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08. 02.사울의 삶, 바울의 삶
롬1:1-2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집트를 다녀온 분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위대하다고 합니다. 두바이에 다녀온 분들은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 빌딩(828m)의 위대함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진정 위대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압니다. 진정 위대한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살던 동네가 철거민들이 모여서 살다 동네를 이룬 부산시 금정구 동상동이란 동내였습니다. 철거민들이 모여 살다보니 낙후된 동네였고, 우범지역이란 좋지 못한 소문까지 나 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에 여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술 먹고 워낙 싸움을 잘하기로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여포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포라는 사람이 제가 출석하는 교회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제가 간혹 밤거리를 배회하다 깡패들을 만나면 첫 마디가 여포 형님 아냐? 덕 분에 위기를 모면한 적도 한두 번 있었습니다. 이 사람 왈 자기가 지금까지 먹은 술을 모아두면 한 웅덩이가 될 것이라고, 술집에 가면 술집 주인이 술값은 내지 않아도 좋으니 제 발 싸움은 하지 말라고, 이랬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전도하는 방법)
사람이 변화되는 데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형태만 바뀌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 가 책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본질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염산과 나트륨이 만나 염화나트륨(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형태가 바뀌는 것은 주위 환경만으로도 가능합니다.
예) 미국에 이민 가서 사시는 분들 교통법규를 너무 잘 지킵니다. 왜 일까요? 위반시 범칙금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기만 오면 무법천지가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환경은 그 사람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겁니다. 본질적 변화는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남으로 가능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사람의 내면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이 마음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 본질적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바울의 로마서 인사말을 통해 바울이 강조한 3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1.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복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그 복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3. 바울이 세 번째 강조하고 있는 것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능력을 강조합니다.
오늘 바울의 삶을 통해 복음의 그 위대함(능력)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서두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예수 그리스도 종 나 바울은”이라고 소개합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시선을 “나 바울은”이라는 이름에 집중에 보시기 바랍니다.
1. 사울의 삶
바울은 신약 27권 가운데 무려 13권의 서신서를 기록했는데 이 13권의 서신을 바울서신이라 부르죠? 교회에 보낸 9권의 서신과, 개인에게 보낸 4권의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 서신서 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은 그가 기록한 모든 서신서의 맨 처음 시작을 “나 바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엡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딤전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그런데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바울은 원래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울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물론 우리 개혁성경에서는 바울이라는 이름 앞에 이런 저런 수식어가 붙어 있기도 하지만 원어를 보면 언제나 첫 단어가 바울로 시작합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헬라어성경: “파울로스 둘로스 이예수스 크리스토스” 라고 파울로스, 바울로 시작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울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왜 굳이 바울이라는 이름만 사용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그랬는지 짐작가지 않습니까?
여러분! 바울의 일생을 보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 BC의 삶과, 예수님을 만난 후 AD의 삶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BC의 삶: 사울의 삶
AD의 삶: 바울의 삶
그러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인 사울의 삶은 어떤 삶이었습니까?
행26: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바울이 자기 자신을 특징지을 때,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혼미한 상태의 특징이 뭐라고요? 스스로 생각하고...이것이 사울의 삶입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고” 이 말을 묵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구약 사사시대가 사울의 삶과 오버랩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영적,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한 극치 시대가 사사시대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사시대를 특정 짓는 것을 성경은 두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게 뭡니까?
삿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러분! 사사기 시대의 혼미한 그 시대를 특징짓는 게 자기 생각대로 자기 내키는 대로 살았다는 겁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삶의 특징을 자기 생각 되로 산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위한 일이겠거니 자기가 생각하고 예수님을 핍박했다는 거 아닙니까? 혹시 이게 우리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데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삶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사울의 이름의 뜻과 같이 큰 자가 되는 겁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은 결국 자기가 자기에 하나님 되는 큰 자의 삶입니다.
빌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보세요, 굉장히 열심히 살았죠?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을까요? 자신의 힘과 지혜를 동원해서 자신의 유익과 위상과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큰 자의 삶을 위해서 자기의 지혜를 총 동원하여 열심히 사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큰 자의 삶’을 추구하며 살았던 사울이 그가 기록한 서신서에서 ‘나 사울은’ 나 사울은‘이렇게 자기를 소개해야 제대로 소개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자기를 소개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자기를 ’바울‘ 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자기가 쓴 모든 서신서에서 말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이제는 ‘사울의 삶’을 청산하고 ‘바울의 삶’을 살겠다는 자기 선언인 겁니다. 과거 자기 열심, 자기 노력, 자기 힘, 자기 스펙을 자랑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겁니다.
다니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 그들에 의해 다니엘이란 이름이 벨드사살로 바뀌어 짐을 당하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란 뜻인 반면 벨드사살은 벨(바벨론 신)이 나의 생명이다 는 뜻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의 이름이 벨드사살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 다니엘은 나 다니엘은 다니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나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지만 베드사살로 살지 않겠다는 겁니다. 나는 우상을 섬기고 우상의 영향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겠다는 말입니다.
마찬 가지로 사울이 언제나 그의 서신서는 나 바울은 나 바울은 이라고 굳이 바울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것은 나 이제 사울로서의 삶을 살지 않고 바울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말입니다.
2. 바울의 삶
그럼 바울의 삶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작은 자의 삶, 약함의 삶입니다. 여러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과거 자기 모습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과거 자기의 열심, 학벌, 스펙 뒤에 가려진 자기의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앞에서 적나라하게 들어난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이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비춰진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보세요, 사6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던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때 첫 번째 나타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사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더러운 옷 같으며’ 이 말의 원어를 보면 ‘사용한 생리대’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의가 이렇다는 겁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이 모습을 본 것입니다. 자기의 죄 된 모습을 본거예요. 당대 영적 리더라는, 당대 선지자라는 직함 속에 감추어진 자기의 죄 된 모습이 드러난 겁니다.
마찬 가지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자기의 실체가 폭로당하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자기 열심 속에 감추어진 실체가 드러난 겁니다. 자기의 종교적 열심, 자기의 ‘의’ 뒤에 감추어진 실체, 몇 대째 예수 믿는 가문이라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속에 감추어진 자기의 죄악 된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 큰 자로서의 삶이 주님에 의해 작은 자의 삶으로 끌려 내려가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에 손에 끌려야만 가능합니다.
결과 큰 자의 삶에서 작은 자 의 삶으로, 강한 자의 삶에서 약한 자의 삶으로 내려오더라는 겁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했는데 이제는 그 부끄러워했던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자로....
복음을 미련한 것이라 했는데 그 미련한 복음을 가장 지혜로운 것이라고 자랑하는 자로..
복음을 믿는 자를 욕하고, 핍박하고 옥에 가두는 파렴치한 짓을 했는데 복음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는 자리로 내려가더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토록 사울을 변화시켰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그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지난날 자기 열심, 자기 의로 충만했던 사울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고전15:10)라고 고백케 했으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 생각한 사울을 딤전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하게 하더라는 겁니다.
나는 지금까지 큰 자의 삶을 추구하면서 내 자신의 힘과 지혜와 열심을 근거로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려고 사울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난 그분의 은혜, 그분의 십자가만을 굳게 붙들어야하는 작은 자라는 것을 알았다. 바로 이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이란다. 이걸 전부 한 단어에 넣은 것이 ‘파울로스’ ‘나 바울’은 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의 첫 단어가 파울로스, 작은 자로 시작합니다.
3.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고 전부 큰 자가 되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큰 자되고 싶어서 아닌가요?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큰 자되기 위함 아닌가요? 어디서요? 이 땅에서, 그리고 그 다음은 천국에서... 우리가 끝없이 추구하고,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큰 자되게 해 주세요 아닌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보면 한 결 같이 하나님을 사랑한데요. 누구보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큰 자의 삶을 살아갑니까? 왜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의 삶의 양식으로 살아갑니까? 왜 바울의 과거 예수님을 알기 이전의 삶의 양식이 그대로 나타나느냐 말입니다.
가정에서 맨 날 하는 부부싸움도 따지고 보면 자기가 큰 자 되고 싶어서가 아닌가요? 교회 내에서 서로 싸우고 분열하는 원인도 결국 자기가 큰 자되고 싶어서 아닙니까?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하는 우리가 사울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겁니까?
여러분이 다투는 그 곳에 과연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는 하는 것입니까?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어떻게 회복이 가능할까요? 다른 무슨 수가 없어요. 성경 많이 안다고 되지 않습니다.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과 같이 다메섹 도상에서 했던 두 가지 질문, 우리는 계속 주님께 던져야 합니다. 첫 번째 행22: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여러분!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존재에 대해 궁금해 하고 끊임없이 주님의 존재에 대해 알아가려고 몸부림쳐야 해요.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아요? 그래서 늘 주님을 알기를 노력해야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 행22:10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여러분 우리가 말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제 나름대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봉사하고 그렇게 섬겼는데 주님 보시기에도 이게 옳은 일인지요? 질문해야 합니다. 아무리 여러분 생각에 내 생각은 옳고 저 사람생각은 틀렸다 싶어도 주님을 의뢰하고 주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 제 생각에는 제가 옳은 것 같습니다만 주님 보시기에는 어떠신지요? 무엇을 하오리이까?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이 질문이 생략되면 그때부터 병들기 시작합니다. 병들면 어떻게 되느냐? 내 생각이 다 옳다라고 확실히 믿으며 살아갑니다.
왕하 5장에 아람나라 군대장관이 한말이 뭡니까? 왕하5: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그러기 때문에 대답은 간단합니다. 대안은 간단합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내 생각, 내 이론, 내 논리를 내리고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내 생각,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기준은 어떠한가, 복음으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늘 주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늘 물어야 합니다.
최용덕 작사 작곡 한 찬양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1절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2절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거져 주는 사랑,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나를 도와주소서
얼마 전에 저녁 때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아는 사람 소개받고 전화 드렸는데요, 컴퓨터를 구입하고 싶은데... 여기 칠곡이라고 지방인데요, 6학년 딸애가 있는데 서울에서 할머니랑 같이 있구요 ...(중략)... 사정이 넉넉지 못해서 중고라도 있으면... "통화 내내 말끝을 자신 없이 흐리셨습니다. 나이가 좀 있으신 목소리입니다.
당장은 중고가 없었고 열흘이 좀 안되서 쓸 만한 게 생겼습니다. 전화 드려서 22만원 이라고 했습니다. 주소 받아 적고 3일 후에 들고 찾아 갔습니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어딘지 몰라서 전화를 드리자 다세대건물 옆 귀퉁이 샷시 문에서 할머니 한 분이 손짓을 하십니다. 들어서자 지방에서 엄마가 보내준 생활비로 꾸려나가는 살림이 넉넉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컴퓨터를 설치하고 테스트하고 있는데 밖에서 푸닥푸닥 소리가 들리더니 "어 컴퓨터다!" 하며 할머니 손녀가 들어옵니다.
옆에서 구경하는 손녀를 할머니가 토닥토닥 두드리시며 "너 공부 잘하라고 엄마가 사온 거여 학원 다녀와서 실컷 해. 어여 갔다 와." 아이는 "에이씨~" 한마디 던지고 후다닥~ 나갔습니다. 저도 설치 끝내고 집을 나섰습니다. 골목길 지나고 대로변에 들어서는데 아까 그 아이가 정류장에 서 있습니다. "어디로 가니? 아저씨가 태워줄게. "보통 이렇게 말하면 '안탄다.' 그러거나 망설이기 마련인데 "하계역이요~" 그러 길래 제 방향과는 반대쪽이지만 태워 주기로 하였습니다. 집과 학원거리로 치면 너무 먼 거리 였습니다. 마을버스도 아니고 시내버스를 탈 정도이니...
사건은 이제 부터 시작입니다. 한 10분 갔을까 아이가 갑자기 화장실이 너무 급하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참으면 안 돼?" "그냥 세워 주시면 안 돼요?" 패스트푸드점 건물이 보이 길래 차를 세웠습니다. "아저씨 그냥 먼저 가세요." 이 말 한마디 하고 건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여기까지 온 거 기다리자 하고 있는데 가슴이 "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조석 시트에 검 빨갛게 피가 있는 것입니다.
아차! 첫 월경입니다. 보통 생리라고 생각지 않은 것이 이미 경험했다면 바지가 셀 정도로 놔두거나 모르진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이도 딱 맞아 떨어지고, 방금 당황한 아이 얼굴도 생각나고, '어쩌나~어쩌나~' 그러고만 있었습니다. 바지에 묻었고, 당장 처리할 물건도 없을 것이고, 아이가 화장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까 사정 봐서는 핸드폰도 분명 없을 텐데, 비상등 켜고 내려서 속옷가게를 찾았습니다. 아~ 이럴 땐 찾는 것이 진짜 없습니다. 아까 지나온 번화가가 생각났습니다. 중앙선 넘어서 유턴해서 왔던 길로 다시 갔습니다. 아~~~ 차가 많습니다.
버스중앙차로로 달렸습니다. 마음이 너무 급했습니다. 마음은 조급한데 별별 생각이 다 났습니다. 청량리역 거의 다 와서 속옷가게를 찾았습니다. 아우...제가 사이즈를 알리가 없습니다. 제일 작은 사이즈부터 그 위로 2개 더 샀습니다. 속옷만 사서 될 일이 아닙니다. 아이 엄마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멀리 계신데 이런 얘기 했다가는 진짜 마음 아프실 것 같았습니다. 집사람한테 전화 했습니다.
"어디야?"
"나 광진구청"
"너 지금 택시타고 빨리 청량리역... 아니 그냥 오면서 전화해. 내가 택시 찾아 갈게."
"왜? 뭔 일인데"
집사람에게 이차 저차 얘기 다 했습니다. 온답니다. 아~~ 집사람이 구세주 같습니다.
"생리대 샀어?"
"이제 사러 갈려고."
속옷은?"
"샀어. 바지도 하나 있어야 될 거 같은데."
"근처에서 치마하나 사 오고, 편의점 가서 아기 물티슈도 하나 사 와."
이것저것 필요한 것 다 사 놓고 집사람 중간에 태우고 아까 그 건물로 갔습니다. 없으면 어쩌나 하고 꽤 조마조마 했습니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집사람이 주섬주섬 챙겨서 들어갔습니다.
"애 이름이 뭐야?" 몰라, 들어가서 재주껏 찾아봐..."
집사람이 들어가니 화장실 세 칸 중에 한 칸이 닫혀 있더랍니다.
"얘~~ 있니? 애기야... 아까 컴퓨터 아저씨....부인...언니야..."
뭐라 뭐라 몇 마디 더 하자 안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하더랍니다.
그때까지 그 안에서 혼자 소리 없이 울면서 낑낑대고 있었던 겁니다.
다른 평범한 가정이었으면 축하 받고 보다듬과 쓰다듬, 조촐한 파티라도 할 기쁜 일인데...
뭔가 콧잔등이 짠~~ 한 것이... 가슴도 답답하고...
혼자 그 좁은 곳에서 어린애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차에서 기다리는데 문자가 왔습니다.
[ 5분 이따 나가께 잽싸게 꽃 한 다발 사 와 ]
이럴 때 뭘 의미하고 어떤 꽃을 사야 되는지 몰라서 그냥 아무거나 예쁜 거 골라서 한 다발 사 왔습니다.
건물 밖에서 꽃 들고 서 있는데, 아...진짜 얼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둘이 나오는데 아이 눈이 팅팅 부어 있더군요...
집사람을 처음 보고선 멋쩍게 웃더니 챙겨 간 것 보고 그때부터 막 울더 랍니다. 집사람도 눈물 자국이 보였습니다.
패밀리레스토랑 가서 저녁도 먹이려고 했는데, 아이가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집에 내려다 주고 각자 일터에 가기엔 시간이 너무 어중간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이미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오면서 그 집 사정이 이러이러 한 것 같더라 하는 등의 얘기를 하면서 오는데...
"그 컴퓨터 얼마 주고 팔았어?"
"22만원"
"얼마 남았어?"
10만원
"그럼 다시 가서 계산 잘못 됐다 그러고 10만원 할머니 드리구와..."
차들 돌려 그 집에 들어서니 아이가 아까와는 다르게 깔깔대고 참 명랑해 보였습니다.
봉투에 10만원 넣어서 물건 값 계산 잘못 됐다고 하고 할머니 드리고 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이 엄마에게 전화해서 램 값이 내렸다는 둥 해서 대충 얼버무리고 돌려 드려야 한다니 참 좋아 하셨습니다.
나와서 차에 타자 집사람이 제 머리를 헝클이며 "짜식~" 그랬습니다.
밤 11시 쯤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 엄마 입니다.
"네...여기 칠곡인데요...컴퓨터 구입한..."
이 첫마디 빼고 계속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 역시 말 걸지 않고 그냥 전화기 귀에 대고만 있었습니다.
저는 이 분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반 분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태어날 때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즉 성도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 같은 뜻, 같은 비전,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생각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행동하는 삶 이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타이타닉호 사건
1912년 4월 15일 승무원과 승객 2224명을 싣고 항해를 하던 중 그만 빙산에 부딪혀 1514명이 사망한 참사한 사건 다 아시죠? 그런데 생존율과 관련하여 감동 깊은 글을 보았는데 어린이 생존율이 51%, 여성의 생존율은 무려 74%, 여기에 비해 남자의 생존율은 20%에 불과 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힘이 있고 빠릿빠릿한 젊은 남자들이 생존율이 높아야 되는 것이 정상 아닌가요? 그런데 이런 생존율이 어떻게 가능했나, 자료를 보니까 그 급박했던 순간에 선장인 에드워드 스미스가 외친 한마디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막 아비귀환 속에서 당황해서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 할 때 선장이 이렇게 한마디를 외쳤데요.
"Be British" 영국인다워라, 영국인처럼 행동하라
오늘 이 조국교회 안에서도 이렇게 외치는 선장이 좀 나와야 될 것 아닙니까?
"Be Christian" 크리스천다워라, 크리스천 행동해라
여러분 한 주일동안 이 세상에서 비굴하게 살지 마시고 초라하고 시시하게 살지 마시고 나는 과거 큰 자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하며 살았던 사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에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로의 삶을 산 바울과 같이 난 하나님의 자녀야 "Be Christian" 크리스천 행동하라 이 인식이 여러분을 고상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능력이 됨을 맛보고 경험하는 한 주간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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