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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하나님 음성듣는 것

제17강 자기소리를 분별하는 것

by 오용주목사 2016. 9. 16.

17강 자기소리를 분별하는 것

 

 

1:13-16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살펴보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세 단계가 있습니다.

계시의 단계 해석의 단계 적용의 단계입니다.

계시의 단계에서는 배후에 있는 근원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배후의 근원은 세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 사단 자기소리입니다.

사단의 음성이 때 어떤 특징이 있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때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자기 영의 소리 자기 내면의 소리 자기 육신이 소리를 어떠할 때 듣게 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자기 소리를 들을 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번민과 갈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는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확신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깊은 우리 영에서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열정이 확신과 함께 불탑니다. 평안이 있고 안식이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소리를 들으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안그런 것 같기도 하고 번민이 있고 갈등이 있고 혼란이 있습니다. 때로는 여러 종류의 욕심이 있습니다.

자기 소리를 듣게 되는 가장 주된 요인은 두 마음입니다.

우리가 두 마음을 품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보다 자기 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두 마음을 품게 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두 마음을 품게 하는 요소들을 살펴보면서 자기 소리를 듣지 않고 자기 육신의 소리를 듣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두 마음을 품게 하는 요소는 의심입니다.

 

1:6-9절입니다.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두 마음을 품게 하는 요소 중 하나가 의심입니다. 우리 속에 의심이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기 소리를 듣기가 쉽습니다.

의심은 환경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나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번에 환경에 대해서 나눈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이니까 한 번 더 나누겠습니다.

제가 직장에 다닐 때 이 성경구절이 떠올랐어요.

예수님이 여행을 하시다가 시장해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했으나 없어서 저주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저주한 무화과가 말라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놀라서 선생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다고 하자 그것을 계기로 주님이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11장에도 마21장에도 나옵니다.

11장만 보아도 성경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23-24절입니다.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제자 직장을 다니는데 이 말씀이 생각났어요. 그리고 어떤 것으로 연결되느냐면 그때 직장이 남산 근처였어요. 광화문이었어요.

이 말은 내가 남산을 향해서 남산에게 명하노니 남산은 들려 한강으로 떨어져라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아무리 남산을 바라보고 저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해서 바다에 던지우라 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나.

의심을 안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의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내가 집에 가서 성경구절을 찾아보았어요.

성경을 찾아보았더니 해답이 거기에 있더라고요.

해답이 바로 앞 절에 있었어요. 22절입니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이 구절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의 눈이 산에 있는 한 산은 환경을 말합니다. 환경에 있는 한 절대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눈을 환경에서 떼어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이해하게 되었어요.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능히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산이 있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개발계획을 통해서 산을 깎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붕 떠서 가지 않을지라도 순식간에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은 능히 산이라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는 믿음이 생기는데 우리가 환경을 보면 절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이 환경에 있으면 곧바로 나타나는 것이 의심입니다.

의심이 우리 속에 있으면 두 마음을 갖게 되고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못듣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교회의 비전 프로젝트나 개인의 일이나 교회의 일이나 이런 부분을 놓고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저는 이렇게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가 이것을 내가 할 수 있는가 내 상황에서 가능한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가능한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하는데 집중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능히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내 처지 내 입장 내 자원 내가 할 있는 부분에 있으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듣는다 해도 어떻게 그것을 이룰 수 있는가 하며 번민과 갈등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환경에서 눈을 떼어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경에 말씀하신 그대로의 하나님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아까지 않고 우리를 사랑해서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사랑이신 그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최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능히 그분의 자원과 능력으로 이루실 수 잇는 분임을 신뢰하고 그분은 전지하신 분이기 때문에 실수가 없으신 온전하신 것인 것을 신뢰하고 그분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신뢰하고 그분을 바라보고 나가야 믿음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2.두 마음을 품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탐심입니다.

 

의심이 환경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것이라면 탐심은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속에 탐심이 있으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탐심이 우리 눈을 어둡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서 가리우기 때문입니다.

 

성경 몇 구절을 봅시다,

6:22-24절입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탐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지 못한 전형적인 예가 광야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끄집어 내는 데는 하루가 걸렸습니다.

광야생활을 통해서 그들 속에서 애굽을 끄집어 내려고 했는데 40년이 걸려도 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속에는 항상 애굽이 있었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홍해 앞에 섰을 때 그들이 외치는 내용을 보십시오.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리로 인도하였느냐?

먹을 것이 없을 때 그들이 뭐라고 외칩니까?

차라리 애굽에서 죽었던 것이 낫겠다. 그들은 애굽에서 먹던 떡반죽 그릇을 그리워했고 애굽에서 먹던 과일을 그리워했습니다. 고기를 그리워했어요.

애굽에서 섬기던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면서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우상숭배까지 했습니다.

그들 속에는 항상 애굽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잘 말해주는 구절이 시편106편입니다.

시편106:9절부터 읽겠습니다.

“9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10 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11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 12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13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14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15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

여기보면 잘되어갈 때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경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욕심을 크게 발하며 라고 말합니다. 그들 속에는 세상에 대한 집착 탐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욕심을 크게 발했다고 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욕심을 크게 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큰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왔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위기에서 건져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원했습니다.

잔치상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기를 못먹어서 고기를 원했고 물이 없어서 마실 물을 원했어요.

그런데 성경은 저들이 욕심을 크게 발하여라고 말합니다.

오늘날처럼 하나님 로또가 되어서 20억을 벌게 해주세요하고 원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여기 욕심을 발했다는 말은 그 중심에서 세상사랑이 전혀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탐심이 전혀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이 전혀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애굽이 그들 속에 항상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홍해 앞에 왔습니다.

그들은 홍해 앞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더라면 애굽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싸우시고 그들을 위해 역사하신 놀라운 역사들을 보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기들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야훼의 하나님임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섰다면 하나님이 왜 그들을 그리고 인도하셨을까 거기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면서 이런 것을 찾으면서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섰을 텐데.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을 그리로 인도하신 목적과 의도를 알리시고 그들이 믿음으로 신뢰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셔서 하나님의 그 시대를 향하신 목적을 위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셨을 텐데 그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관점이 안보였는가? 세상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탐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세상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이 안 보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리로 인도하시는지 그곳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뭘 기대하시는지 어떤 자세로 주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인지가 안 보이지요.

탐심이 내려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들을 수 없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요 일만 악의 뿌리하고 했습니다.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그러면 탐심은 어떻게 이길 것인가?

탐심을 이기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6:1-4절을 이렇게 말합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6:14절입니다.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우리도 같이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옛사람을 죽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안 죽어서 고민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이미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죽은 것으로 간주하라고 합니다.

3장에서 바울은 육신을 언급한 다음에 배설물로 여겼다 해로 여겼다고 합니다.

손실로 떨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사업하는 분들이 전에는 많은 이득을 얻었는데 금년에는 마이너스가 났어요.

그러면 사업하는 분들은 마이너스 난 것에 집착하면 사업 못합니다. 손해난 것 떨어버립니다.

떨어버려야 살 수 있지요.

성경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기 때문에 떨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놓으면 죽을 것 같아 붙잡고 있으니까 세상사랑이 안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떨어버려야 합니다.

생명의 풍요로움은 소유의 많음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 그해의 소득이 생각보다 많아서 많은 곳간을 짓고 쌓아들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이 말하지요. 오늘밤 네 생명을 취하면 그 모든 것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생명의 소유의 풍부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 간주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떨어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원숭이를 잡을 때 구멍을 파놓고 속에 사과를 넣으면 원숭이가 손을 집어 넣어 사과를 잡은데 사람이 잡으러 가도 사과를 놓기가 싫어서 결국 잡힌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너무나 많은 경우에 세상에 대해서 집착합니다. 성경에서는 죽었다고 하는데 떨어버리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잡고 있는 세상을 놓으면 죽을 것같이 여깁니다.

꼭 원숭이처럼 그런데 붙잡고 있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면 그것보다 더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삶은 없습니다.

생명이 넘치는 삶은 없습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부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 지금의 현재 상태를 돈과 바꾸자고 하면서 부자되게 할 것이니까 현 상태를 바꾸자고 하면 저는 바꾸지 않습니다.

생명의 풍요로움은 부에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예수믿는 자들은 다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이고 하나님나라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뜻과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목적이 되는 삶을 살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어떤 이에게는 부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딤전6:9-10절입니다.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탐심이 내려지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반면에 어떤 이에게는 주님의 나라와 뜻을 위해서 살아도 부를 주십니다.

딤전6:17-19절입니다.

“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그래서 성경에는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떨어버리라고 합니다.

 

둘째는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속에서 탐심이 세상사랑이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표 자기 목적이 전혀 내려지지 않았고 자기 의지와 목적을 따라 살면서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은 주셨을지 모르지만 그 중심에서 세상사랑과 탐심이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하나님이 목적된 삶을 살게 될 때 세상사랑이 다루어집니다.

single focus on God

우리의 초점이 잘 안맞으면 두 개가 됩니다. 두 개가 되면 하나님도 우리의 관심사고 세상도 우리의 관심사이고 하나님도 우리의 관심사이고 돈도 우리의 관심사이고 하나님도 우리의 관심사이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도 관심사이고 이렇게 초점이 두 개가 될 때 가리워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초점이 하나로 하나님께 고정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고 우리가 이땅에 존재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는 것은 그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질 때 그때에 우리 속에서 세상사랑이 다루어집니다.

 

탐심은 두 마음을 갖게 해서 우리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못합니다. 우리 소리를 듣게 합니다,.

 

 

3.개인적인 야망과 독한 시기가 우리로 육신의 소리나 혹은 사단의 소리를 듣게 합니다.

 

여러분 아까 의심은 환경에 대한 집착에서 나옵니다.

탐심은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나옵니다.

개인적인 야망과 시기는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나옵니다.

 

이에 대하여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3:14-15절입니다.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다툼은 이기적인 야망으로 영어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이런 말을 가끔 씁니다. 하나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할 수 있나 지혜롭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니까 손해를 보지.

사람들은 지혜롭게 한다는 말을 하나님의 기준을 적당하게 타협해서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이득을 얻는 것을 지혜라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아닙니다.

이런 지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들으려면 자기 의제가 내려져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분들이 있어요.

하나님 제가 이 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제게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안되면 큰 일 납니다. 이것은 반드시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잊어버리세요. 이미 자기 마음 속에 정해졌는데요.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들어보아야 자기 소리입니다.

이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성경을 모르는 것이지요.

성경은 너희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세우고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생각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세우고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생각과 비교해보면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보다 하늘에 땅에서 높은 것처럼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생각 계획 목적 내려놓고 내 뜻 내 계획 내 의제 내 목적을 발견해서 그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최선이니가요.

하나님의 뜻이 최선입니다.

사실 다음 시간에 혹시 살펴볼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에 있어서 틀린 것과 옳은 것을 분별하기는 쉽습니다. 그런데 두 개 다 옳은 것인데 어느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를 분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로 좋은 것이 최선에 대한 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의제와 내 목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죠지뮬러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주 앞에 갈 때 제일 먼저 한 것은 자기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만 되면 90%는 이미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가장 방해하는 것 그래서 우리 생각을 듣게 하는 것은 내 생각 내 의도 내 목표 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철저하게 내려져야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엘리야의 삶을 본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한 나라의 복지보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더 중요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 3년 반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피해가 크겠어요.

그런데 그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엘리야에게는 소중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았지요. 그러니까 선지자지요.

 

우리가 환경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나오는 의심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나오는 탐심 자기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나오는 시기와 개인적인 야망이 내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기 소리를 듣기 쉽고 사단의 소리를 듣기 쉽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해도 자기 위주로 해석해서 자기 임의대로 해석해서 전혀 엉뚱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결국 미혹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들으려면 이처럼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신뢰함으로 나아가야 하고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께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하고 우리의 의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고 우리 삶에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그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일 뿐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성경에서 약속하신 모든 생명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전환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추구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 쓰임받고 생명이 넘치고 승리가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