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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권별설교/로마서

03.예수 그리스도의 종(롬1:1-2)

by 오용주목사 2017. 1. 20.

2017.01.15.                                      03.예수 그리스도의 종

1:1-2

 

오늘은 로마서 강해 세 번째 시간으로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1절을 자세히 보면 1절 안에 바울, , 사도, 부르심, 택정함 이런 단어들이 나오는데 이런 단어들은 참으로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네 단어 속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함축적으로 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바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전의 사울의 삶과, 이후 바울의 삶에 대해 살펴보았는데요, 바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전의 삶이 한 마디로 스스로 생각하고의 삶, 큰 자의 삶이었다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의 삶은 작은 자의 삶이었습니다. 작은 자의 삶이 뭔가?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늘 주님께 질문하며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인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 같은 뜻, 같은 길을 걷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생각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행동하는 삶, 즉 앎을 넘어 삶으로의 삶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자신을 소개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에 대해 살펴보고자합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우리 애들이 자기소개서를 작정한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정현 이는 대학진로와 관련하여 자기 소개서를 작성해서 담임 선생님께 보내야 했고, 다현이는 취업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병원에 보내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소개해야할 때 뭐라고 소개하십니까? 한 때 자기를 PR 할 때 P는 피할 것은 피하고, R은 알릴 것은 알려라 했듯이 이 세상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알리고 손해가 될 것 같은 것은 감추는 것이 자기소개의 정석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서두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종 바울이라고 소개합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 편지의 내용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공신력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의 화려한 스펙을 먼저 소개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인이다. 당시 정통 유대인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헬라유대인은 13일 만에, 그리고 개종한 이방인들은 성인이 되어서야 할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사울 왕을 배출한 베냐민 가문에서 태어났다.

또 당대 우리의 랍비라는 최고의 칭호로 불러지는 일곱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인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배워 율법에 정통한 식견을 지녔다. 뭐 이런 것을 먼저 소개해야 이후 자기가 보낸 로마서 내용들을 믿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자기의 스펙을 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고 자기를 밝히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면 아! 바울이 자기를 종이라고 소개 했구나 정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당시 종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안다면 여러분의 생각도 달라질 것입니다.

 

1. 먼저 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이렇게 묘사를 하고 있는데요. 사실 바울의 이 표현에 대하여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는 느낌하고 1차 수신자라고 할 수 있는 그 당시 로마에 있던 성도들이 받아들인 느낌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선 이라는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보면 둘로스라는 단어인데요. 이걸 으로 번역하기에는 너무 약합니다. 사실 종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노예로 번역해야 정확한 뉘앙스가 풍겨지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노예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집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완전히 인격이 말살되고 짐승과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이 그 당시 둘로스, 노예였습니다.

우리가 가끔 영화를 통해 보았던 글레디에이트, 검투사 영화를 보면 그때 당시 노예들을 노예 시장에서 마치 우리가 물건 흥정하듯이 흥정해서 사와서 검투사로 훈련시켜 상대방이 죽을 때 까지 싸우게 하고 로마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며 즐겼는데 당시 그들의 목숨은 사람 목숨이 아니었습니다. 짐승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노예들은 주인에게 소유된 물건, 재산 중에 하나지 인격이라곤 다 말살된 그런 상태였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인구의 절반인 6,000만 명이 노예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노예를 빗대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노예는 당나귀와 똑 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할 뿐이다, 이런 짐승취급을 받는 것이 노예였습니다.

아 그런데 바울이 그 당시 그렇게 끔찍하게 사용되던 둘로스라는 단어로 자기를 소개하고 있는 이게 굉장히 이상하고 어색한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과거 우리나라 백정들이 얼마나 무시를 당하며 살았습니까? 그런 무시를 당하고 사는 그들이 나는 백정이요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수치스러운 신분이기에 죽지 못해서 마지못해서 하는 말이지 누가 자기를 소개할 때 백정이라고 소개하겠습니까? 그런데 당대 석학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이, 그리고 당당하게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바울이 자신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요 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2. 그렇다면 바울은 언제부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는가?

성경에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노예들은 주로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이었는데 그들은 노예시장에서 상품을 진열하듯 반나체로 진열되어있습니다. 그러다 노예가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 그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 사면 그때부터 그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 증표로 주인의 이름이 새겨진 귀걸이를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노예와 자기의 모습이 오버랩 된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나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나를 사셨구나, ! 그러니 이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예수님의 종이구나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나는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다.

나는 과거에 공중 권세자, 사단의 종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생명을 지불하고 나를 사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것이다.

이 사실을 인식할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도 이 사실을 잘 아는데, 왜 우리는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삶을 살지 못하고 주인 된 삶을 살아가는가? 알기는 아는데 이론적으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교리적으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믿기는 믿는데 그 내용만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처음부터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통달한 사람입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입니다. 그 구약 율법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리 죄의 값을 대신 하실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바울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실 메시아 그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그는 율법을 공부하면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는 것으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언제 입니까? 비로 자기가 그렇게 공부한 율법에서 가리키고 있는 죄인이, 세리나, 창기가 아닌 바로 나인 것을 표면적이 아니라 이면적으로 알고, 이런 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려 내 죄의 값을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 때 그 때 비로소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도 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한 것도 율법을 공부하고 보니 율법에서 너는 죄인이야, 그래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바울이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서 말하고 있는 그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죄인은 죄인인데 그래도 괜찮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데 거기에 내 지분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주인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 다시 한 번 깨어져야 합니다. 박살이 나야 합니다.

 

 

3.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

많은 분들이 1절에 나오는 바울의 종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구약 출21장의 귀 뚫린 종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21:5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이 말씀의 배경이 어떤가 하면 그 당시 노예로 팔려 가지고 인권을 다 빼앗기 짐승 취급을 당하며 살아가던 노예들이지만 그들에게 한 가지 희망이 있는 겁니다. 이게 영구히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21: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이게 당시 노예들에게 얼마나 희망의 메시지이었겠습니까? 비록 지금은 노예로 팔려와 인격이 말살되고 짐승취급을 받으면서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지만 이게 끝나간다. 조금만 있으면 자유를 회복한다. 이 희망을 가지고 고통을 이겨냈을 겁니다.

 

그런데 이처럼 6년을 종살이하고 이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7년이 되었는데 어떤 노예들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겁니다. 이제 내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한을 받았지만 이 자유를 포기하고 주인에게 반납하고 싶다는 겁니다. 자유를 반납하고 나는 계속 주인의 노예가 되겠다고 청원하는 노예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주인은 이 노예가 자유를 포기하고 평생 주인의 종으로 살겠다는 것의 증표로 송곳으로 그 노예의 귀를 뚫게 됨으로 영원히 주인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종이 얼마나 주인에 대한 은혜와 사랑의 감격이 컸으면 그 자유를 자기 스스로 반납하고 평생 주인의 노예로 살겠다고 결단을 했겠습니까?

 

4귀 뚫린 종의 개념이 중요한데 다음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귀 뚫린 종의 개념이 중요한 것은 감격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귀 뚫린 종의 개념은 감격의 문제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여러분 얼마나 그 주인이 자기에게 따뜻하게 사랑으로 잘 대해주었으면 자발적으로 노예 생활을 계속하겠노라고 그렇게 귀 뚫린 종의 자리까지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바울이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하는 이 표현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눈물이 있는 겁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에게는 자기의 그 화려한 스펙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오직 하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은혜를 입은 종이다. 내가 그 분의 은혜로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그 감격이 바울에게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사랑, 십자가)의 옷을 입은 자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사랑, 십자가)만 나타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스펙의 옷을 입기를 원합니다. 나를 드러내기에 거기에는 주님은 없습니다.

 

그래서 롬5:8절에 바울의 이 감격을 한번 느껴보십시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러분 이 구절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읽혀지세요? 여러분 이 구절을 읽을 때 그냥 교리로 만 읽혀지면 안 됩니다. 이건 바울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눈물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 이전에 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는데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옥에 가두고, 사형에 찬성표를 던지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짓을 한 나, 이 용서 받지 못할 나 같은 것을 용서하시고, 거두어 주신 주님, 그 바울의 감격의 눈물이 배여 있는 것이 롬5:8절 말씀 아닙니까?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는 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진 겁니다.

모양은 있는데 감격이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겁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토미 테니가 쓴 종의 마음에 나오는 한 표현

섬김의 정신의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불붙는 것이다

여러분 이론과 논리를 배워서 낮아지는 자리로 갈 수가 없습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 나 같은 것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에 대한 눈물 이것이 자발적인 종이 되어 낮은 자리로 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픈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떡하다 다 식어버린 감격 없는 신앙생활을 하시게 되었습니까?

어떡하다 그렇게 날카로워 지시고 어떡하다 누구를 용서할 수 없는 메마르고 삭막한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시게 되었는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공부하는 내내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 인한 이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 귀 뚫린 종의 개념이 중요한 것은 소속감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예로 팔려와 6년을 채운 종은 이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동안 노예생활에서 이제는 주인을 떠나 자유를 선택 하던지, 아니면 자유를 반납하고 영원히 주인에 소속된 종으로 머물 것인지 이 둘 중에서 후자를 선택한 종이 귀 뚫린 종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라고 한 이 말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소속된 하나님의 사람이다 라는 의지적 표현이 담겨있는 겁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는 말은 종은 주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인이 없는, 종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 말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소속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오늘 여기 예배드리러 오신 것을 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 소속 된 것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제적으로 몸은 여기 와 있지만 어디에 영향을 받느냐가 내 소속 아닙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가룟 유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3년 동안 밤낮으로 예수님의 교훈을 들었던 사람이었고, 마지막에는 주님과 함께 만찬의 현장에 있었지만, 그런데 가룟유다는 지금 누구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주님의 영향입니까?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마귀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겁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누구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요즘 많은 성도들이 예배당은 나오지만 주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 분명 크리스천인데, 교회 다니는데 그런데 실제 영향을 받는 것은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가치관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의 치명적 문제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겁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노리는 타깃은 우리로 하여금 죄 한번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간질 시키고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속되고 주님의 영향을 받는 다면 그 증거가 뭐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겠습니다. 귀를 뚫으면 그 날로부터 종은 더 이상 종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가족이 됩니다. 자기 아들과 똑 같이 대우합니다. 아들과 똑 같이 상속권이 주어집니다.

여기 우리와 함께 한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이제 모든 일이 잘 풀릴 거야 이런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두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와 임마누엘입니다.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은 용서를 받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주어진 것입니다. 의롭다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반드시 의롭게 살게 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살인강도를 저지른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가 사면을 받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큰 은혜이겠지요. 그런데 그의 인격이나 삶이 변화되지 않아 다시 죄를 지었다면 죄 사함을 잘해 준 것입니까?

 

우리의 구원이 단순히 죄 사함만 주는 것이라면 얼마나 불완전한 구원이겠습니까? 복음은 죄 사함만 받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삶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 예수님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의 의미입니다.

 

로마 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300년을 지하 무덤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교리를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얼마나 많이 무너집니까? 살아계신 주 예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300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반문할지 모릅니다. 바울처럼 특별한 소명을 받은 선교사나 예수의 종이 되는 문제가 중요하지 나 같은 평신도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나 인간적이 생각입니다.

1: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그리스도의 것으로,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종, 둘로스 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삶은 1)은혜에 대한 감격의 삶입니다.

) 윤복희 권사님 여러분 노래 후렴 가사 원어

앞이 안 보이고 캄캄하니?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너의 지팡이니 나만 잡고 따라와

네가 사랑이 필요하니?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너의 사랑이야

그러니까 웃으며 나를 바라봐라

그리고 모두가 모두가 이 길을 걸어간다고 애기해 주고 싶다

그러니까 나를 믿고 어깨를 펴라

여기서 멈출 수 가 없어

지금이 시작이고

이 길이고

이 길 하나뿐이야

우리 함께 이험하고 아픈 세상을 같이 걸어가자

나의 아버지는 시작이요 길이요 진리요

2) 예수 그리스도에 소속된 삶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주님께 소속된, 하늘나라에 소속된 자들입니다.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자는 주님의 영향을 말씀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야합니다. 이때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임재가 하십니다.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이 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