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축복
요나1:1-3
신앙의 본질
새물결 선교회를 접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들은 말 중 하나가 ‘신앙의 본질’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본질이란? 신앙이 신앙되도록 하는 고유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신앙의 본질이 뭐냐?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라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성경에서 신앙의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부분 중 하나가 요10장으로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이처럼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하나님과 친밀함의 토대위에 하나님의 행하심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의 토대위에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하나님의 행하심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 :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앙의 본질에 서 있습니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제 신앙의 본질에 서있는가 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있는가, 없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을 사도바울은 롬6: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있으면 그동안 죄에 대하여 반응하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내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있으면 그 증거가 뭐냐?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달달 외운다 하더라도, 성경공부를 가르친다 해도 그 사람이 실제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신앙의 본질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왜 말씀에 반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래야 구원을 얻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생활이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어떻게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다면 이 사실을 정말 믿는다면 그 증거가 뭐냐?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는 생활, 즉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생활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 뜻이 무엇인가?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살전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는 삶을 통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들을 주께로 돌이키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삶, 즉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기 위함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요나를 하나님의 일로 부르셨고, 여러분들을 또한 부르셨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욘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우리가 요나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불순종한 요나, 무기력한 요나, 이런 요나의 모습이 가장 먼저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러데 여러분 요나서는 형편없이 무기력하고, 불순종한 요나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요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 요나서입니다. 그래서 요나서의 주인공은 요나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선지자 요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온 천지를 주관하신 하나님, 그 광대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우리 같은 인생들에게 찾아오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중요한 것은 그 말씀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때로 기도사역을 받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사역을 받는 것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앞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말씀 앞에, 내가 그런 사람이구나! 자각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때로는 말씀 앞에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순종의 반응을 해야 합니다. 수년을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 앞에 자각하지 않고,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많은 말씀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를 성도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반응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암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여기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은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 앞에 자각이 없는 기갈이란 말입니다. 이거 오늘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말씀은 홍수처럼 넘쳐 나는데 그 말씀 앞에 자각이 없는 것이 문제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인생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사람들, 그래서 그 말씀 앞에 아! 내가 그런 사람이구나! 자각하고, 애통 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인생과, 다른 한 종류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인생입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타락한 시대가 바로 사사시대인데 성경은 그 사사시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 삶의 기준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삽니까?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멋대로 산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타락이라면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요? 교회가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 문제인가요? 물론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 문제고 그 말씀 앞에 내가 반응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니 자기 멋대로 사는 겁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마치 대형마트에 시식코너에서 맛보는 거와 같은 자세인 것 아세요? 인터넷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으니 이 목사님 설교는 이렇고 저 목사님 설교는 이렇게 시식하고 평가는 잘 하면서 진작 본인은 그 말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수 없이 많은 설교를 듣지만 그 말씀이 실제 내 삶에 조금도 영향을 마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오늘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내가 정말 힘들 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칩니까? 내가 답답할 때, 내가 낙심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내가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혹시 말하고 싶은 대로 다 말하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다 행동하고, 성질내고 싶은 대로 다 성질내고 분을 내야 직성이 풀리지 말씀이 내 행동을 생각을 통제하는 삶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 우리 모습은 아닌가요?
뿐만 아니라 노아같이 내가 세상을 물로 심판하려고 하니 너는 방주를 준비하라, 아브라함 같이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기를 원한다. 그러니 너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말씀하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였듯이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그렇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순종 : 말씀을 따라갔고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베드로의 순종 : 말씀에 의지하여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아브라함이나, 베드로가 순종할 수 없는 이유를 대 보라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들은 환경을 보고, 상황을 보고 경험에 의지하여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순종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그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무엇을 기도합니까?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인생이 되게 해주세요.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며 자각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인생이 되게 해주세요.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인생 되게 해주세요. 오늘 예배를 통하여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그 말씀이 들려지고 그 말씀 앞에 내 자신을 비춰보고 자각하고 회개하고 돌이키고 믿음으로 반응한다면 그 예배는 성공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성도라면 신아의 본질 가운데 서 있다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이고 그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맞춤형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는 이런 음성을 들었어, 너무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각자에게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라 그분이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며 그분께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데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욘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세 단어로 정리가 되는데 1)일어나라 2)가라 3)외치라, 이것은 요나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꾸 새로운 감동만 받으려 하지 말고 이미 주신 말씀에 귀를 기우릴 필요가 있습니다.
1. “너는 일어나”
첫 번째로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일어나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은 2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결단하라는 뜻입니다.
무기력한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실패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라는 겁니다. 해도 안 되더라는 그 부정적인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성경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 죽을 고생을 하다 탕자가 회복하는 그 회복의 과정을 보면 참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회복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가 무엇이었나 하면 현실에 대한 자각입니다.
눅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현실에 대한 자각입니다. 돼지가 먹는 지엄 열매를 먹고 겨우 연명하는 자기 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자각이 회복의 첫 번째 단계라는 겁니다. 여러분 회복에 대한 첫 번째 열쇄는 우리 자신의 초라함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미 없이 살라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인생이 아닌데.. 이렇게 날마다 싸우라고 허락하신 것이 가정이 아닌데..이렇게 무기력하라고 세우신 것이 교회가 아닌데... 현실에 대한 자각이에요. 이거 결코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예배시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이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신앙생활이 맹숭맹숭한 것을 정상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자가해야 합니다. 자각, 이것 뭔가 병들었다, 이것 뭔가 심각하다, 이거 방치해선 안 되겠다. 자각하는 겁니다.
자각을 하고 나니 그 자각을 바탕으로 마음에 결심이 일어납니다. 눅15:18절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한국성도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인가하면 여기 탕자에 나오는 두 번째 단계까지밖에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탕자가 먼저 자각을 했어요, 이거 내가 뭐하는 짓이냐,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그리고 돌아가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여러분 이것 아세요, 탕자에게 1단계 현실에 대한 자각을 하고 2단계 애통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였지만 여기까지는 탕자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단계가 무엇입니까? 눅15: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까지 예배시간마다 눈물 흘리고 나 이렇게 살면 안 돼, 아버지께 돌아가야지, 돌아 가야데, 나 이 죄 된 생활 청산해야지.. 결심하지만 “이에 일어나” “이에 일어나” 이 20절이 없다면 진정한 회복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둘째 아들에게 귀한 모습은 그가 자각을 했고, 마음으로 결심을 한 것을 현실에서 실천한 것 이것이 귀한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에게 주시는 일어나라는 의미입니다. 자각하는 자리에 머물지 말고, 결심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이에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설교를 듣고 2단계 까지는 그래도 갑니다. 그런데 3단계로 가지를 못해요. 말씀을 듣고 순종의 자리까지 가지를 못하니 그러나 항상 제자리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이고 이 세상이 죄악이 관영하구나 자각을 하고 그래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지어야지 결심했지만 여기서 멈추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탕자와 같이 이에 일어나, 방주를 지어야 그 방주가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일어나라는 말씀은 사명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를 향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명은 요나 같은 특정한 인물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이 사명은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사명입니다. 아니 이미 주신 사명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렇면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요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내게 사명을 주세요, 사명 주세요가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을 보세요. 바울은 그가 쓴 편지 서두에 항상 이 사명 의식을 이야기합니다. 롬1:1절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확신.. 바울은 어떤 곳에 가서든지, 무엇을 하던지,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택정함을 입었다 이 확신이 바울을 그 숱한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을 견디게 한 원동력이 되더라는 겁니다. 늘 실패의 자리에서 자신을 한탄하며 주저 앉아있는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사람이 아니야 나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어, 결단하고 “이에 일어나” 사명을 다시금 자각하는 은혜의 자리로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2. 두 번째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교회의 두 균형이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오늘 문제가 무엇입니까?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을 강조하다보니, 동시에 보냄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명이 약해진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두 균형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가 파선합니다.
작년 4월 16일 세월호,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 중, 중요한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배에 더 많은 화물을 싣기 위해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를 많이 버린 것입니다. 평형수가 없으니 배가 기울여졌다 다니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과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명이 균형을 잘 이루어져야지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파선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교회뿐 아니라 여러분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오늘 요나에게 주신 말씀 “너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교회 안에서만 모여 있지 말고, 교회 안에서만 희희낙락거리지 말고, 저 악독한 성읍, 저 큰 성읍(사람이 많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을 향해 나아가라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말씀하시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요나가 좋아한 곳은 다시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신 곳은 니느웨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오늘 가기를 원하시는 여러분의 니느웨는 어디입니까? 니느웨는 내 마음이 내키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내가 반드시 가야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커다란 관심을 쏟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뜻을 죽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수락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악을 미워하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입니다. 나의 심혈을 다 기울여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야 하는 곳입니다. 니느웨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이 성취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니느웨에서는 나의 육신에 속한 나의 소중한 모든 것들이 망각되어야합니다. 나의 인기, 출세, 체면, 철학, 나의 신학들이 모두 붕괴되는 곳입니다.
니느웨는 악독이 가득한 곳입니다.
니느웨는 큰 성읍입니다. 최상급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큰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그 니느웨는 큰 성읍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영혼들이 다른 사람들의 니느웨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혹 적게 보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언제나 큰 성읍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기에 그곳을 향해 일어나 달려가는 여러분 되 시길 축복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뒷받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외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에 대해서 오해하는데 주로 우리는 성령 충만하면 무슨 이상한 현상을 생각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신비로운 것을 경험하고, 놀라운 사건을 맞보고, 병이 떠나가고, 이적이 경험되고, 혀가 꼬부라지고 뭐 이런 현상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 충만하면 이런 저런 신비로운 현상도 경험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가장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성령 충만하면 닫혔던 입이 열려진다는 사실입니다.
행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랬더니 즉각 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성령 충만을 경험하지 마자, 성령이 강림하자마자, 성령 충만을 경험한 모든 사람에게서 즉각적으로 나타난 것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입을 열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 내용인데, 무슨 말을 하게 하셨나? 성령 충만해서 입이 열렸는데 무슨 말을 하는가 보니까? 행2:9-11절입니다.
행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성령 충만하니 가장 먼저, 가장 본질적인 변화가 닫혔던 입이 열려지는 겁니다. 닫혔던 입이 열려지는데 그 입에서 나오는 내용이 뭡니까? 만날 비방하고, 부정적인 말이 쏟아지고, 맨날 당신 탓이라고 책임 증가하고 이럴 때 쓰여 지는 입술이 변해서, 하나님의 큰일 행함을 말하는 입술로 바뀌어 졌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받았던 그 은혜를 말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성령 충만 하니 무기력하기 짝이 없던 제자들에게서 어떤 능력이 나타납니까?
행4: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4: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오해를 해가지고 뭐 환상을 보았다, 꿈을 꿨다하면서 입에서는 그런섯도 못하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이런 것은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게서 100%로 공통적으로 나타나야 되는 것은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큰일, 하나님이 내게 행하셨던 일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는 말을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말에 목숨 걸지는 않습니까? 별 도움도 되지 않는 말에 시간투자하고, 에너지를 쏟고 있지는 않으세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 충만 하니 입술이 성령의 통제를 받기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내가 방언을 하고, 방언통역을 하고, 환상을 보고 병이 떠나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해도 입술이 성령의 통제를 받아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지 않는다면 엉터리 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의 입술이 성령의 통제를 받고 하나님의 큰일을 전하는 입술로 변화되더라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입술이 성령의 통제를 받아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입술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의 설교를 녹여놓은 찬양 함께 부를 때에 하늘 문이 열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은혜를 주옵소서. 그 말씀 앞에 자각하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 앞에 주저앉아 나는 안 돼, 나는 할 수 없어, 우리 가정은 이미 끝났어, 우리 내면에 꽉 차있었던 부정적인 생각들, 열등감이 치유되고 일어나게 하시고, 가게 하시고, 우리의 입이 열려 하나님의 큰 일 행하심을 말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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