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4.9. 15. 너 남을 판단하는 자여!
롬 2:1-11
우리는 지난 5주에 걸쳐 교회의 비전과 가치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로마서로 돌아가서 오늘은 로마서 2장1-11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로마서 1장을 잠시 정리해보면 롬1:1-17절은 바울의 인사말과 서론으로 여기서 바울은 세 가지를 강조하는데 첫째는, 세상의 복음과 하나님의 복음을 대조하면서 참된 복음은 세상이 주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인 것을 강조하고, 둘째는 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 복음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구원의 능력, 우리를 변화시키고 치유하고 회복케 하는 능력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제가 가끔 인용하지만 한국인의 두통약 게보린, 여러분 내가 지금 두통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이 고통을 멈추게 하는 것은 게보린이라는 약의 성분을 알고, 어떻게 제조 되었는가 그 과정은 안다고 두통이 사라는 것은 아닙니다. 게보린이라고 하는 약 자체를 내가 먹을 때 두통을 사라지듯, 우리 또한 예수님에 관한 성경적 지식. 십자가에 관한 성경적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으로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진정한 구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룩의 예)
그러면서 롬1:18절 본론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복음과 대조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이야기 합니다.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부인하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죄짓고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롬1:24, 26, 28절 세 번에 걸쳐 “내 버려두사” “내 버려두사” “내 버려두사” 이렇게 니 마음대로 해봐라 내 버려두니까 이런 자들에게 나타나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롬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자라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진노가 임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들러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보이지 않아요, 나타나지 않아요? 왜 줄 아세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오래 참으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과 또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쌓여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날, 그 진노를 피할 자는 이 땅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무서운 것입니다.
만약 나에게도 ‘내 버려두사’의 열매가 있는데도 지금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가고 있구나, 자각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도적과 같이 생각지도 못 할 때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살펴 볼 로마서 2장에서는 이 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짓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짓는 죄보다 더 큰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 죄가 바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로마서 2장은 소위 그 당시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율법을 지키는 것도 모자라 613가지 추가율법까지 만들어 놓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십일조를 드리는 것 말할 것도 없고, 누구에게 선물을 받으면 그 선물의 십일조를 드렸고, 심지어는 음식에 집어넣는 양념까지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주신 율법을 가졌으며, 우상숭배도 하지 않고, 동성애도 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듯합니다.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만드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롬2:1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자기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2:3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까?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이나 그들이나 똑 같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교통법규를 어기는 사람을 향하여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고, 욕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나름 교통법규를 잘 지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왜요?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도 소위 믿음이 좋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많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방탕한 사람과 그를 판단하는 사람 중 누가 더 큰 죄인 같아 보입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방탕한 사람 같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 같다는 말입니다. 실제 간음을 저지른 사람이나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으로 짓는 죄나 실제로 행하는 죄나 같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의 방탕한 죄를 지은 사람이나 그것을 판단하는 너희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 같이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시죠? 그래도 하나님 안 믿고 방탕한 삶을 사는 저들보다는 그래도 우리가 낮다고 생각하고 싶으시죠?
보세요! 초등학교에서 수학시험을 치는데 문제가 7 x 8=? 56인데 한 학생은 54를 적었고 다른 학생은 46을 적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둘 다 틀렸다고 채점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54를 적은 학생이 선생님을 찾아와서 따진 것입니다. 자기는 2밖에 차이가 안 나고, 저 친구는 10이나 차이 나는데 똑 같이 틀렸다고 한 것은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채점을 하고 있는 선생님에게는 둘 다 똑 같이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이방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이방인들보다 낮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면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전혀 모릅니다.
왠 줄 아십니까? 복음이 복음 되지 않아서입니다. 복음이 복음 되지 않은 사람의 문제는 자기를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솔직히 자신이 지옥에 갈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는 죄인은 죄인인데 괜찮은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면 죄인이지 괜찮은 죄인은 없습니다.
복음이 복음 되지 않은 사람일수록 남을 비판합니다.
복음이 복음 되지 않은 가정일수록 서로를 판단하는 일이 가득합니다.
복음이 복음 되지 않은 교회일수록 서로 정죄하는 일이 난무합니다.
오늘 여러분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를 깨뜨리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비판하고, 끊임없이 판단하고, 끊임없이 정죄하는 것 아닙니까?
1.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한 자의 특징
자기 자신의 약점과 죄에 대하여는 둔감하고 상대방의 약점과 죄에 대하여는 아주 민감한 태도가 있습니다. 복음이 죽어있는 자 일수록 자신에 대하여는 한없이 관대하고 상대방에 대하여는 한없이 비판적입니다.
물론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 ‘죄를 덮어 버리자!’ 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죄를 짓고는 ‘비판하지 맙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정말 심각한 사람입니다. 죄짓지 않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 문제는 철저히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죄를 다룰 때, “나는 의인인데, 너는 죄인이야!” 하는 태도를 가지면 더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세요.
마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7: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여러분 왜 자기에 약점이나 죄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하고 상대방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날카롭게 반응하느냐? 바로 내 눈 속에 들보가 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여기 나오는 들보는 건축 재료로 영어로는 beam“빔”입니다. 우리 나라말로 “대들보”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티”는 자기 스스로 뺄 수 있는 작은 것인데 반해 들보는 자기 스스로 자력으로 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들보가 있으면 자기를 보지 못하고, 사물을 왜곡되게 보게 됩니다. 우리는 정말 자기를 몰라요, 상대방에 대해서는 얼마나 예리하고 날카롭게 통찰력을 가지고 지적하는데 진작 자기에 대해서는 몰라도 정말 모릅니다. 그러니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 아닙니까?
비판을 잘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왜 그처럼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냐고 힐문하면 그는 자신의 성품이 너무나 솔직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아닙니다. 그는 자기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큰 죄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빼야죠? 그런데 이 들보는 내 의지로 자력으로 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해답을 이사야 6장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6:5을 한번 보세요.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렇게 탄식하고 있는데 여러분 5절에 나오는 그때가 어느 때 입니까?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것을 목도한 그때에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한 그 순간에 이사야 눈에 들보가 빠진 것 아닙니까?
맨날 타락한 저 백성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고, 맨날 부정부패하고, 사기치고, 죄만 짓는 저 인간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존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고 이사야의 눈에서 들보가 빠지니까 “화로나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적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해서 자녀가 바뀌고 남편이 바뀌고 아내가 바뀐다면 지금쯤이면 다 천사표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적한다고 바뀐다면 우리나라에 문제 가정, 문제 남편, 문제 자녀는 절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 가정을 보세요. 아니 주위 가정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내 가정을 보세요. 지적한다고 달라졌습니까? 기준들이 된다고 변화되었습니까? 아니잖아요. 문제는 내 눈에 들보가 빠지면 됩니다. 내 눈에 들보가 빠지니 긍휼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보게 되니까 가정이 바뀌는 것입니다. 사실 상대방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요. 문제는 내가 달라지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사야6장의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의 모습을 보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자력으로 뺄 수 없는 들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빠지는 줄 믿습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2. 그래서 저는 오늘 성경본문을 통해서 꼭 기억해야할 두 가지 메시지를 나누고 싶은데요
1) 건강한 신앙생활은 건강한 대인관계로 증명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현제 여러분의 영적상태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건강하다, 병들었다, 실음 실음 다 죽어간다.
여러분! 건강한 신앙생활은 내가 하루 몇 시간을 기도하는가, 내가 하루에 성경을 몇 장을 읽느냐 이런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성경에서 가장 건강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장 건강하지 못한 신앙생활, 가장 병든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건강한 신앙생활이란, 너가 그렇게 영적으로 충만하니 그렇다면 그 충만함을 대인관계 속에서 증명해 보이거라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1장의 수많은 죄의 양상들이 열거되어있는데 한 번 보시죠.
롬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런데 이 양상들을 분류를 해보면 정확하게 둘로 분류가 됩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이건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죄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수군수군, 비방” 이것은 대인관계의 문제 아닙니까? 내 내면이 치유되지 못하면 대인관계에서 남을 괴롭히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롬1장의 죄악의 양상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복음의 능력으로 치유를 받았습니다. 내면이 치유가 되었습니다. 내 눈에 들보가 빠졌습니다. 그러면 뒤에 무엇이 따라 나올까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수군수군, 비방, 부모 원망하는 것이 바뀌어서 사람을 세워주고, 사람을 격려해주고, 일으켜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누군가가 여러분을 만나면 의기소침해지고, 낙심하고, 여러분을 만나면 정죄당하는 마음이 들고 이런 열매가 나타나면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하루에 성경을 100장을 읽지 못한다 할지라도 복음이 내 안에 작동되면 의기소침한 사람이 나와 5분만 대화를 나누면 용가가 생기고, 절망하고 좌절한 사람이 여러분을 만나고 나면 용기가 생기고 꿈을 꾸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관계에서의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점검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이 실패한 것이 바로 이 부분 아닙니까? 자기들은 스스로를 선민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대인관계를 한번보세요.
막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그들의 분노가 느껴집니까?
눅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이것 아닙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비록 토색하지 않아도, 불의를 저지르지 않아도, 여러분이 바람피우고 간음하는 짓을 하지 않아도 대인 관계에서 유대인들과 같은 이런 태도를 취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러므로 이 사람아! 너나 제나 똑같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거 뼈아프게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2) 건강한 대인관계가 중요한데 건강한 대인 관계는 복음의 감격회복으로 가능합니다.
건강한 대인관계는 삼겹살 같이 먹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약발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바울을 보세요. 바울이 지금 로마서 2장 1절을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말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게 누구의 모습입니까? 과거 자기 모습 아닙니까? 과거 주님을 만나기전, 은혜 받기 전, 자기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기준과 조금만 다르면 다 틀렸다고 혈기를 내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니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이단으로 생각하고 잡아 죽이러 다니고, 다메섹으로 갈 때에도 혈기가 등등해 가지고, 자기 눈에 들보는 보지 못했던 바울,
그렇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혈기 등등했던 바울이 어떻게 상대방을 세우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사도로 바뀌게 되었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복음을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냥 책상에 앉아 성경공부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1장 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딤전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랬던 바울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14-15절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깨달음을 그가 어떻게 얻었습니까?
딤전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늘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내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남편에게 부모에게 내 자식에게 날마다 니가 문제라고, 당신 때문에 이 모양이라고, 그래서 자기도 평안이 없고, 자기를 만나는 모든 사람도 평안이 없는 그런 대인관계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 받고 그래,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며, 자기 안에 평안이 찾아오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의 사도라는 소리를 듣는 은혜를 바울이 누리면서, 그 감격의 눈물로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오늘 여러분 무슨 일로 마음에 그렇게 혈기가 많으세요. 무슨 일로 울분이 그렇게 많으세요? 무슨 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하세요? 내 모습을 보지 못해서 아닙니까? 내 눈의 들보를 깨닫지 못해서 아닙니까? 복음이 복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기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눈에는 뭐가 보입니까? 소위 예수님을 잘 믿는다 자처하면서 뒤에서 비난하고, 판단하고, 후욕하고, 정죄하는 이 어마 어마한 죄악이 여러분의 눈에는 보이십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가정에서 맨날 얼굴 붉히고, 당신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그래서 가정을 파괴하는 이 죄악이,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까지 드리워져 가정을 교회를 분열시키는 죄악들이 보이십니까?
오늘은 2000년 전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한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의 사랑만 본다면 반쪽밖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바울처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였듯이 우리 또한 그동안 판단하고 정죄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진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정상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마음은 의지나 결단으로 극복이 안 됩니다. 우리의 깊은 죄성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주 예수님을 바라볼 때만 극복됩니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우리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백신으로 치료가 되면 더 이상 심판자 노릇 하지 않습니다. 검사노릇하지 않습니다. 넌 이게 잘못되었고, 넌 저게 잘못되었고, 넌 이것 고쳐야 돼. 저 교회는 이것 때문에 망해,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변호사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영원히 마음에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방탕한 죄”보다 “판단하는 죄”가 더 크다! 모든 죄가 다 두렵지만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의 죄는 더 무서운 죄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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