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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권별설교/로마서

16.율법주의와 십자가 복음(롬2:17-29 )

by 오용주목사 2017. 4. 16.

2017.4.16.                                                        16.율법주의와 십자가 복음

2:17-29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누가 진정한 유대인이냐는 중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본문 28, 29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표면적 유대인, 겉으로 나타난 것이 내가 유대인 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9절 오직 이면적 유대인, 내면적으로 유대인이 되어야 진정한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내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뭡니까? 겉으로 나타난 종교적 행위를 그리스도인 됨의 증거로 여기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종교생활이 예수 믿는 증거이고, 이것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율법주의 신앙이라 말합니다.

 

반대로 내면적 그리스도인이 무엇인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거듭난 자가 내면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그럼 율법주의, 율법주의 하는데 율법주의란 도대체 뭐냐? 율법주의를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의 종교적 행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말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심판받는다는 가치관입니다.

 

여러분 이 가치관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검진을 받듯이 영적 상태를 검진 받는다면 우리의 신앙상태에 대한 진단 중 가장 안 좋은 결과가 바로 율법주의에 빠졌다는 진단을 받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열심 있는 좋은 신앙같이 보지이만 실제로는 율법주의 신앙은 모조품입니다. 위조지폐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주의 신앙에는 어떠한 생명도 없습니다. 여기 생명도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실제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 지키심, 보호하심, 길을 인도하심, 말씀하심, 하나님의 의중을 뜻을 알리시고,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생명이라 하는데, 이 하나님의 생명이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없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가짜 신앙이요, 죽은 신앙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복음은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고, 그 후 성령께서 임하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와 십자가 복음은 비슷해 보입니다만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큽니다.

그래서 오늘은 표면적 그리스도인의 율법주의를 먼저 살펴보고 내면적 그리스도인인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율법주의는 가치관입니다.

율법주의는 우리가 하는 어떤 행동에 있지 않습니다. 그 행동을 하는 배후에 있는 가치관, 생각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똑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참다운 신앙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타락한 율법주의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예들 들어 여기 똑 같이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금식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게 무엇을 가르치기를 원하는지, 내가 어떻게 반응하기를 원하는지를 알기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사람은 하나님 내가 금식하며 기도하였으니 그 공로를 봐서 이 문제를 꼭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자기가 한 금식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후자의 가치관이 바로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가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한주간도 보호해 주실 거야, 십일조를 드렸으니 물질의 복을 주실 거야, 오늘도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니 자녀들을 보호해 주실 거야, 이런 의식의 배우에 도사리고 있는 가치관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예배를 드렸으니 보호해 주시고, 십일조를 드렸으니 물질의 복을 주시고, 뭐 했으니 기도응답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한 행위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이 시간 자기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율법주의 가치관이 깨어지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복음 될 때 율법주의가 깨뜨려지게 됩니다.

 

2. 율법주의는 육신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교회를 의지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예배를 의지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십일조를 의지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아니면 내가 몇 대째 예수를 믿는 것을 의지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받은 세례를 의지합니까?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의 종교적 행위, 이것을 성경에서는 육신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서 서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였습니다. 2: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유대인들은 그들이 성대하게 드린 제사(예배)를 의지하고, 십일조를 의지하고, 할례를 의지합니다. 이러한 행위를 자랑하고, 이러한 종교적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겼습니다.

 

이런 유대인을 향한 예수님의 평가가 뭔 줄 아세요?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율법주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성격적 지식이 우리가 의지하는 율법주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삶과 사역을 위한 기준을 담고 있기에 성경을 잘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는 책입니다.

여기 피자 전단지가 있습니다. 피자 전단지는 피자를 소개하는 것이지 피자는 아닙니다. 피자 전단지를 보고 모든 피자에 대해 다 알았다고 해서 그것이 피자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피자에 관하여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인격체 이신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자체를 중요시 한다거나,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있고, 또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성경 지식이 바로 율법주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왜에 선령의 은사, 사회적 영향력, 세상적인 축복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소중한 것들도 율법주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 예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 모든 성령의 은사가 부족함이 없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소중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소중한 것들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서 자부심을 갖게 되고, 그들이 그것들을 자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의지하는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주위에 신앙의 모양은 많으나 하나님의 실제와 생명은 없고, 하나님의 임재는 걷히고,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서 떠나 있으며 우리 안에 온갖 죄악이 가득해졌습니다.

 

3. 율법주의에 빠지면 율법주의에 빠졌다는 것을 본인이 모릅니다.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율법주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아니면 교회를 의지합니까? 물으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 6:20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이들에게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성전을 의지합니까? 하면 뭐하고 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했겠지요. 그들이 성전을 의지 한다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성전을 의지한다고 말씀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삼상 4장에 보면 이 부분이 잘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 전쟁에서 져서 약 4천 명 가량이 전사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종교적인 의식들과 희생들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쟁에 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졌는지 몰랐습니다. 따라서 무엇이 해결책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들이 살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궤를 메고 전쟁에 나가면 이길 줄 알았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여호수아 시대에 언약궤 앞에서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 등 성경적인 역사를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어찌 되었습니까? 대패했습니다. 그 날에 3만 명 이상이 죽고, 엘리의 두 아들도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언약궤도 빼앗기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는 목이 부러져 죽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에게 당신들을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언약궤를 의지합니까? 라고 한다면 뭐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했겠지요.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 눈이 어두워 언약궤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 가지입니다. 당연히 우리 중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회를 믿고, 예배를 믿고, 십일조를 믿는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으면서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거야, 십일조를 드렸으니 복을 주실 거야, 기도했으니 잘되게 해 주실 거야 하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예배를 의지하는 것이고, 십일조를 의지하는 것이고, 내 기도를 의지하는 철저한 타락한 율법주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것은 부분적으로 자기 의를 의지해도 그것은 전체적으로 자기 의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설교를 들으면 목사님!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저는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믿습니다.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데 이런 분들의 문제가 뭔가 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데 하나님의 축복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거짓교리였습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다른복음이 즉 거짓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 얻는다, 맞다, 그러나 우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주시 언약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축복은 할례를 통하여 어찌 보면 대단히 합리적인 생각 같습니다만 그러나 이 또한 율법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은혜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수단으로서 무엇이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추가되면 그것은 자기 의요, 그러한 가치관은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이러한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무 유익이 없으며,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4. 율법주의의 열매들

오래전 부산에서 교회 지체들과 바람을 쐬러 갔는데 과실나무에 꽃이 하얗게 피었는데 저기 무슨 나무인가? 누구는 사과나무다, 배나무다... 그래서 제가 한 말이 열매가 맺으면 다시 와 보자,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율법주의 신앙은 그 열매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열매들이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1) 영적 우월감과 상습적인 죄책감

율법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열매는 영적 우월감입니다. 율법주의는 자기 의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에서는 정해진 규정들과 규칙들을 잘 지키는 자기의 헌신과 노력이 강조됩니다. 그 결과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지킨 사람들은 영적 우월감을 가지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반면에 그것들을 잘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승습적인 죄책감을 가집니다. 둘 다 율법주의 열매입니다. 결국 둘 다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상습적인 죄책감과 영적 우월감은 정반대이지만, 상습적인 죄책감을 가진 사람도 결국 자기의 노력으로 정해진 규례와 규칙을 잘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즉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서도 하나님의 용서를 좀처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일만한 합당한 행위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큰 교만 입니까?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2) 하나님과 관계보다 형식적인 신앙을 추구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율법주의로 타락하면 우리의 신앙이 항상 형식적이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예배하는 것도 형식적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형식, 절차, 순서, 정성을 아주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배도 순서에 따라 잘 드리면 예배를 잘 드린 것으로 이해합니다.

 

순서와 절차를 따라 엄숙하게 제사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이었습니까?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2: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15: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한 마디로 입술뿐이 예배라고 말씀합니다. 입술로만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는 정성이 부족한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본질이 없는 예배를 말합니다. 사실 예배는 의식의 하나로서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담는 그릇입니다. 또한 그 본질을 추구하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의 예배는 본질이 전혀 없이 외부적인 모양만 가득합니다.

우리는 예배로 나올 때 하나님을 추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더욱 목말라하고 ,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깨달아 그곳에 같이 있기 원하는 열망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이름다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기 위해 나와야 합니다.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예배에서 순서와 절차를 잘 마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예배를 통해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질을 추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순서와 절치를 잘 마치면 예배를 잘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 순서와 절차를 잘 마치면 큰 정성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예배요,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알맹이가 전혀 없는 껍데기뿐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외부적인 정성이 가득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이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렇게 예배를 드렸으니, 자기들의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타락한 이후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가능성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고집하니,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좌절이 커지고 두려움이 더 많아지고 위선적이게 되고 얼굴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율법주의 신앙은,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어느 시대나 항상 우리 곁에 있어 왔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종교가 율법주의입니다. 아니 세상의 모든 종교는 율법주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타락하면 율법적인 종교가 되어 버립니다.

 

3) 율법주의 열매들 세 번째는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2: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할례를 자랑했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향하여 개 취급을 하였습니다.

병든 비판

1) 교만이나 우월감으로 하는 비판

상대방은 자기는 재판장의 자리에 상대방은 죄인의 자리에 앉혀놓고 하는 비판

2)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비판

건강한 비판

1) 복음이 지닌 긍휼의 정신으로 하는 비판

사랑하지 않으면 비판하지 말자

2) 상대방을 깨우치고 살리기 위한 비판 (2:2)

 

율법주의란? 자기의 종교적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가치관

율법주의 열매 1) 영적 우월감과 상습적 죄책감,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 남을 끊임없이 비판함

 

이게 바울의 모습이었고 우리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바뀔 수 있었는가? 다메섹 도상에서 복음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 아닙니까?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9: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여러분 율법주의에 빠져서 영적 우월감과 상습적 죄책감,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 남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자리에게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은 내 노력으로 내 인격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스스로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대안을 마련하셨습니다.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으로는 안 된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 복음이신 그분이다. 그 복음을 자격 없는 자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되고 회복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지난 한 주간은 고난 주간이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의 피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피를 믿고, 그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피의 완성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의 피를 믿을 때 예수님이 다시 사셨듯이 우리도 다시 산다는 것의 증표가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