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리즈설교/하나님 음성듣는 것

제16강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

by 오용주목사 2016. 9. 16.

16강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

 

 

고후11:2-3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지난 주일부터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단계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계시의 단계, 해석의 단계, 적용의 단계입니다.

이 세 단계는 각각 분별되어야 합니다. 각 단계마다 성령의 조명으로 분별되지 못하면 우리는 자기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고, 심지어 사단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설령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할지라도 잘못 생각해서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서 분별하는 것이 매우 필수적입니다.

지난 주일부터 계시의 단계에서의 분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계시의 단계에서의 분별은 그것이 꿈을 통해서건 환상을 통해서건 어떤 경우를 통해서건 어떤 것이 주어질 때 이것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셋 중에서 하나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둘째는 자기생각에서 셋째는 사단으로부터.

우리는 반드시 분별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단이 말할 때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8가지를 살펴보았는데 그중에 한 가지만 해당되어도 우리는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다 해당되어야 합니다. 다 해당되어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1.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내적으로 그것이 주님의 음성임을 압니다.

 

고전2:12-13절입니다.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십니까? 여러분들 중에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분들은 손들어 보십시오.

어떻게 아십니까?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지요.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뭐하고 또렷하게 설명하기는 없지만 우리 저 깊은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성령이 증거하셔서 우리가 알지요.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압니다.

어떻게 안다고요? 안다니까요.

이것을 내적 공명이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알게 하십니다.

고전2장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저 깊은 곳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압니다.

그것이 한 가지 특징입니다.

 

 

2.하나님의 음성은 우리 영혼에 평안이 넘치게 합니다.

 

14:27절입니다.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특별히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평안이 넘칩니다.

 

 

3.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10:17절입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는 말씀하신 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 속에 생깁니다.

사도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서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났습니다.

사실 바울은 가지 말자고 했지요. 어려움이 닥칠 것이 보여져서 그런데 선장과 선주 백부장 모두가 믿지 않고 가다가 큰 광풍을 만났습니다.

14일 동안 표류하는데 해와 달과 별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바람이 많이 불어도 배의 머리를 바람의 방향으로 맞추어야 배가 견디는데 그것마저도 포기한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짐을 다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에 가라앉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말씀하십니다. 위로하시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하니까.

그러면서 배는 파산되겠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은 한 사람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이 바울에게 믿음을 주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구원의 여망이 전혀 없는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될 줄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 열악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바울에게 믿음을 주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미국에 공부하라고 가라고 하셨는데 환경을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한번도 No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Yes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속에 믿음이 생깁니다. 환경을 보면 믿음이 사라지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다 줍니다.

 

 

4.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비슷한 말씀이지만 우리 속에 열정이 부어집니다. 확신이 부어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많은 제자들은 낙심하고 흩어졌습니다.

열한 제자들은 다락에 숨어서 떨고 있었고 그중에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 동행하셨습니다.

그때 구약성경을 가지고 메시야가 오시며 어떻게 부활하실 것인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신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주막에 들렀을 때 떡을 떼어주실 때에야 그분이 예수님임을 알았지요.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은 그 자리에 더 이상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내려올 때에 같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쳐주었던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24:32절입니다.

“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마음 속에 확신이 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어떤 부분을 말씀하셨는데 그 속에 열정이 솟고 확신이 부어지고 온 마음이 그 일로 쏟아부어질 때.

 

예를 들면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일어났는데 그것이 어제 내 생각이었나 보다 이러면 거의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을 확률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일어났는데 생각만 하면 열정이 솟고 확신이 부어지고 내 마음에 거기에 쏟아지며 소망이 생긴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그것만 생각하면 동일한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십중팔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확신이 부어집니다.

처음 말씀하신 대로 한 가지만 해당된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은 아닙니다. 전체가 종합적으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냥 압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확신을 줍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 마음 속에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5.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성경말씀과 부합합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이야 말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삶과 신앙과 사역의 기준입니다.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최종적인 권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른 여러 방면으로 말씀하셨을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성경과 부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성경에 나와있지 않은 새로운 계시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단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삶 속에.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성경과 반드시 부합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성경구절은 벧후1:17-21절입니다.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지금 읽은 17-18절은 베드로가 한 이야기인데 변화산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부활후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하고 하늘에서 육성이 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똑같이 들을 수 있도록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신 분 있으시면 손들어 보십시오.

하늘에서 육성의 소리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으신 분 있습니까?

한두분 있군요.

자 그러면 보십시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고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본 경험은 대단히 놀라운 경험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언급한 다음에 뭐하고 합니까?

우리가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변화산에 나타났던 엄청난 일과 계시보다 더 확실한 계시가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음성이든지 감동이든지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성경을 적용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가 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체험을 했다 하면 말씀을 잘 안보려고 합니다.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보다 자기가 받은 감동에만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이것은 미혹되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그것은 반드시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주어진 감동이 성경에 나와있는 구절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의미와 내용과 목적이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6.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확인되어야 합니다.

 

고전14:29절입니다.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이것은 물론 예언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선지자들을 분별하라고 했어요. 선지자는 예언자입니다.

7장에서 열매를 보고 분별하라고 합니다.

고전1429절은 예언 그 자체를 분별해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언자로 분별해보아야 하고 예언 그 자체도 분별해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살전5:20-21절입니다.

“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여기도 역시 예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들은 하나님의 음성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조화를 볼 수 있습니다.

예언만 해도.

두 가지 조화가 무엇입니까?

하나는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요한일서 2장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 각자에게 있으니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고 성령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 중에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으면 무엇 때문에 교사가 필요하겠어요.

그러니까 이 두 부분에도 조화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을 올바르게 제시해주고 올바르게 인도해줄 교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에 목회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고린도교회에도 데살로니가교회에도, 장로들이라는 말은 오늘날 목회자들을 말합니다.

교사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무엇이냐? 성령이 우리의 교사라고 했는데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를 가르친다고 했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의 목적을 안다 교사들은 성경의 토대위에서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지만 그 길을 따라 행할 때 그 실제를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성경공부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하고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길을 잘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이론적으로 배웠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길을 배워서 그 길을 따라 순종하면서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가지며 하나님께로부터 그 실제를 배우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일2장에서 말하는 기름부음을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교제가운데서 그 실제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그 부분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정확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올바른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그러니까 교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성령의 기름부음과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실제를 아는 것을 소홀이 하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면서 요한일서 2장의 구절만 강조하면서 교사를 통한 하나님의 길을 제시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는 것을 소홀이 하면 신비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둘 다 양쪽 극단입니다. 둘 다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둘을 다 말합니다. 조화가 필요합니다.

 

예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음성듣는 것 혹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했어요.

? 성경을 통해서 교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길을 제시받지만 그것이 적용되는 것은 성령님의 비추심을 통해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교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길을 제시받는 것에만 머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을 소홀이 하면 우리 신앙이 율법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론이 실제를 대체해 버리는 죽은 정통주의 거짓신앙체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바리새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모든 예언을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의 균형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멸시하지 말아야 하지만 모든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을 확인해보라고 하니까 여기서 들어보고 저기서도 들어보고 똑같은 음성이 주어졌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이 확신되어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확인해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예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1장에 나옵니다.

10장에 보면 하나님이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냅니다. 고넬료의 집에 보낼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세요.

베드로가 기도시간이 되었을 때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때 환상을 보았습니다.

보자기 환상입니다.

구약성경에 의한 먹지 못할 짐승들이 가득한 보자기인데 그때 잡아먹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가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내가 깨끗케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런 것이 세 번씩이나 반복됩니다.

여러분 지금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하시는 일을 보세요.

사실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지금 깨뜨리려고 하십니다. 환상으로 보이시고 음성으로 주시고 그것도 세 차례나 반복합니다.

그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집 문을 두드립니다.

그 순간에 성령께서 그러십니다.

내가 보낸 사람들이니 저들과 같이 가라고 하시지요.

내려와서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더니 천사가 고넬료에게 나타났고 정확하게 베드로가 있는 장소를 달려주고 가서 말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가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처럼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사도중에서도 예수님 가까이 있었던 사도였습니다.

임의대로 간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정확하게 말씀하셨어요.

환상을 보여주셨고 음성을 주셨고 세 차례나 반복했고 고넬료에게 천사가 나타났고 말씀했어요.

가서 전할 때 성령님이 임했고 직접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하나님이 뒷받침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앞에 서서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서 검증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확실하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기가 행한 행동에 대해서 왜? 그 행동은 전통적인 이해에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앞에서 검증받습니다.

그만큼 검증과 분별이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분들이 있어요.

자기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명령조로 말합니다.

당신 말이야 이렇게 해!

분별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감히 누가 시험을 하고 분별을 해!

이렇게 하는 것을 잘못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모든 예언을 반드시 시험해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기에게 주셨다는 하나님의 감동을 시험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 보세요. 사도중에 사도이고 하나님이 이토록 놀랍게 말씀하셨고 뒷받침하셨어도 교회 앞에서 검증을 받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 당시 가지고 있는 작은 이해를 가지고 베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니고 그 당시까지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 가려져있었습니다.

원래 구약성경에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이 기록되어 있지만 바울의 서신서들에 보면 비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비밀, 하나님이 예수님안에서 가리고 있는 구원의 사건을 비밀이라고 합니다.

이 비밀이 만세전부터 잇었지만 사도들 때까지는 아직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이방인에게 가는 것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방인에게 가는 것이 유대인의 전통의 영향을 받아서 금해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해에 기초해서 다르다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은 자기들이 성경에 비추어보지도 않으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지식을 가지고 정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면서.

그런데 교회는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경이 그러한가 보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가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하나님이 말씀하심을 성경에 비추어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냐면 그 결과 이방인에게 복음이 증거될 것이 하나님이 뜻임을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주어야 되는가를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기독교인들과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하는 이방인 기독교 사이에 논쟁이 붙었을 때 베드로가 하나님이 자신을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보낸 사건을 말하면서 내가 가서 할례를 말하지 않았고 전통을 말하지 않았다. 예수믿는 믿음을 말했는데 하나님이 저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우리들도 지지 못하는 짐을 왜 그들에게 지우게 하려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통해서 하신 일들을 나누었습니다.

그 다음에 야고보가 나와서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디서 발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베드로가 그렇게 나누었을 때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가 놓고 분별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그리스도안에 있는 비밀이 만세전에 예비 되었는데 그것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이 땅에 계시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음성은 성경에 부하되어야 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감동은 반드시 모두가 시험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주어졌건 나를 통해서 주어졌건.

그런데 무엇보다 성경말씀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사들을 통해서 조언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말씀을 대변하는 교사들을 말하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감동은 성경과 부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7.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냅니다.

 

아까 읽은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사실 고후4:4절입니다.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지 않았다.

지난 주에 사단의 음성을 나누면서 사단의 음성은 육신을 자랑하게 하지요.

특별히 예를 든 것은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을 예로 들었지요.

특별히 이 문제를 고후10-13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 있지요.

거기 보면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의 영적인 체험을 자랑했어요.

그것을 통해서 슈퍼사도로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들의 금전적인 부나 명예나 사람들을 쥐로 흔들거나.

그래서 사도바울은 누가 너희들의 빰을 때리거나 자고하거나 할지라도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하고 말하지요.

왜 지극히 큰 사도들로 자기들을 드러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지극히 큰 사도들이라고 인정하니까 그들이 자기 목적을 위해서 성도들을 착취해도 그들이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이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전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두 가지를 전하는 것처럼 되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신 것과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 두 가지를 전한 것처럼 되어 있지요.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렇게 안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메시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의 종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그리스도를 주로 전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지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역시 고린도후서에 나옵니다.

특별히 고후10-13장에서 다루는 문맥에서 나옵니다.

112절부터 뭐라고 합니까?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여기보면 지난 주에 잠시 살펴보았듯이 사도바울은 자기를 중매쟁이를 이해했습니다.

성도들은 자기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금전적인 목적을 위해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사역의 확장을 위해 자기의 명예를 위해 성도들을 자기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중매쟁이에 불과하고 성도들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정결한 처녀로.

여기 정결하다는 말은 도덕적인 정결을 포함합니다. 도덕적인 정결은 간음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이런 것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도덕적인 정결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외도한다거나 도덕적인 어떤 죄를 범하지 않아요. 그러나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면 도덕적으로는 정결할지 몰라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온전한 부부관계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말하는 정결은 도덕적인 정결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전 존재로 사랑하며 그분만을 열망하며 그분을 사모하는 신앙의 본질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절에 뭐라고 하냐면 이렇게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 그리스도를 향한 순전함 깨끗함에서 떠나 너희 마음에 미혹될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은 그들이 많은 영적인 체험을 강조했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 성도들의 관심을 오직 도덕적인 순결 뿐아니라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그리스도만 사랑하도록 인도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그들의 마음을 빼앗아 자기들에게 인도했던 것입니다.

 

뱀이 그 간계로 이화를 미혹한 것 같이.

이것을 보면 사단이 하와를 미혹한 것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 떠나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미혹하게 한 것처럼 이렇게 우리의 관심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해서 사람에게 가게 하는 것이 배후에 사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서 절대로 목회자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주님께 있어야지 저에게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저를 칭찬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제가 퉁명스럽게 넘겨버리니까 서운할지 몰라도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주님만이 여러분에게 힘을 줄 수 있고 주님만이 여러분에게 세상을 이기게 할 수 있고 삶의 의미를 줄 수 있지 목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주님의 종으로 주님이 전하라고 주시는 길을 전해서 여러분을 그 길로 인도하고 섬길 뿐이지 여러분에게 진정한 인생의 만족과 문제해결과 여러분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기대해보아야 사람 기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본주의는 어떠한 생명도 없습니다.

저에게는 여러분에게 그렇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똑같은 나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을 세울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분을 보십시오. 그분만이 여러분을 세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바울은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로 주님에 대한 진실되고 깨끗한 신실한 사랑과 헌신으로 인도한 반면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고 성령의 역사입니다.

반면에 거짓 사도들은 많은 영적인 체험을 자랑했을지 몰라도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헌신에서 자기들의 종으로 삼은 것입니다.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자고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잘 용납한다.

이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주님에 대한 신실하고 진실된 정결한 헌신과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 주님의 음성이고 여기서 떠나게 하는 것이 사단의 음성입니다.

여러분이 빚이 늘었습니다. 예를 들면.

카드를 돌려막다보니까 빚이 점점 늘었습니다.

여러분이 집이나 재산의 일부가 있는데 빚이 점점 늘어갑니다.

그러면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는 파산신청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 전에 여러분의 재산을 빼돌리고 나서.

그러면 여러분에게 빚준 사람은 손해를 보겠지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재산을 미리 빼놓았으니까 남겠지요.

두 번째는 보다 월급을 많이 주는 직장으로 옮길까. 그런데 그 직장으로 옮기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타협할 수밖에 없어요.

아니면 어려워지니까 헌금을 안해도 되냐.

네 번째는 집을 팔아서 빚을 갚고 규모를 줄여서 가야 되냐?

이런 선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입니까?

어떤 안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 다른 음성을 들었다면 욕심 때문에 미혹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은 주님의 주권을 드러냅니다.

우리를 정결한 처녀로서 한 남편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반면에 사단의 음성은 그 자리로부터 떠나게 합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면 모든 것이 부합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해당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되 하나님의 음성을 잘 분별해서 주님과 동행하되 미혹된 길로 가지 않고 주의 길에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자기소리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내 중심에서 개인적인 야망과 탐심과 세상사랑이 내려져야 합니다.

우리는 내 중심에서 개인적인 야망과 탐심과 세상사랑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니까 자꾸 미혹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욕심 때문에 미혹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중심적인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이유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하나님중심적인 삶 가운데서 내 목적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고 내 온 삶을 거기에 맞추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쁨이기 때문에 그런 자세를 가지고 주 앞에 엎드려야 주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습니다.

그러한 자세를 가진 것과 하나님이 우리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해서 예수를 믿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인 야망과 탐심과 세상사랑을 중심에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할 때 얼마나 다르게 들려질 것인가를 오늘 살펴본 특징을 볼 때 아시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자기음성이나 사단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착각할 확률이 너무나 큽니다.

이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기 위해서 우리 자세가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