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요나의 불순종의 원인
욘1:1-3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과 친밀함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일로 우리를 초정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알기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일을 이루십니다. 그 결과 열방 가운데 하나님을 알게 하셔서 그들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일로 요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본질에는 세 영역이 있습니다. ①하나님과 친밀함의 영역 ②의식의 영역 ③삶의 영역입니다. 이 의식의 영역을 통해 친밀함에서 자라나게 되고 친밀함의 토대에서 삶의 영역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처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 영역의 토대위에 서 있다면 그 증거가 뭐냐? 말씀에 반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한 마디로 불순종으로 반응합니다.
그냥 불순종이 아니라 3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두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을 보면 이 말은 요나가 순종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못해서, 환경이 힘들고 어려워서, 바빠서 순종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요나가 불순종한 것은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노골적으로 불순종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묵상하다가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 겁니다. 하나는 지금 이 요나가 누구입니까? 당대 선지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종 아닙니까? 왕에게 조언을 하고 예언을 할 정도로 영향력을 미치는 그 시대 대표적인 하나님의 종이요, 선지자인 이런 요나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이게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무엇이 요나로 하여금 불순종하게 만들었을까요?
1. 요나가 불순종한 첫 번째 이유는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에 대한 상처가 있듯이 요나는 앗수르에 대한 마음의 상처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앗수르의 수도가 니느웨인데 북쪽 이스라엘이 무자비한 앗수르에 의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결국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BC722년에 처참하게 멸망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소 4마리에 사지를 묶어서 찢어 죽이기도 하고, 우리에 포로들을 가둬두고 창과 칼로 푹푹 찌르며 그렇게 고통을 겪다 죽게 하고, 왕의 목을 잘라 아들에 목에 걸고 거리를 다니게 함으로 씻을 수 없는 수치를 당하게 하는 민족 앗수르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볼 때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에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생겨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들 아닙니까? 그래서 생겨난 지역감정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까지 계속된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니느웨이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앗수르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앗수르의 심장부인 니느웨를 구원시키라고 하니까, 요나가 용납할 수 없는 겁니다. 요나가 판단하기에 니느웨는 은혜를 베풀 이유가 하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치유되지 못한 상처의 위험이 뭔 줄 아십니까?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드는 고리를 만든다는 겁니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결국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고리를 만들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주위에 하나님의 비전 앞에 순종하지 못한 이유가 겉으로 보기에는 이런 저란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치유되지 못한 내면의 상처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드는 결정적 고리가 되더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순종의 사람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예배를 통하여 사람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에게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합니다. 용서가 강물처럼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왜 그것이 필요합니까? 그래야 내가 잘되니까? 그래야 문제 해결이 되니까? 그래야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으니까? 아닙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순종 하는 사람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습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남편, 아내, 자녀, 부모성도) 아닌가요? 예) 내 심장 / 만나지 말았어야할 사람, 바퀴벌레
그런데 이 상처가 원망이 결국 누구에게 가느냐하면 하나님께로 가는 것 아세요? 하나님이 내 기도 안 들어 주셔서, 하나님이 내 남편, 자녀 변화 시켜주지 않아서, 하나님이 이 문제 해결해 주지 않아서...이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위험이 뭐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상처치유? 핵심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토대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토대해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가장 옳은 길로, 최선의 길로, 완전한 길, 선하 길로 인도 하신다는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왜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게 하셨는가? 왜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하셨는가?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는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지금의 나의 아픔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여기서부터 과거의 상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옳아요”라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요나의 불순종의 원인은 치유되지 못한 내면의 상처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되지 못한 상처의 위험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고리를 만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내면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 할 수 있습니까? 핵심은 과거의 상처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요나와 같이 치유되지 못한 내면의 상처로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자꾸 불순종의 자리로 도망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 환경으로 돌아가셔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토대로 그 때 그 사건을 재해석하시기 바랍니다. 요셉
2. 요나가 불순종한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으로 반응하였던 이유는 요나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 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것입니다. 요나는 앗수르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심판을 면한다면, 그에 대한 영향은 곧바로 이스라엘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몇 차례 앗수르에게 위협을 받았고, 예후가 통치하던 BC841년에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쳤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당시만 해도 니느웨의 멸망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나는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었고 자기 민족의 아픔은 알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몰랐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이 내 삶에 실제 작동되어야 가능합니다.
엘리야를 보세요.
왕상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엘리야는 민족을 사랑하지 않아서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나요? 비가 안 오면 엘리야는 고통을 안 당하나요? 예외 없이 엘리야도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누구보다 민족을 사랑했지만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기에 비가오지 않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요나가 불순종의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그가 ㅊ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몰랐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어요.
눅15장에 나오는 탕자를 보십시오. 많은 신학자들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 품을 떠난 집 밖의 탕자라면, 큰 아들은 집안의 탕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탕자라 불릴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집안에 있으면서 아버지 속을 썩이고, 아버지 말씀을 거역한 것도 아니에요. 눅15:29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그런데 왜 큰 아들이 탕자로 불리게 되었을까요? 왠 줄 아세요? 그것은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큰 아들, 자기 동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에게 한 말이 뭐입니까? 눅15: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아들의 말이 다 맞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모른 것이 하나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몰랐어요. 아버지의 마음을....
요나는 그의 내면에 앗수르에 대한 상처만 알았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니느웨에 죽어가는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몰랐던 겁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데...
여러분 우리는 둘째 아들과 같이 아버지를 떠나 세상으로 간 것도 아니고, 큰 아들처럼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이러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신 분계신가요?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는가? 아버지 마음을 모른다면 아마 우리는 큰 아들처럼 집안에 있는 탕자는 아닐까요?
여러분 성경에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안사람 가운데 한사람이 바로 한나입니다. 한나가 불임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기도하는데, 엘리는 한나가 취한 줄 알고 포도주를 끊어라 합니다. 이때 한나가 한말이 무엇입니까?
삼상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여기 ‘심정을 통했다’ 이 말은 ‘내가 니 마음을 알고 니가 네 마음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한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이 한나의 마음을 알았다는 겁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들을 주시면 여호와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되세요? 아니 언제는 아들 달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처넣고 이제 와서는 아들을 하님께 바치겠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이 무엇을 찾고 계시는데, 어떤 한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 마음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한나가 자기의 불임을 고통해서 아이 없는 아픔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을까요? 나 같은 비천한 여자도 아이가 없으니 이렇게 슬프고 비참한데 그런데 하나님은 이 깜깜한 시대에 하나님의 마음을 대언할 하나님의 사람이 없었구나, 그 마음을 안거에요. 그래서 하나님! 알았습니다. 그 아들을 내게 주세요. 내가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 하나님의 마음을 그냥 부족함이 없는데서 보여주질 않습니다. 늘 눈물짓고 지지리 군상이고 고통스러운 어떤 처절한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세요. 한나야, 너 아이가 없어서 아프지 내 마음도 그렇단다, 처음엔 자기고통, 자기영적인 문제를 놓고 부르짖다가 그렇군요!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하고 똑 같았군요. 여기서 한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안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진짜 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세요? 바로 하나님의 심정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았다, 은혜 받았다 하는데 뭐가 은혜 받은 것이 뭡니까?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겁니다.
오늘 교회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와 천대와 조롱거리로 되어버리고, 가정은 깨어져 붕괴되고, 우리의 자녀들은 것 잡을 수 없이 혼돈에 빠져있으며, 이 땅 가운데 의지할 데가 없는 고아가 되어버린 하나님을 버린 인생들의 비참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은 아직도 탄식하고 계세요.
누가 이 혼돈의 시대에, 누가 하나님을 죽여 버린 저 인생들 앞에 복음 들고 갈 것인가,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우리 이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마음을 회복시켜주세요.
3. 요나가 불순종한 세 번째 이유는 대가지불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지불을 각오해야 합니다. 바보가 되기를 각오해야 합니다. ‘영광은 하나님이 멸시와 천대는 내가 받겠다는’ 이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세를 보세요.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우리가 살펴보았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히11장 믿음의 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한 결 같이 대가지불을 각오하였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대가가 죽음이었고, 때로는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포기한 것이었으며, 이 땅에서의 평안과 안전한 삶을 기꺼이 버리는 것이며, 이 땅에서 바보 소리를 들으며, 비난과 핍박과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히11: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4. 요나가 불순종한 네 번째 이유는 요나의 부정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요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더라는 겁니다. 아니 그 강대국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갖추어가지고 교만이 머리끝까지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나 같이 보잘것없는 유대나라 사람이 가서 너희들 회개하라고 할 때 누가 말을 듣겠느냐는 겁니다.
나 같은 게 가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거예요. 지금 말로하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겁니다. 아니 회개는 고사하고 도리어 요나의 생명이 위태로울 거예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요나의 생각이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논리가 여러분의 생각이 내려지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상식이 하나님 앞에서 내려지길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내 논리는 자꾸 사라지고 하나님의 논리로 채워지면 용기가 생깁니다. 담대함이 생깁니다.
모세 홍해 앞에서, 적이 코 앞가지 추격해 왔는데, 앞은 홍해 이러한 상황에서 출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수아, 요단강 앞에서 내 논리로 바라보면 절망입니다. 그러나 내 논리를 내리고 하나님이 논리로 채워지면 담대함이 생겨요. 용기가 생겨요.
수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3: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보세요! 얼마나 담대합니까.
바울과 신라 행16: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16:28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16: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행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이 얼마나 복음에 대한 자신감 입니까!
이 담대함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부산에서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기다 포도나무교회로 올라올 때, 제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거의 다 말렸습니다. 너 어떡하려고 그러냐고.. 제발 정신 차리라고....우리의 논리를 내리면 도전정신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도, 담해함이 생깁니다. 그 도전정신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무댓보의 도전은 위험함. 이 하나님의 응답, 사인이 있을 때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예” 라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내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예‘라고 반응하지 못한 다면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내 내면의 자리 잡고 있는 상처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그 마음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내 까짓것이 뭘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부정적 생각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이 치유되고 회복 될 수 있을까요?
언제 하나님의 말씀에 “예”리고 온전히 반응하는 삶이 능할까요?
“하늘 문이 열리면” 하늘 문이 열려야 합니다.
마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눅22: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22: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찬양 드리고 함께 기도합니다.
1. 이 시간,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 가운데 임하여 우리의 상처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2.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은혜를 주오소서,
3. 나 같은 게 뭘 할 수 있겠나 는 내 논리, 내 생각, 내 경험이 하나님의 앞에 내려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발을 내 딛는, 그래서 하나님의 큰 일 행하심을 선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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