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26. 09.내버려 두사, 바꾸었느니라
롬1:24~32
성경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딤후2:5에서 경기하는 선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씀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법대로 즉 하나님의 다림줄, 기준에 맞게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이것을 구약 암7:7-9에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암7:7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잡고 서셨더니 8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9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모든 것이 다 헛것입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아버지의 기준에 맞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예: 구원의 문제)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보세요.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23절 하반절에 “불법을 행하는 자” 불법을 행하였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법에, 기준에 어긋났다는 겁니다.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것을 그 다음절에서 건축자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하는 신앙생활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자로 하나님의 기준대로 행치 않는 자를 모래위에 짖는 어리석은 자로 비유하면서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 모든 수고가 헛된 것임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신앙의 기준은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삶은 인간의 창조에도 명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산의 모든 실과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그들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을 타락하게 하셨는고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셨더라면 인간이 타락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서 에덴동산의 모든 실과를 다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서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그들에게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아세요? 하나님 중심적 삶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생명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나타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실제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인도, 보호, 기도응답, 치유,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는 것...
그런데 오늘 우리의 문제는 뭡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흐르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바로 타락이 원인입니다. 그러면 타락이 뭐냐? 타락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하나님 중심적 삶을 살아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중심적 삶을 사는 것을 가리켜 타락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인데 주인 되신 하나님을 몰아내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되어서 사는 삶 을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마음의 태도가 타락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타락을 어떻게 로마서에서 표현하고 있습니까?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마음에서부터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몸이 떠나지 않았으니 떠나지 않았다 생각하시는 분들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을 떠날 때 나타나는 특징이 뭐냐? 오늘은 여기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내버려 두사, 바꾸었느니라
오늘 같이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 자들의 특징이 3번 반복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내 버려두사” “바꾸었느니라” 세 번 반복됩니다.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 사 : 성적인 타락 차원에서의 정욕, 또는 금지된 것을 탐하는 마음의 태도
욕되게 하다 : 총신대 이한수 교수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마음이 없이 탐욕의 대상으로만 다루는 행위”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이용해 먹으려고, 성적인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행위
롬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부끄러운 욕심 : 애정이 동반되지 않은 강한 성욕
순리를 역리로 – 동성애
롬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 사 : 분별력을 잃게 하셔서 부적절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의 바꾸었느니라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롬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가장 무서운 심판이 뭔줄 아세요? 내 버려두는 것입니다. 니 마음대로 해 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주 중에 저주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내 버려둔 대표적인 인물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입니다.
출9,10,11장에 보면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는데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주일을 범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아니 오히려 일이 더 잘 풀려요. 이게 예수를 믿는 것이진, 안 믿는 것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세상과 타협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 이거 아세요? 이게 대박이 아니고 쪽박이라는 것을 이게 바로 하나님의 저주 중에 저주라는 것 아세요?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예레미야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상태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렘4: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무슨 말입니까?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변질된 인간의 상태를 묘사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변질된 인간의 상태를 묘사한 22절 바로 다음 23절을 주의해서 보세요.
4: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보세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상태가 어떤지?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여기서, 혼돈이라는 말은 원어를 보면 “토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무슨 뜻인가 하면? 전혀 형태가 없으며 정리되지 못한 황량한 상태를 말합니다. 형태가 없어요. 따라서 질서가 없는 겁니다.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정돈되지 않은 황량한 상태를 말합니다. 혼돈은 그곳에 집 짓고 사는 주인이 없는 상태 비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공허하다는 말(보후)도 역시 아무것도 채워지지 아니한 빈 광야와 같은 적막한 상태 무가치한 상태를 말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는 말은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캄캄한 어두움이 깊이 덮여져 그 깊이를 잴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혼돈과 공허와 흑암 이게 우리 모습 아닙니까?
오늘 우리의 인생길을 한 마디로 설명하라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인생길 아닙니까?
그 증거가 뭐냐?
1) 하나님의 실재의 임재가 그쳐있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함을 말씀함.
출33:1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출33: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My Presence will go with you,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함을 의미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 ->하나님의 임재인데
출33: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예수님 승천하시면서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함께 ->하나님의 임재
우리는 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는 성도의 특권이며 하나님의 은혜인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의 임재, 함께 하심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아요.
2) 삶이 변하지 않음(죄가 가득, 딤후3:1-5, 롬1:28-32)
3) 상처와 억압이 가득(사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4) 태의 문이 닫힘(마23;1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5) 세상에서 영향력이 없음(소금 -> 눅14)
전반부 -> 하나님 중심적인 삶, 통치권 가운데 살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 -> 이때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가 무엇이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 오늘 여러분의 삶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하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 법칙대로 순종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그럼 어떡해야 하겠습니까? 조금 전 렘4장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이 혼돈과 공허, 흑암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닙니까? 바로 창세기1장 천지창조 때 나온 말씀이죠?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 때 성령님이 운행하시기 이전의 세상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한 마디로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운행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 “운행하다” 히) 라하프는 “암탉이 알을 품다”의 뜻으로 어미 새가 새 생명의 탄생을 열망하며 알을 소중히 감싸 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 받을 인간의 삶의 장소를 조성하시기 위해 깊은 관심으로 포근하고 소중하게 돌보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3절 이하, 성령님이 운행하기 시작하니 틀이 만들어지고 질서가 생기고 공허한 곳에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수많은 동식물들이 채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령의 운행하심 아닌가요? 2절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같은 삶에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운행하심입니다. 정말 지금 우리의 상황이 혼란스럽고, 공허하고, 길이보이지 않는 상황,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요, 성령께서 운행하셔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됩니다. 죄인이 어떻게 밝은 아침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성령이 운행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죄인인 것을 보게 되고 십자가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 삶에 운행하셔야 내 모습이 보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멀리 떠나있는가를 자각하게 됩니다. 내 삶에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예) 이사야, 바울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운행하셔야 돌이키게 됩니다. 바로와 다윗의 공통점은 다같이 잘 못한 것이 공통점 아닙니까? 그런데 차이점이 뭡니까? 바로는 돌이키지 않았고 다윗은 돌이킨 것입니다. 그럼 바로는 왜 돌이키지 못하고 다윗은 돌이킬 수 있었습니까? 바로는 하나님께서 상실한 대로 내버려 두신 것에 반해 다윗은 성령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의 마음을 만져주세요.
목마른 나의 영혼 주를 부르니 나의 맘 만져주소서
주님만을 원합니다. 더 원합니다. 나의 맘 만져 주소서
더 나아가 우리의 악한 삶이 선한 삶으로 바뀌어 집니다. 전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여기 열정은 ‘에피뒤미아’로 사용되는데 이 열정이 악하게도 사용되는데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여기 정욕이 ‘에피뒤미아’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니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 받기 이전에는 악한 열정 악한 ‘에피뒤미아’가 그를 장악했다면 변화 받고 난 이후의 바울은 그 열정이 선한 것을 바뀌어져 형제를 위하고 세우는 것으로 시용되더라는 것입니다.
고후4:6절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다메섹 도상에 당시 어둠이었던 바울 포악하고 잔인하고 울분이 많고 분노가 많고 누구를 향해 죽이고자 하는 저주가 가득했던 그에게 빛 되신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주셨기 때문에 바울의 삶이 이렇게 변화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급하고 악한 열정이 성령님이 여러분 가운데 운행하실 때 선한 열정으로 변화되고 선한 하나님의 일에 쓰여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복음을 자랑스러워한다.
여러분 바울이 고후4:6절에서 빛 되신 주님을 이렇게 선포하고 그 다음 7절서부터 어떻게 말씀을 이어갑니까? 보십시오.
롬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4: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러분 바울은 어떻게 그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낙심하지 않습니까? 왜 바울은 그 답답한 일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경험한 것이 있거든요, 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이 상황이, 이 낙심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주님을 만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이 말씀처럼 우리의 예배 가운데, 말씀 가운데 성령님이 운행하셔서 우리 마음에 비추시면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문 시작을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무슨 말입니까? 이후 모든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첫 단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심의 인정하는 것, 선언 하는 것 이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입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순복하라는 겁니다. 그리하면 공급하겠다. 주권 앞에 들어오라는 겁니다. 기꺼이 주권 앞에 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는 삶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말씀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려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 하셔서 운행하실 것입니다. 혹,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운행 해 주실까? 운행해 주십니다. 그 근거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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