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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하나님 음성듣는 것

제11강 내적감동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

by 오용주목사 2016. 9. 16.

11강 내적감동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

 

 

고전14:29-30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이런 부분을 잘 모르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알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세 번씩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몰랐던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우레와 같은 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줄로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외 여러 다른 방법으로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주된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인가? 무엇이 하나님의 음성인가를 성경을 통한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뿐아니라 하나님은 다른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다양한 방법을 살펴볼 것인데 오늘은 내적감동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내적감동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 가지입니다.

 

 

1.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예언, 2.내적감동. 3내적감동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에서 어떻게 자라날 것인가를 살펴볼 거십니다.

 

 

1.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예언의 차이

 

사실 이 부분은 오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이 부분을 이해하면 성경적인 이해 뿐만아니라 올바른 관점을 여러분들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 부분을 먼저 살펴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예언의 차이를 잘 몰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자세를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감동이라 말하면서 부분적으로 틀리면 성경에 보면 틀리면 거짓 선지자라고 했고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예언이라고 하느냐 그것도 감동이라고 말하느냐 하면서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반대로 예언한다고 하면서도 이 차이를 알지 못하면 자기를 통해서 주어진 예언이나 하나님의 음성이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어떤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고 반드시 지키도록 강요하는 태도를 취해서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구약에 나오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였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트리니티 신학대학원의 조직신학 교수인 웨인 그루뎀 박사가 있는데, 그분이 쓴 조직신학 책은 수많은 기독교 리더들에 의해서 추천된 책입니다.

이분의 박사학위 논문이 예언의 은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책을 일반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출간했습니다. 예언을 다루는 분들은 그분이 쓴 책을 교과서로 참조합니다.

그런데 신약과 구약의 선지자들에 관한 차이를 그 책에서 아주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전하는 자들이었고 구약의 참된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어진 예언은 하나님 말씀 자체였습니다.

 

간단하게 몇 가지 설명 드리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메신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1:13, 1:1 삼하12:25 등을 보시면, 참고로 그런 부분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학개서 113절을 읽겠습니다.

“13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명을 의지하여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기보면 학개가 자신을 여호와의 사자라 여호와의 대사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메신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예언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러기 때문에 그 선지자들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18:18-21 1:9 2:7 등을 보면 이런 부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으로 신명기 18:18-21절을 읽겠습니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19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여기보면 선지자들이 곧 하나님의 사신들이었고 하나님이 그들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셔서 그들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을 말하면서 1인칭으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8:19 삼상8:7 대하25:16 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삼상87절을 읽겠습니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여기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을 주셨는데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자 저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말을 안듣거나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안믿거나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는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신1819절에서도 이런 자들을 하나님이 벌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뿐만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씀은 하나님 말씀 자체였기 때문에 참된 선지자들의 말에 대해서 어떤 의문을 제기하거나 어떤 도전을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순종하는 것만 요구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신약의 선지자들 혹은 예언자들은

 

신약의 선지자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전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신약의 선지자 혹은 예언자들은 그들의 말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사도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20:21 22:21 고후5:20 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20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들이라고 말합니다.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리고 사도들이 하나님의 메신저들로서 사도들을 통해서 주어진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1:11-12 14:26 16:13-14 벧후3:2 살전2:13 벧후3:15-16 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복음만 해도 자기가 주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사람이든지 천사이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또 베드로후서 32절을 대표적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거룩한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를 말합니다.

여기보면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너희가 기억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살전 213절입니다.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니 진실로 그러하다...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가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구약의 선지자 혹은 예언자들이 전한 것은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반박이나 테스트할 것도 아니었고 의문도 제기할 수 없고 순종만 요구되었고 말씀을 버리면 하나님을 버린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사도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역할을 이어갔습니다. 신약의 선지자들이 이어간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사도들과 관련해서도 그렇고 신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아닌 것을 몇 가지를 더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가 신약에서는 예언을 반드시 시험해보라고 말합니다.

두 구절을 봅시다.

하나는 고전 14:19절입니다.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오늘 본문입니다.

살전 520-21절입니다.

“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사실 여기보면 하나님의 감동 예언과 관련해서 중요한 균형이 나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예언을 멸시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그러면 좀 덜 신실한 덜 떨어진 신앙인들이나 하는 것처럼 이해합니다. 자신을 말씀 말씀하면서 고상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계몽주의 영향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균형의 요소는 반드시 모든 예언을 시험해보라고 했습니다.

모든 예언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두 구절을 보아도 예언을 시험해보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언자 예언하는 사람 선지자를 시험해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7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해내야 합니다.

선지자를 시험해보기도 하지만 여기 아까 읽은 고전14:19절과 살전5:20-21절은 시험의 대상이 선지자가 아니고 예언입니다.

예언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서는 참다운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에 대해서 시험해 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언이 구약의 예언과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시험해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세계적으로 아무리 강한 예언의 은사가 함께하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준 예언일지라도 여러분은 반드시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예언대로 행하면 여러분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받고 예언대로 행하면서 낭패를 당하고 나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성경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모든 예언은 반드시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부터 온 것인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따라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것을 자신과 하나님과 관계에서 반드시 확인되어져야 합니다.

이처럼 신약의 예언은 반드시 시험해보라고 했습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예언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다음에 신약에 보면 무시될 수 있는 예언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초대교회 예배 때는 예언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예배는 순서를 정하고 순서만 마치면 되는 것으로 형식적으로 되어있는데 초대교회의 예배는 예언도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예배는 고전 14장을 보면 알지만 예언의 말씀도 있고 방언도 있고 통역도 있고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었고 성령께서 자유롭게 운행하심으로 다양한 종류의 은사들이 활발하게 나타났던 것이 초대교회 예배였습니다.

예언만 해도 예배 시간에 예언이 있었는데 두 세 사람이 하라고 합니다. 치우치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례대로 하라. 한꺼번에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은 분별하라. 그러면서 말하기를 A라는 사람이 예언을 하고 계시를 말하는데 B라는 사람에게 예언이 임하면 첫 번째 하던 사람은 멈추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언이 이 사람에게 주어지더라도 두 번째 사람에게 계시가 오면 예언이 무시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예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무시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무시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뿐만아니라 고전1437-38절을 보면 신약의 예언자들은 사도들보다 더 낮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에서 사도가 하나님의 메신저들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대변하는 자들이었고 선지자들은 그 사도들의 권위 아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약의 예언과 구약의 예언은 다릅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은 신약에 살고 있으면서 누가 감동을 받았다 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 중에 일부만 틀리면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냐 당신 돌로 맞아 죽어야해 그러면서 전체를 부인해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주신 예언이 마치 구약의 예언인 것처럼 생각해서 자기가 말한 예언에 대해서 어떤 의문이나 토를 달아서는 용납이 안되는 것이고 그대로 순종할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너무나 타락한 자세입니다. 아무도 이렇게 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모든 예언은 시험해봐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음성을 시험받기 원하지 않는 사람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태도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2.오늘 주제가 내적감동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인데. 그러면 신약의 예언은 무엇이냐?

 

고전 14장은 신약의 예언은 계시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계시를 말하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이 계시인데 계시가 완성되었는데 무슨 계시를 말하느냐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용어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성경은 당연히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완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성경이 쓰여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진리로서의 성경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말하는 계시라는 말은 다른 의미입니다.

성경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보이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말은 Revelation이라는 말입니다. 아포칼룹스라는 말로 뚜껑을 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중을 마음을 뜻과 계획을 알려주시는 것을 계시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언을 계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알려주셨다는 의미로 계시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서 이런 것을 토대로 해서 웨인 그루덤 박사는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면,

제가 지금 이 분의 정의를 말하는 이유는

내적감동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어떤 부분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또 그것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또 그것에 해당하는 중요한 진리들을 이 관계를 알아야 알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MIND-생각) 속에 떠오르게 하신 것을 단순히 인간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가져다 주시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중과 뜻과 계획을 가져다 주시는 것인데 그것 중 하나가 내적감동을 통해서입니다.

 

여러분 사단이 여러분의 생각 속에 사단의 생각을 집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안믿는 분은 손들어 보세요.

아마 예수믿는 분들 중에 그것을 안믿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믿는 사람들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 생각 속에 집어넣을 것을 안믿습니다.

너무나 큰 아이러니지요.

사단은 집어넣을 수 있음을 믿으면서 하나님은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안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하나님보다 사단을 더 잘 믿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각 속에 가져다 주시는 것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내적감동을 통해서 가져다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되 다양한 방법으로 가져다 주십니다.

하나는 Impression 인상입니다. 마음 속에 어떤 인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알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어떨 때는 물밀듯이 생각이 몰려오기도 하고요.

어떨 때는 단어나 문장이 마음의 눈에 보여지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그런 일이 있답니다.

뉴스보면 문장이 올라가잖아요. 그처럼 단어나 문장이 보여집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말로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 내적감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3.내적감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초기일수록 우리 생각은 많고 하나님의 생각은 적고 자랄수록 하나님의 생각은 많고 우리 생각은 줄어듭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감동을 주시면서 섞어서 주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 내적감동으로 주신다 할지라도 이것을 이해하고 그 의미나 관점이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내포하는 것을 우리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을 옳지만

앞으로 보겠지만 하나님 말고 사단이 생각을 줄 수 있고 하나님 말고 자기 생각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를 앞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감동일지라도 하나님의 감동을 옳지만 이것을 우리의 생각을 가지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릴수록 우리 생각이 많이 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섞어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는 일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지 않으면 우리 생각대로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낭패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라나야 합니다.

 

그러면 자라나야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첫째, 믿음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가져다 주신 것들을 인간의 말로 표현한 것이 예언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적으로 감동을 주신 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우리말로 표현함으로 듣게 됩니다.

그런데 말로 표현할 때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롬126절입니다.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표현할 때 믿음이 요구됩니다.

믿음에는 그런데 위험부담의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내가 감동받은 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나누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이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음성이냐 네 생각을 말하지 말라. 그런 소리하지 말라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것처럼 취급당할 가능성이 있어요.

또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말했는데 틀릴 수 있어요. 이런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위험부담의 요소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라나려면 위험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말로 표현하면서 실천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는 자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님을 위해 바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제가 초기에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어요.

그런데 설교를 마쳤는데 하나님이 이중에 예수안믿는 사람들 중에 처음 예수 믿기를 원하는 분들을 초청해서 기도해주기를 원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감동을 주셨어요. 마음에 생각을 주셨어요.

그래서 여기 있는 분들 중에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는 분들중에 예수믿기를 원하시는 분들 있습니까? 있으시면 일어나세오. 그리고 기다렸어요.

그래서 몇 분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분이 아니고 다른 분을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더 기다리면서 다른 분중에 있으면 일어나세요 하고 기다렸어요.

그래도 안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두 줄이었는데 저쪽에 있는 분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저분을 가리키면서 일어나라고 하면 될텐데 쉽지 않았어요.

혹이 아니면 개망신을 당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직접 말하지 않고 이쪽 줄 중간 쯤에 앉아 계신 분들 중에 있는 것다고 일어나라고 했지요.

안 일어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일어난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설교를 마쳤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까 그분이 그 당시 제가 아는 분이 사업을 하는데 그분이 사장님인데 그 회사 직원들이 양쪽에 앉아 있었어요. 그 직원이 나중에 회사에서 말하기를 목사님이 초청할 때 바로 자기라는 것을 알았데요. 그런데 안일어났다고 하더래요.

그러니까 믿음이 필요하지요.

주를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모험을 감수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분이 그때는 아니어도 예수를 믿고 지금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해요.

 

이처럼 모험을 감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셨는데 그것이 성경말씀에 틀리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비성경적인 것은 사단이 준 것입니다.

욕해나 복수해라 꾼 돈 갚지 말라 등등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합하면 순종해보아야 하나님의 음성인지 내 생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순종해야 자라납니다.

순종할 때도 주를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고자 하는 모험을 감수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길수 목사님을 통해서 귀한 일을 많이 합니다.

이번에도 미국에 가서 기도하는데 사역 시간에 치유하셨어요.

그 다음날 전혀 믿지 않는 친구를 데려왔어요.

오자마자 그 사람의 삶을 그대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자 이 처음 온 사람이 완전히 태도가 달라졌어요.

주님께로 달려왔고 예수님을 기꺼이 영접했습니다.

그분은 조기유학 때문에 애를 데리고 온 분으로 불교신자였는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니까 곧바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방해가 있을 것 같더래요.

그래서 다음날 또 만나자고 했더니 또 왔더래요. 아니다 다를까 더워 난리인데 목까지 칭칭 감고 왔더래요. 기도해주었더니 순식간에 고치니까 다 풀었어요.

이렇게 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초기에는 길거리를 가다보면 승려들이 목탁을 치면서 시주를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이 가서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감동을 주시더래요. 그래서 갔다가 올 때까지 있으면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지 하고 그냥 갔습니다. 없었으면 했는데 오는데도 있더래요. 그래서 이야기하고 오기도 했답니다.

 

한번은 차를 타고 갔는데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갔는데 여자화장실 몇 번째 칸을 가보라고 하는 것 같데요,

남자 화장실도 아니고 들어갈 수 없어서 사모님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대신 가보라고 했데요.

그런데 사모님이 아무도 없더라고 하더랍니다. 얼마나 챙피합니까?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뛰지 않습니다.

뒤집는 것만 해도 수도 없이 반복합니다.

처음 뒤집는 날 어머니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앉았다 난리가 납니다. 섰다 한발 뛰었다.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아이들은 수백번 넘어집니다.

또 넘어지고 그럽니다.

그런데 얘가 한번 일어나다 넘어지면 이 바보같은 놈아 그러면서 욕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처음부터 우리 생각이 다 내려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는 자리로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옳게 말씀하지만 듣고 분별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니까 그 과정에서 우리 생각이 수없이 섞일 수 있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폭풍이 왔습니다.

제 아내가 태풍을 빗겨가게 해달라고 다윗의 장막에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바다의 풍부가 몰려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했데요. 그래서 기도했답니다.

어제 신문에 나서 스크렙했는데 올해 서남해에 예언에 없던 풍어랍니다.

게가 홍어가 참조개가 많이 잡히고 그래서 그 기사에 의하면 지금은 바다에 가서 그물을 다 꺼낼 시간이 없어 그물채로 가져와서 부두에서 그물을 찢으면서 분리한답니다.

하루에 경매할 때 6억씩 벌었답니다.

 

제 말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시이고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 자라나게 될 때 하나님의 실제를 우리 삶에서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의중과 의도를 발견하고 사역하게 되면서 순종하면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전도하면 능력전도가 되고 치유가 일어나면 능력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영적 지도자의 조언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두고 하나님의 성령께 열려있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지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이 주신 감동일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경험 자기신학 자기생각과 편견을 따라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자기가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전혀 틀릴 수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는 예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어떤 집회에 가자고 하도 해서 안갈 수 없어서 따라가기는 했지만 저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언이 정확하다고 그러는데 저는 눈을 뜨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언한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자기의 신학적인 견해를 발표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신학적인 견해가 틀린 견해인데.

그래서 저것이 무슨 예언이야 했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이 그 당시 그분이 받은 감동이 맞을 수 있어요.

하나님의 감동일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이해할 때 자기의 신학적인 배경 종교적인 전통 자기 경험 등을 가지고 이해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이해하는 것은 실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도들은 성경 전체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고 또 하나님의 관점에 대한 무장도 없는 상황에서 감동을 올바로 받을지 모르지만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를 수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지도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성경에 비추어보지 않고는 필연적으로 잘못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빠지는 주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받은 감동만 믿으려고 합니다.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지요. 오래 못갑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비추어볼 뿐아니라 영적 지도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넷째, 실수가 용납되는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한 마디라도 틀리면 그것이 무슨 하나님의 감동이냐 성경에 너 같은 자들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어 하는 분위기는 안됩니다.

 

어린아이의 예를 다시 듭니다.

어린아이가 걷기 위해서 최소한 수백번 넘어집니다.

이런 아이를 향해 바보같은 놈아 그러면 부모가 이상하지요.

 

교회 내에서도 하나님의 감동이라고 하는데 전혀 엉뚱한 말만해요.

그래도 정죄하지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어 자라나야지 하는 실수가 용납되는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오늘은 내적감동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생각했습니다.

가장 주된 통로는 성경입니다. 그 외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내적감동을 통해서 주십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거의 대부분의 음성은 내적감동을 통해서 주십니다.

여러분이 이런 감동을 통해서 더욱 자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리즈를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인격적인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한 개인적인 교제를 위해서 필수적인데, 또 사역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우리가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심을 보고 따라가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모두 예외없이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자라나서 더 깊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서 자라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