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5. 06.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
롬1:16-17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구원)입니다. 복음은 복음인데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 복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아니 교회에 가면 복음, 복음 하는데 도대체 복음이 뭔가? 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면 정답입니다. 복음이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 인데 이 말의 뜻은 기쁜소식 인데, 복음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이 사실을 깨달아 알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면서 1장 16절에서 나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영, 육간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이 굳이 “모든” 이라고 말을 한 것은 큰 의미를 담고 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구원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으로 꽉차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꿈도 꾸지 못한 것이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이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구원 받을 길이 열린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악한 자나 선한 자, 가진 자 못가진자, 남녀노소 구별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이야 모든 하면 별 충격이 없지만 구원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여겼던 그 당시에로는 상상도 안 되는 일입니다.
자 그런데 보세요.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복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복음이 어떻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가? 그 답이 17절에 나와 있는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은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장 17절은 로마서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핵심구절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다 외우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이후의 모든 말씀을 이해하는데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롬1:16-17절을 요약하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 복음이 능력이 될 수 있는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먼저 17절을 보세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의”가 도대체 뭐냐는 거예요. 여기에는 수많은 다른 해석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크게 두 줄기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를 공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으로 해석하는 해석이 있구요.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의로운 행위로 해석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 신앙의 색깔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겁니다.
먼저 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를 공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으로 해석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가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를 요구하시는데 우리가 그 의를 구현해 내지 못하면 무서운 심판이 뒤따른다는 개념이 이 말씀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뭔가 하면, 자기의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중세가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어떡하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지 않고 구원에 다다르려고 죽도록 몸부림치고 애쓰는 것 이게 중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루터가 자기자력으로 의에 이르기 위해 한 것이 무엇인 줄 아세요? 바로 고행이었습니다. 하루에 7번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하고, 베드로 성당의 그 높은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는 고행을 했던 사람이 루터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고행을 행하면 행할수록 느끼는 것은 절망입니다. 낙심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아시죠? 종교적 열심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내 문제 해결을 받는 줄 알고 자기의 육체의 행위를 의지하는 성도들이 우리 주위에 의외로 많다는 겁니다. 이런 신앙의 가치관을 가리켜 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구약 이사야를 시대나, 신약 예수님시대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바로 이른 모습이었습니다.
율법주의는 한 마디로 말해서 육신을, 즉 종교적 행함을 의지하여 의에 이르려는 가치관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행함으로 말미암은 의를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의 종교적 행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집니다. 대단한 영적 우월감이 있습니다. 반대로 내 놓을 것이 없으면 영적열등감에서 빠져서 나오지를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 열심히 해서 하나님 앞에 내 놓을 것이 있으면 구원 받은 것 같고 반대로 내 놓을 것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 것 같아 늘 불안해하며 초초해 합니다. 여러분 종교적 행위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구현해 내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의로운 행위로 해석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해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시는데 우리 인간이 절대로 자력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현해 낼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대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는 이 하나님의 대안이 본문에서 말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는 해석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세요?
보세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우리 스스로 자력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일이 뭐예요. 에이, 그냥 지옥에나 가 버려라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대안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조금만 잘 못해도 하나님께서 벌하실 거야 불안해하며, 조그마한 죄만 지어도 죄책감에 찌들어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왜 이런 줄 아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몰라서 아닌가요? 이런 사람들은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깨달아야 할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인간이 그렇게 애쓰고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구현할 능력이 내게는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안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도록 대안을 주신 것, 이게 복음이라는 겁니다. 아멘?
그래서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복음을 알아야 죄에서 자유를, 이 복음의 진리를 알아야 죄책감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복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여러분들의 삶속에서 작동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알고 그가 고백한 것이 무엇입니까?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를 짓지 않아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에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롬1:16-17절을 요약하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 복음이 능력이 될 수 있는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셔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셔서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런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 삶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이 하나있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에 대한 우리의 반응, 이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한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여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 구절도 여러 해석이 있는데 어떤 해석은 구약에서 신약까지로 해석, 불완전한 믿음으로부터 완전한 믿음에 이르는 신앙적 장성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지만(칼빈), 여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또는 오직 믿음으로 해석해야 옳은 해석입니다.
그래서 쉬운 성경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뭐냐? 열심이 믿음이 아닙니다. 마음의 확신이 믿음이 아닙니다. 환경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럼 믿음이란? 여기 “믿음”은 헬라어로 ‘피스티스라’는 단어로 신실함 이런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김도현 교수, 믿음이란? 한번 약속하신 것은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에서 오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이 되고 그렇게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하여 우리 인간이 실실하게 반응하는 태도 이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쉽게 요약하면 믿음이란?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수락하는 마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한번 약속하시면 변치 않으시는 당신의 신실하심으로 아브라함에게 다가 가셨고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거절하지 않고 그 호의를 신실하게 수용했기 때문에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행위가 의가 아니고요 여호와를 향한 믿음, 이 신실한 반응이 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신실한 반응에 이렇게 큰 의미를 두는가?
믿음이란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수락하는 마음의 태도라고 말씀을 드렸죠? 이게 왜 주중요한가? 제가 오늘 이 설교를 일주일 동안 열심히 준비했는데 어떤 사람은 저의 호의를 잘 안 받는 사람이 계세요. 그러나 반대로 저의 호의를 잘 받는 분이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이 왜 인간의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함의 결정체인 십자가에 대하여 우리가 신실하게 반응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 하나님의 신실함의 결정체인 십자가에 신실하게 반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복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정체인 십자가에 신실하게 반응하기를 바랍니다. 그 십자가 복음 앞에서 감사 하고 감격하고 이 십자가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자로 반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길 바랍니다.
3. 롬1:16-17절을 요약하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복음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 복음이 능력이 될 수 있는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의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인된 우리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럼 의인이 누구인가? 여기 의인은 헬라어 ‘디카이오스’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가 의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인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산다고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의인은 이 세상의 힘으로, 이 세상의 실력이나, 스펙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의인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아멘?
그렇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구약 하박국 2:4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도 바울이 구약의 합2:4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합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러분 하박국 배경 아시죠?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상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의지하고 섬기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당시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했던 바벨론에 망해버립니다. 지금 하박국이 이런 비참은 사실을 예언하면서 덧붙이는 말이 뭐냐? 그런 비참함 속에서도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 암에 산다 이게 하박국 2:4절입니다.
여기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할 때 믿음을 히브리어로 ‘에무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뜻은 성실함, 신실함, 버티다, 견고하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오직 의인은 그의 성실함, 신실함, 버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의인은 그의 버팀으로 말이 암아 살리라 했는데 그러면 의인은 무엇을 믿고 버티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비록 더디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버티는 것, 이것이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박국이 말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이 이해되죠?
지금 유다백성이 하나님께 범죄 하여 바벨론이란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지만 비참한 포로의 삶을 살지만 이게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환경적으로 보면 회복은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70년이란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다시 유다 백성을 회복시키시겠다는 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고 오늘은 버티고 견디는 삶, 이 삶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이 삶이 우리가 살아야 될 삶입니다. 때로는 약속을 이루어 질 것 같은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내 방법으로 하고 싶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말을 하고 싶지마는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참고 버티는 겁니다. 그때 신실하신 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지 않습니까? 부모를 위해, 남편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어떤 때는 기도를 중단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버티는 겁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직분을 맡아 섬기면 힘듦니다. 예배만 드리고 멀찌감치 서 있으면 상처 받지 않기 때문에 직분을 맡기보다는 구경꾼처럼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을 맡고 끝까지 신실하게 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력을 그의 교회에 하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란들을 통해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 집사님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집사님의 영정 옆에 뭐가 놓여져 있었느냐? 교회 주차봉, 이런 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도 마찬 가지입니다.
때론 배우자의 폭력, 배우자의 외도,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실함을 지키는 에무나의 모습 보일 때 비로소 그 가정에 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강연정 자매)
기도사역을 하다보면 억울하게 왜 나만 그래야 합니까? 라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래야 하냐구요? 하나님도 신실하지 못한 우리를 신실함으로, 진실함으로 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 암에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6-17절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복음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 복음이 능력이 될 수 있는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의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인된 우리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여러분 앞으로 닥쳐올 로마교회의 형편이 어떤 형편인가 아시죠? 네로 황제에 의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화난과 핍박과 고난과 죽임을 당해야 하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 지하 무덤인 카타콤에 1년도 아닌 10년도 아닌 무려 300년을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힘을 모아 대항하라 그래야만 산다가 아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 복음의 능력을 친히 몸으로 바울이 경험했기 때문에
예) 어떤 아빠의 유언 – 아빠가 가봤어, 우리도 우리자녀들에게 아빠가 가 봤어 라고 애기 할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삶에 있어서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성경권별설교 >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08.언약궤도 우상으로 전락될 수 있다(롬1:18-23) (0) | 2017.02.19 |
---|---|
07.하나님의 진노의 심각성(롬1:18-23) (0) | 2017.02.12 |
05.다시 복음을 들어야할 이유(롬1:8-17) (0) | 2017.01.29 |
04.사도로 부르심과 택정함(롬1:1-7) (0) | 2017.01.22 |
03.예수 그리스도의 종(롬1:1-2) (0) | 2017.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