죄 속에 빠져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가운데서 그리스도, 메시야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내용을 우리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네 후손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자를 보내신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의 최선, 우리의 행함, 우리의 의가 아직도 우리를 구원하기에 무력하고 부족했던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메시야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함과 죄사함이 가능할 것이라는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5, 그러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은 단순히 의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상황, 형편, 처지를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이론이나, 논리, 경험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24시간 하나님만 신뢰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받는 믿음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 행위, 내 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열심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열심히 했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는 믿음은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며 이 믿음이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히1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은 계속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내 믿음이 진짜 인지 가짜인지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환경이 좋을 때는 주님을 바라보는데 반대로 내 환경이 어려워지면 환경을 바라본다면 그 믿음은 가짜일 수 있습니다. 참 믿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찬양 할지라 주는 너의 큰 상급 큰 도움이시라

 

집에 가면 폭군 남편이, 빗나간 자녀가 있고, 학교나 직장에는 꼴 보기 싫은 상관들이 있고 도무지 변화시킬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절벽 같은 상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까?” 라고 탄식하는 분들을 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처지나 형편일지라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것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뱀에 물려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으로 약을 주시지 않고 놋뱀을 만들어놓고 그 뱀을 쳐다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다 나았습니다. 이것이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지만 또한 삶의 영역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하여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구원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하여 주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주님은 우리가 완전한 복음을 누리게 해 주실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주님을 바라보아도 안 되던데요, 여전히 미움, 시기, 질투, 이런 것이 들에 다시 무너진 후 낙심한 교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이 다시 죄에 무너진 것은 아직 죄에 무너지지 않을 만큼 주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있기에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도 강하게 반응하게 된 것입니다. 때론 목사에게 자신의 실패를 고백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있는 일입니까? 주님의 역사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있기에 그만큼 주님의 근심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했을 때, 다시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근심조차 주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임을 깨닫고 계속하여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난 강해야 돼" 하는 생각으로 치열하게 살았다고 했습니다. 공부도 운동도 남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늘 사람들을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날 나는 너를 강하게 해주지 않겠다하셨답니다. ”내가 너의 강함이 되어 줄 것이다그 말씀에 울면서 스스로 강해지려는 강박관념에서 놓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강하신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그 하나님이 나의 강함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까? 강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때 강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강함이 되시는 것입니다.

 

고전1:30절 말씀은 십자가 복음을 한 문장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여러분! 어떻게 예수님이 나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될 수 있습니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 나의 지혜가 되어 주십시오. 나의 의로움이 되어주십시오. 나의 거룩함이 구원함이 되어 주십시오. 늘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믿음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말씀이 롬4:20,21절에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 약해 질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흔들릴 때도 있었습니다. 의심할 때도 있었습니다. 누구라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의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 롬4:19에서는 아브라함은 백 살이나 되어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사라도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25년 동안 연단을 통해 확신의 자리로 자라났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내가 받은 구원이 참 구원 받은 믿음이라면 그 증거가 뭐냐? 자라는 것입니다. 약함에서, 흔들림에서 의심에서 확신의 자리까지 연단을 통해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진짜라면 확신의 자리까지 자라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 처음 믿을 때나 죽을 때 나 똑 같다면 그 믿음은 가짜 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확신의 자리까지 자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러면 끝으로 아브라함이 이렇게 의심도 흔들림도 있었지만 어떻게 그 아름다움 믿음의 자리까지 이를 수 있었는가?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그가 약해지고 흔들리고 의심이 들 때마다 누가 찾아온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흔들리고 의심이 들 때마다 하나님이 꼭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시는 것을 봅니다.

 

따라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확고한 믿음의 자리까지 가는데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따라오지 아니하면 불가능합니다.

20절 보세요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여기 견고하여져서는 능동형이 아니고 수동형입니다. 내가 견고한 것이 아니고 견고해 지도록 도움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여기는 능동형으로 표현 되었습니다 마는 원문에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수동형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의 견고해 지고 확신을 갖는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항상 뒤에 따라다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믿음을 내가 키울 수가 없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한다고 믿음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입으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계속 의심이 오고 흔들립니다. 그래서 내가 내 믿음을 자라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도우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능히 이루실 줄 확신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사십니까? 매일 매순간 주님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찬양 19/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