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1. 04.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요나1:4-10
요나서 3번째 시간입니다. 요나서는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으로 시작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다’ 이 말씀은 다음 몇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게시는 개인적이다
2) 하나님의 계시는 순종의 내용을 알려준다.
3)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성품의 표출이다.
4) 하나님의 게시는 나의 기대와 다를 수 있다.
앗수르는 요나의 고향 가드헤벨에서 800km떨어진 먼 곳에 위치한 곳으로 ‘니느웨에 가서 쳐서 외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에게는 가장 듣기 싫고, 가장 가기 싫은 곳으로 가장 흡족하지 않는 말일 것입니다.
예) 행9:10-15 아나니아 / 행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9: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럼에도 불구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러나’ 불순종으로 반응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둘 중 하나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순종, 다른 하나는 불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욘1: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예기치 못한 큰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다 옛날에 불렀던 찬송가 생각이 났습니다.
1.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2.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풍랑이 없이 고요한 바다로 인도해 가실 때 참 감사가 나오지만 그러나 1절만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예기치 못한 풍랑이 찾아오고 어려움이 있을 때 그럴 때 우리가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저는 이 찬양이 전도서 7:14절을 가지고 만든 찬양이라 생각합니다.
전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어떤 인생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즐거운 인생도 없고, 또 어떤 인생이라고 해서 시종일관 처음부터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날마다 풍랑만 있는 인생도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하여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 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측할 수 없도록 만들어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찬양은 1절과 2절이 한 세트입니다. 1절만 강조해도 안 되고 2절만 강조해도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 낯을 피해서 도망가던 요나가 처음엔 얼마나 순조로웠습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순풍에 돗단 인생길을 달려갔는데 드디어 2절 가사가 그의 인생에 도래한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풍랑을 만난 겁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아요. 누구라서 하나님께 불순종 안하는 사람이 있겠으며 어느 인생이라고 해서 100% 하나님께 순종만 하겠습니까? 불순종 할 때도 있고 그래서 그 결과로 매를 맞을 때도 있고 풍랑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보편적인 인생의 모습니다. 말할 수 있는데 문제는 풍랑을 만났을 때 요나의 모습이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한 겁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풍랑을 만난 두 부류의 인생, 한 부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이고 또 한 부류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종의 삶을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공들과 하나님을 알던 요나가 똑같이 풍랑을 만난 운명공동체 속에서 똑같이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합니다.
1. 먼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공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위기가 찾아오니까, 풍랑이 찾아오니까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그들 나름대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몇 가지 인데 그게 뭡니까?
욘1: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가장 먼저는 사공들이 두려워했다고 말합니다.
지난 주중 TV에서 명품을 수리하는 장인에 대해서 나오는데 아주 비싼 명품 가죽을 쓱쓱절단 하는 것을 보고 PD가 겁나지 않냐고, 실수해서 버릴까봐... 이 때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젠 오래 이 일을 하다 보니 아무렇지도 않다고, 겁을 내서 어떻게 이 일을 하겠느냐고...
무슨 말입니까? 사공들은 파도에 익숙한 자들이기 때문에 웬 만한 파도나 폭풍에는 당황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거 심상치 않다, 이건 보통 태풍이라 아니라 누군가의 잘 못으로 이러난 신의 노여움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대안이 뭡니까?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그런데 여러분 이 대안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왜 허무한지 아세요? 도와 줄 수 없는 어떤 막연한 대상을 향하여 빌지만 그것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여러분 물에 빠진 사람은 썩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사공들이 불러대는 신들이라는 것은 지푸라기와 다름이 없습니다.
달에게 빌고, 해에게 빌고, 나무에게 빌지만 그것들이 실제 도와줄 수 있는 인격체가 아닌 것 입니다. 사실 그들이 해에게 비는 것, 달에게 비는 것, 나무에게 비는 것과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비는 것, 이것 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비는 행위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런데 우리가 믿는 신앙하고 나머지 비는 행위와 결정적 차이점이 뭔 줄 아십니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인격자시고 우리가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분이시고 나머지는 인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하나님을 해처럼, 달처럼, 나무처럼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정말 답답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인격자이심을 깨닫는 사건이 경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너무나 구체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그들이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여러분 화물을 바다에 버리는 것은 극도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풍랑을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선원들의 특징입니다.
빈 둥지 신드룸
2. 자, 하나님을 모르는 사공들의 모습이 이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요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3절에도 그러나 요나는 이라고 시작하는데 5절에서도 그러나 요나는 동일한 말로 시작합니다. 욘1:5절 하반절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성경에 잠은 평안의 상장으로 등장합니다.
시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막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요나의 잠자는 모습은 위장평안입니다. 가짜 평안입니다. 겉보기에는 너무나 고요하고 이 광풍에 세상과는 상관없는 자기만의 평안으로 잠에 빠져 있는 것 같지마는 이 평안은 가짜입니다. 이 요나의 잠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책임회피를 말하는 것이요, 이 요나의 잠은 폭풍을 만난 이 세상에 대한 현실도피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수많은 크리스천 가운데 요나처럼 위장된 가짜 평안의 삶을 사는 자들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겉으로는 굉장히 평안 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평안이 가짜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가짜평안으로 위장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일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지만 요나와 같이 내면이 깊이 잠든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조용하게 예배드리는 분은 두 종류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기질이, 성격이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요란한 것 싫어해서 조용한 분이 있고, 또 한 부류는 위장평화 부류라는 겁니다. 문제가 많은데 내면적으로는 전체적으로 대 수술이 필요한데 안 그런척하고, 아무런 상처가 없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위장한다는 부류입니다. 저는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이러한 위장 평화가 따 깨뜨려지길 바랍니다. 다 깨드려져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치유되고 회복되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공들이나, 하나님을 안다고 한 요나가
똑 같이 만난 것이 무엇입니까? 풍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해 자기들의 방법을 동원해 풍랑을 이겨보려는 사공들 앞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의 모습은 뭔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 배에 타고 있던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 아닙니까? 당대 선지자인 요나가 지금 풍랑 앞에서 고작하고 있는 것이 배 밑층에 내려 가 자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무기력한 모습입니까? 이 모습이 우리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울을 보세요. 유라굴로라는 광풍 앞에서 행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얼마나 담대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해 자기들의 방법을 동원해 풍랑을 이겨보려는 사공들이나,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무기력한 요나나 결과가 어떻습니까? 똑 같습니다.
3. 선지자 요나의 더 비참함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선지자가 된 요나가 세상 사람으로 상징되는 선장에게 질책을 당하는 겁니다.
욘1: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기가 막힌 장면 아닙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사람인 선장이 당대의 대표적인 하나님의 종, 선지자라고 하는 요나를 질책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지금 한국사회안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교회를 꾸짖습니까? 얼마나 교회를 질책합니까? 너희들 지금 제정신이냐? 예수쟁이 너희들 정신 차려야 돼, 너희들 그래서는 안 돼,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라고 교회를 세우셨는데 거꾸로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불신자를 걱정해야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믿는다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이 말이 하나님이 요나에게 주시는 말씀 같은데 자세히 보면 세상 사람이 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픈 겁니다.
4. 욘1: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이 요나의 수치는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요나의 수치는 한 마디로 궤도이탈, 탈선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 명하시는데 요나는 다시로 갑니다. 하나님은 동쪽으로 가라 명하시는데 요나는 정반대 방향인 서쪽으로 갑니다. 하나님은 육지를 말씀하시는데 요나는 바다로 갑니다. 하나님은 추적하고 요나는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니 세상 사람들 앞에서 지적을 받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더라는 겁니다. 이거 얼마나 비참합니까? 요나가 2절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드라면 세상 선장에게 이런 수치를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삶 속에서 오늘의 교훈이 삶속에 뼈에 세겨 지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도 지적 받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군다나 세상 사람들에게 세상 선장에게서 책방 듣고 직적 받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지적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지침을 받아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위기를 만난 요나의 두 가지 문제가 무엇입니까?
1) 풍랑 앞에 무기력한 모습
2) 세상 사람들에게 지적 받는 초라한 모습
이게 우리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설교의 핵심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이런 무기력하고 문제가 많은 요나를 포기하지 못하시는 하나님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무기력한 요나만 가지고 끝내면 이건 설교도 아닙니다. 이런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요나,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 시라면 이런 요나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갈아치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말 잘 듣는 요 너를 세우는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하십니까? 그런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요나를 추적합니다. 그래서 요나서는 요나가 주인공이 아니고, 이러한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우리가 요나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4절을 자세을 보면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를 파선시킬 수 있었지만, ‘거의’ 깨어질 정도에서 그쳤습니다. 이것이 요나를 포기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태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이 남겨 둔 이 ‘거의’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면 그 풍랑은 훨씬 더 견디기 쉬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풍랑을 일으키시고, 제비뽑기에 걸리게 하시고, 큰 물고기를 준비하시고 이 모든 것이 요나를 포기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이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보면 하나님은 참 피곤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까짓 요나 같은 거 이렇게 부실한 인간, 세상 사람에게 욕이나 먹고 사는 인간 저 놈은 안되겠다 라고 다른 사람 딱 찝어서 니가 니느웨로 가라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느냐 말입니다.
또 한 장면 피곤하게 사시는 장면이 있는데 출4:1-16절, 길지만 의도적으로 다 읽어드립니다.
출4: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4: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4: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4: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4: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4: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보세요, 하나님이 왜 이렇게 피곤하게 복잡하게 사십니까? 그냥 못하겠다면 치워버리고 아론 시키면 되잖아요. 제가 여기서 깨달은 은혜가 뭔 줄 아십니까?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겁니다.
세상은 우리를 기능으로 대합니다. 그래서 시원찮으면 언제든지 교체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기능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관계로 대하십니다. 고아로 대하지 않으시고 자녀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헷세드의 사랑입니다.
오늘 요나와 같이 풍랑가운데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래서 두렵고 낙심되십니까? 낙심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 풍랑은 다름 아닌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 풍랑이 몰아쳤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관심의 표시입니다. 물고기가, 힘든 환경이 당신을 삼키셨습니까? 그 안에서 감사하시고, 그 안에서 찬양하십시오.
왜입니까? 요나가 풍랑을 만나고, 제비뽑기에 걸리고,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배속에까지 들어간 이 모든 것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보니 풍랑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쩌다 보니 제비뽑기에서 걸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일들의 배후에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일들의 배후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삶을 살지 않고 불순종의 길 다시스로 떠나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찾아오셔서 환경을 통해,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설득하시고 우리를 권면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피곤한 사랑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도망합니다. 불순종합니다. 반대방향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이해하십니다.
상처받은 마음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그의 작은 머리 약한 믿음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그러나 하나님은 내치지 않으십니다.
다른 선지자를 세우시지 않습니다.
사랑의 손길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순종을 배우는 고난 가운데 허덕일 때 주님은 그를 꼭 붙잡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에게 요나는 너무나 소중한 자녀입니다.
쉽지 않았던 내 인생길 이제껏 나를 늘 이해하시고 위로하시고 무엇보다도 끝까지 놓지 않아주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요나를 포기할 수 없으셨던 그 하나님의 그 피곤한 그 사랑이 알고 봤더니 저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오래 기다려 주시고, 자격도 없고, 끝없이 못하겠다고 뻐티고 배 밑 바닥까지 내려갔던 우리 인생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니느웨를 구원시키는 이 일도 중요하지만사역자로 부른 너를 포기할 수 없는 내 마음도 이해해 달라며 달려가신 그 주님의 심정, 그 심정을 우리가 알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시간 회복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어요.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에요. 이 찬양 같이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나를 안으시고 바라보시는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나를 도우시고 힘주시는 아버지
저는 오늘 우리가 세상에서 기능적으로 대하므로 상처받은 사람들, 넌 그것도 못해, 너는 왜 이렇게 살아, 심지어는 가족들조차도 부모님조차도, 너 왜 이 모양이야? 너 그래가지고 되겠어, 너 왜 이렇게 살아, 너 왜 이것밖에 안 돼, 이런 상한 마음들이 주님 앞에서 다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한 없이 피곤하신데 인간을 설득 하는게 이게 얼마나 피곤하신데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이 찬양에 녹아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헤아리기를 바랍니다.
'성경권별설교 > 요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강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욘1:1-3) (0) | 2018.10.30 |
---|---|
05.위기를 만났을 때(욘2:1-10) (0) | 2016.12.30 |
03.요나의 그러나, 하나님의 그러나 (욘 1:1-4) (0) | 2016.12.06 |
02.요나의 불순종의 원인 (욘 1;1-3) (0) | 2016.12.06 |
01.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축복 (욘 1:1-3) (0) | 2016.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