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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하나님 음성듣는 것

제9강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

by 오용주목사 2016. 9. 16.

9강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

 

 

26:17-18

“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18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오늘 본문 말씀은 유대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이삭이 블레셋 아비멜렉에게로 피했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점점 강성하여지자 아비멜렉이 자기 땅을 떠나 달라고 하지요. 그래서 떠나 그랄 골짜기에 진을 쳤는데 물이 없어요. 아브라함 때 팠던 우물이 있었는데, 이삭이 우물을 다시 팝니다. 그래서 물을 얻게 되는 내용입니다.

물은 거기 있었는데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어서 쓰레기를 치우기 전까지는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 예수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삭 시대에 물은 있는데 쓰레기가 많아서 물을 얻을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가로막는 쓰레기들이 있어요. 그 쓰레기들을 치워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편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자유롭게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영적인 쓰레기들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세계관의 쓰레기입니다.

 

세계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World View라는 것입니다. 이 세계관은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나면서 우리가 습득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 당시 가지고 있는 인식 대화 교육을 통해서 습득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습니다.

이 세계관을 우리에게 안경과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경을 끼고 보듯이 우리들은 세계관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모든 사건과 사물과 모든 것들을 인식할 때 세계관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계관이 올바르지 못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세계관에 대해 살펴볼 때 좋은 예는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지도를 보면 우리나라가 한 가운데 있지요.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 만든 지도를 보면 한반도는 주변에 있는 나라로 그려집니다.

인식 자체가 다릅니다.

 

죠수아 형제가 호주형제인데 우리나라 지도는 북반부에 위에 있잖아요. 호주 지도는 남반부가 위에 있습니다. 북반부가 아래에 있어요.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입니까?

가지고 있는 가치관 세계관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치관이 성경적인 가치관이 아니면 우리가 사건이나 사물 주위를 인식할 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방해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관련해서 보십시오.

어떤 분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말하면 그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믿는 사람들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뭔가 신앙적으로 극단적인 사람이라는 인식, 건전하지 못하게 신앙생활한다는 인식, 균형잡지 못한 신앙생활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안경의 영향입니다. 세계관의 영향입니다.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그 놀라운 능력을 우리 삶에서 경험하려면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성경적인 세계관입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 가운데 운행하시며 수시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지도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실질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신 언약 중 하나가 뭐냐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고 그들 가운데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이 예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사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저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고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친히 거하시며 운행하셨습니다. 친히 싸우셨습니다. 수시로 말씀하셨습니다. 지도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하시며 수시로 말씀하시며 인도하시고 지도하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했고 순종하며 따랐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성경적이 세계관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줄 믿으시지요. 그러면 이 말씀대로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2.신학적인 쓰레기입니다.

 

세 가지를 살펴봅니다.

 

첫째, 실질적인 이신론입니다.

 

이신론은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이신론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이 세상이 하나님이 세우신 자연법칙에 의해서 운행되도록 내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시계를 만들고 시계가 원리대로 움직이듯이 세계가 자연법칙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고 하나님은 뒤에서 지켜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그들의 삶에서 적극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할 자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이론적으로는 이신론을 주장하지 않을지 모르나 실질적으로는 이신론을 주장하고 믿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소위 보수적이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을 다 믿습니다.

성경에 나온 모든 사건들을 믿습니다.

또 미래도 믿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 새 하늘과 새 땅과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현재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실 것을 믿지 않습니다. 기대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의 일상생활과 삶에서는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운행과 통치하심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이신론이 아니어도 실질적으로는 이신론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 가치관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지도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성경시대에나 가능하다는 신학적인쓰레기입니다.

오늘날은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이해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 한 마디만 해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신학적인 편견 중에 하나가 뭐냐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시대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편견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해서 내용을 말씀드리면,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중단하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성경시대에만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삶에 개입하시고 주장하시다가 성경이 완성되자마자 뒷짐만 지고 계신가요.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그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 신앙이 무엇이 옳은 신앙인가를 성경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 성경이 우리 신앙과 삶과 사역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필수적입니다.

 

또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성경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앞으로 그 부분을 더 살펴볼 것인지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고넬료의 집에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넬료에게는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증거될 것이라는 것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지 않아서 하나님이 성경을 제쳐놓고 직접 환성을 통해서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복음이 이방인에까지 증거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성경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없어서 하나님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신약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새언약은 문자에 의한 삶이 아니고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문자는 죽이는 것이고 성령은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부분은 성령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치유도 구원도 성화도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도 성령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책 한권 우리에게 주시면서 잘 연구해서 살라고 하시지 않고 다른 보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토대 위에서 성령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필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시대에나 말씀하셨지 더 이상은 직접 말씀하지 않으시고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는 것은 편견입니다.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마음을 열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편견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이 쓰레기가 치워져야 합니다. 성경에 기초해서.

 

셋째,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가 쓰레기인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는 율법주의는 우리 신앙을 일정한 규례와 규칙으로 전락시킵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경에서 말하는 올바른 신앙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인데, 율법주의는 일정한 규례와 규칙을 지키면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성수주일이라든가 기도하든가 봉사라든가 십일조라든가 금식이라든가 성경을 읽는 것이라든가 이런 몇 가지를 잘하면 신앙생활 잘한다고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신앙생활을 잘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리새인들이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전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신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규례와 규칙은 대단했을지 모르지만 실질적인 하나님과 교제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규례와 규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전락시키는 율법주의적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기대하지도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합니다.

 

J I 패거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시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인격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을 막연한 능력이나 힘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교리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는 그들이 하나님은 인격체라는 사실을 다 믿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살아계신 그 하나님과 실질적인 교제를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합니다.

 

뿐만아니라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음성듣는 것을 이렇게 방해합니다.

율법주의는 항상 자기 행실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헌신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런 율법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예수믿은 지 오래된, 새벽기도 한번도 빠지지 않는 일부에 국한된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목사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새벽기도 한번도 빠지지 않는 권사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나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쓰레기입니다.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종교적인 헌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요한10장에 보면 예수님을 목자로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면서 양의 특징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1027절입니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여기보면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이 소수의 헌신된 자만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듣는 것이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가려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합니다.

 

 

3.두려움의 쓰레기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치워야 할 쓰레기가 두려움입니다.

사단이 집어넣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하면 그러다 마귀의 음성을 들으면 어떻게해 하면서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라고 하면 그러다 귀신이 역사하면 어떻게 해 하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예를 많이 듭니다.

내가 아는 집사님 말이야 기도원에 가서 방언을 받는다고 해서 받아왔는데 이상한 방언을 받았어. 마귀 방언을 받았더라고.

그러면서 그러지 않기 위해서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찬송가 가사 중에 486장이 그런 내용입니다.

제가 한번 가사를 읽어볼께요.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어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보다 그 밑 모르는 깊은 파도속을

한번 해하려 안보나

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삭거리는 착은 파도보고 마음이 조려서 못가네.

 

이것이 바로 그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은혜 성령님의 역사가 있는데 잘못될까봐 두려워서 발을 못딛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파도 앞에서.

이런 사람은 평생 가도록 피상적인 형식적인 신앙생활밖에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수법입니다.

마귀가 숨겨놓은 쓰레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치울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를 미혹할 수 있는 사단의 능력보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훨씬 큰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은사를 추구하더라도 그래 당신 은사 받았어. 나는 못받을 줄 알아 겨우 방언 나는 예언받는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자기는 더 큰 것을 받아야 돼.

사실은 크고 작은 것이 없지요. 자기 생각에 그런 거지요.

그래서 은사 받으면 사람들을 자기 뒤에 줄 세우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합니다.

이런 잘못된 태도로 은사를 받으면 잘못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가치관에서 은사를 추구하거나 음성을 듣게 되면 잘못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성경에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 개인적인 야망과 독한 시기가 있으면 그 지혜는 하늘로부터 온 것으로 생각지 말라 그것은 마귀로부터 온 것이다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동기로 추구하면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구하고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같이 있기를 원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하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쓰임받기 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동기로 주님을 구할 때 어둠의 세력이 우리를 시험하도록 주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자녀가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줄 자가 있겠느냐

생선을 달라하면 전갈을 줄 자가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

이 말은 하나님께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부어달라는데 귀신을 부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뿐만아니라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귀신의 세력의 총 두목이 사단입니다.

마귀라고도 하고 이 사단이 천사장입니다.

천사는 인간보다 한 단계 위의 피조물입니다.

천사 하나가 하루 아침에 이스라엘의 원수 18만명을 쳐부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개인의 능력으로 귀신의 능력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셔야 할 것은 우리 인간과 귀신과 천사의 세계의 차이보다 천사의 세계의 하나님과 차이가 훨씬 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어둠의 세력들의 두목인 사단만 해도 천사장에 불과합니다.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본체시며 루시퍼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이 차이는 비교가 안될만큼 큽니다.

따라서 우리를 미혹하는 귀신의 능력보다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훨씬 큽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 가려면 잘못될까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보호사시고 인도하시는 대장되신 주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4.세상의 잡음입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 흑인들이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카세트를 어깨에 걸쳐 매고 볼륨을 아주 크게 틀고 가면서 춤을 추며 갑니다.

이런 분들은 옆에서 아무리 크게 불러도 못듣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소리가 가득해서 하나님이 외치셔도 못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속극 소리, 갯돈, 애들 진학, 사업, 스포츠, 등등의 소리들입니다.

여러분 보통 때는 이런 소리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잠잠히 앉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기다려보세요.

얼마나 세상의 소리가 가득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세상의 소리가 가득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보통 때는 그 속에 젖어 살기 때문에 모릅니다.

 

뿐만아니라 내부의 소리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 분노 억울함 걱정과 염려 두려움 조급함 이런 것들이 가득하면이 소리가 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이 잡음의 쓰레기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잡음의 쓰레기를 제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충분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두 시간 정도 기다려보세요.

온갖 종류의 생각들이 날 것입니다. 한번 해 보세요.

그러면 오늘 실패했다 그래도 염려하지 말고 다음날 또 해보세요. 또 온갖 종류의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훨씬 덜 할 것입니다.

그 다음날도 두 시간 기다려보세요.

이처럼 충분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기다려보면 세상의 소리가 잠잠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위해 때로는 금식도 필요합니다.

금식은 음식을 안먹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들을 끊는 것을 말합니다.

드라마 스포츠 취미 대화 등등.

세상의 것들을 끊고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5.불순종의 쓰레기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를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하셔도 순종하지 않을 줄 알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한두번 말씀하셨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불순종의 쓰레기를 제거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동안은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렸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음성이 안들려온다면,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제가 순종하지 않은 뭔가 있나요 하면서 불순종의 쓰레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회개하고 돌이키고 순종함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좋은 예가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요단강이 갈라집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여리고성이 무너집니다.

피한방울 안흘리고 여리고성을 함락하였고 원수들을 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 다음은 아이성이었습니다.

아이성은 여호수아가 보기에도 하찮은 성이어서 자신의 군대 전부 보낼 필요 없이 일부만 보내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만 보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기 쉽냐면, 아이고 오늘은 재수없는 날이야 이런 때도 있지 항상 이기나

그러면서 또 다시 자기 지혜를 구하고 자기 방법을 동원합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렇게 했다면 계속해서 실패했을 것입니다.

아이성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거두어졌을 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 여러분 이 자세가 너무 중요합니다.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하면서 찾아야 할 것이 뭐냐면, 불순종입니다.

 

 

이렇게 찾을 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두 가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는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을 보여 주셨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어떤 지역을 심판하시려면 다른 나라를 들어서 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해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취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드리게 합니다.

그런데 아간이 전리품 중 일부를 자기 목적을 위해 숨깁니다.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이 하나님의 역사를 거둡니다.

그랬을 때 그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앞에서 자기들에게 있는 불순종을 발견합니다.

그 불순종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다시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요단강에서도 여리고성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생각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묻지 않는 죄를 범했습니다. 회개하고 다시 돌이켰을 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명령하셨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갔을 때 승리했습니다.

 

여러분 불순종의 죄가 하나님의 음성을 가로막는 쓰레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무엇인가 끊어졌으면 그 시점으로 돌아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 하나의 죄는 불순종이었습니다.

 

 

6.숨겨진 죄의 쓰레기입니다.

 

또 하나 그리로 돌아가되 쓰레기가 뭐였느냐면 숨겨진 죄입니다.

우리에게 숨겨진 죄가 있을 때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하지 않습니다.

숨겨진 죄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떨 때는 우리가 모르고 지은 죄일 수도 있습니다.

숨겨진 죄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단절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리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 앞에 물어야 할 것은 숨겨진 죄가 있는지 물으면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 안 물어보아서 그렇지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저에게 닥쳤습니까? 왜 하나님의 승리가 제게서 걷혔습니까? 하면서 주님 앞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엎드려 기다려보세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은밀한 죄가 있습니다.

 

 

7.무엇보다 묻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잘 못듣는 가장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묻지 않아서입니다.

프랑크 부크만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태도이다.

 

여러분 잠3:5-6절입니다.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일이 닥칠 때 하나님을 의뢰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도하심과 명철과 지혜를 의지하기 보다 우리의 생각과 지혜를 따라 판단하는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잘 못듣습니다.

성경에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받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잘 들은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잘 물었던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제가 제 주위에 하나님의 음성을 다른 사람들보다 잘 듣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잘 묻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내 판단을 가지고 판단하고 내 경험을 동원해서 판단합니다. 내 지식을 동원해서 행동하는 경향이 잇는데 그들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묻는 자들입니다.

묻지 않기 때문에 못듣습니다.

 

아까 다윗을 말씀드렸는데 한 예를 보십시오.

삼하 5장을 보면 다윗에 대한 한 예가 나옵니다.

삼하5:17-19절부터 읽겠습니다.

“17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해처로 나가니라 18 블레셋 사람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19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19절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22-25절입니다.

“22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23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 가라사대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24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25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데...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께 묻는 자였습니다.

순간 순간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습관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삶에 젖어있습니다. 그래서 묻지 않습니다.

안 묻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정상입니다.

묻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묻는 것이 우리의 육신에 속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절대로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고 자기의 지혜를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안 묻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말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신의 본성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의도적으로 묻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 내 주장 내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과 지식과 명철을 구하고 그분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십니다.

 

 

8.쓰레기와는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삼상3장을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나타나서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한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인줄 모르고 엘리제사장이 부른 줄 알고 엘리 제사장에게 가서 불렀느냐고 하지요.

세 번씩이나 반복됩니다.

세 번째 갔을 때에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를 가르쳐주면서 그 올바른 자세로 주 앞에 엎드리라고 하십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자 하나님앞에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엎드립니다.

그랬더니 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도 못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보면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못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줄 그들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일 낮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대해 시리즈로 살펴보는 이유도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알아들을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배운다고 자동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십니다. 그분이 원하는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이 말씀하실 때 우리가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도 우리가 듣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부분을 살펴보는 이유가 뭐냐면 그분이 말씀하실 때 우리가 알아듣기 위해서이고 그 말씀에 올바로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승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쓰레기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쓰레기들이 우리 삶 속에 가득해서 물은 그 안에 여전히 흐르고 있는데 물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삶 속에 쓰레기들이 가득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이런 쓰레기들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길수 목사님 사모님이 청년 때 신앙생활을 할 때 로이드죤스 목사님의 책을 여러권 번역한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교회를 다녔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말씀에 있어서 뛰어난 분이시고 성령에 대해 열린 분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가르칠 때는 잘 안 열려있었나 봅시다.

그래서 말씀사역만 강조하고 은연중에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 해도 아주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목사님 아래서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이길수 목사님을 통해서 교회에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을 부으시고 사모님에게도 부으시는데 못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방언의 은사를 부어주셔서 혀가 꼬부라져서 나오려고 하는데 딱 멈추어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시 또박또박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방언이 주어질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의지를 가진 자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사를 주실 때 환영하며 받아들어야 주어지는 것이지 나는 가만이 있는데 억지로 하나님이 내 입을 열어 혀를 움직여서 방언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사를 부어주심에도 불구하고 자라나는 과정 속에서 편견 때문에 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그런 자세를 들추시면서 그 자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일 때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 훨씬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은사도 자유롭게 나타내셨습니다.

지금 많은 은사를 통해서 귀하게 하나님이 쓰십니다.

그런데 편견 때문에 돌이키지 않았을 때 쓰레기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뿐만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치워지고 주님 앞에 마음문을 열고 환영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주님의 말씀 앞에 마음문을 열고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