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
삼상 3:10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의 필수성에 대해서 몇 주 동안 살펴보았고,
하나님의 음성과 성경과의 관계에 대해서 또 어떻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인가에 대해 몇 주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주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를 오늘까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방해가 되는 영적인 쓰레기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올바른 자세를 갖추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올바른 자세를 갖춘다고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른 자세를 가져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우리가 올바른 자세를 갖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세가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를 다섯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하나님과 지속적인 친밀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제가 몇 가지로 말씀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친밀한 자에게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우리 사람들도 친한 사람에게 속 이야기를 합니다. 부부사이라고 친하지 않으면 속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이야기는 할지 모르나 속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2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도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사랑하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하게 순복하는 이런 신앙의 본질 가운데 사는 관계를 말합니다.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하나님이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중요한 자세입니다.
반면에 우리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희귀합니다.
그러나 의식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도 많이 있을 수 있고 나름대로 헌신도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많을지 모르지만 신앙의 본질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온 삶을 다해 순복하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가운데 온전히 들어가는 하나님과 친밀한 살아있는 교제인데, 의식은 많을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은 희귀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삼상 3장 1절입니다.
이 본문은 엘리 제사장 시대의 시대말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도 2장을 보면 알지만, 많은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많은 예배가 있었습니다. 많은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로 대면되는 거짓신앙체계가 팽배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주의 뜻과 의도를 구하여 주 앞에 서야 할 것이고 주님의 뜻을 발견하여 자신의 삶을 조정해서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할 것이고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가야 할 것인데, 주님을 찾기 보다는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이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종교적인 의식을 신뢰하는 율법주의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로 대변되는 거짓 신앙체계가 팽배한 시대였습니다.
그랬더니 삼상3장 1절에 뭐라고 하십니까?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신앙이 타락할수록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입니다.
또 하나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 분 자신을 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입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삶입니다.
바울처럼 하나님 그분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인생에 유일한 목적이 되는 삶
그래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원하는 삶 그래서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기 원하는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있기를 원하는 삶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은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의식이 많다 할지라도 자기 목적 자기 계획이 살아있으면서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자기가 세운 계획을 위해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 자기 목적 이루어 달라고 자기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자기 문제 해결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삶에서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결국 자기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삶인데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면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이 홍해 앞에서 부르짖을 때 200만 명이 통성으로 절박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그들의 기도를 보면 홍해 앞에서건 먹을 것이 없을 때건 마실 것이 없을 때나 고기가 먹고 싶었을 때든지 이처럼 자기들의 필요를 위한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했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의종과 의도를 알아 자기 삶을 조정해서 그 가운데 함께 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뭐하고 말합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셨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영이 파리하게 되어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106:13-15절에서 있는 말씀입니다.
“13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14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15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아무리 기도를 열심하고 금식을 많이 할지라도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돌이키지 않으면 영적인 분별력이 가리워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지 못합니다.
여기에 덧붙혀서 한 가지 더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처럼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면서도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여러분에게 부어지면 꿈을 통해서 환상이 보이고 감동이 주어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지 아니하면, 어떤 일이 있느냐?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하나님의 올바른 의도와 의중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어도 자기 임의대로 생각합니다. 자기 보는 대로 판단하고 자기 생각을 따라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뿐만아니라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줄 때는 감동이 잘 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깜깜합니다.
또한 그렇게 되면 마7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오실 때 심판을 받을 자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지요.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하며.... 선지자 노릇한다는 말은 예언한다는 말입니다. 영어성경에는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가라고 합니다.
왜요? 그들은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아 하나님이 계신 곳에 자기 삶을 조정하며 동행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예언했을지 모르지만 자기 임의대로 자기 방법대로 자기 수단대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중에 하나님의 뜻과 의중에 순종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 목적을 위해 산 자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종하고 하는 자세와 관련해서 중요한 성경구절이 두 구절입니다.
한 구절은 아까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삼상 3장 10절이고 두 번째는 여호수아 5장에서 하나님께서 군대장관으로 오셔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났을 때 한 말입니다.
한 가지씩 살펴봅시다.
다시 한번 삼상3장 10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여러분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세 차례나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몰랐습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우리가 훈련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모를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 엘리 제사장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고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삼상 3장 9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엘리제사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정확한 방법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제사장은 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었던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가 신앙이 타락하여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하지 않는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삼상3장 9-10절입니다.
“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이 한 구절입니다.
그리고 한 구절은 여호수아서 5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여리고성 정복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을 할례 받게 합니다. 그리고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났습니다.
13-14절부터 읽습니다.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러분 여기에 보면 천사가 왔는데 이 천사는 보통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보통 천사는 절대로 예배를 못받게 되어있습니다.
보통 하나님이 가끔 오시곤 합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했는데 그때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씨름하고 나서 야곱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해서 브니엘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그 동일한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성육신하기 이전에 예수님이 현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묻지요.
원수 편인가? 우리 편인가?
그러나 대답하지요. 우리말 성경에는 그 뜻이 담겨있습니다만 영어 성경을 보면 Neither라고 합니다. 둘다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여기에 왔다.
그랬더니 여호수아가 납작 엎드려 말합니다.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
그랬더니 15절입니다.
“15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기 두 구절에 나타난 자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필수적인 자세인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세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납작 엎드리는 자세입니다.
누구처럼? 여호수아처럼. 이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묻지요? 우리편? 원수편? 답은 둘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편 삼으려고 합니다.
교회내에도 서로 갈등이 생기면 다 하나님을 자기편 삼습니다. 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웁니다. 다 성경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편 삼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옳은 자세는 하나님을 우리편 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 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묻기를 원수편인가? 우리편인가?
원수편이면 내가 먼저 싸우겠다는 말이고 우리편이라는 말은 나를 리더로 세웠으니까 와서 내가 싸우는데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군대장관은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이 전쟁에서 너를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전쟁에서 싸우기 위해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그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이 자세가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납작 엎드리는 자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많이 하나님을 자기 편 삼으려는 교만한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치 결재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처럼 행사하는 교만한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목사니까 목회를 예로 들어봅시다.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주의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내가 리더라는 말이지요.
내가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인도할까요? 하나님이 보여주면 내가 검토해 봅니다. 이렇게 하면 교회가 성장할만한지. 잘 될 것이지. 마음에 안들면 하나님 이것 말고 다른 것 보여주세요.
그 안을 집어 던집니다. 그리고 다시 가져오라고 합니다. 언제까지? 내 마음에 들 때까지.
목회자가 아니라도 우리도 사업의 현장에서건 삶의 현장에서건 우리는 너무나 많이 자기가 결재권자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되 우리 마음에 드는 뜻을 계시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주 교만한 자세입니다. 그 자세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제가 듣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납작 엎드리는 자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렘13장을 보시면 하루는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그러십니다.
띠를 사서 허리에 동이라 물에 젖지 않게 하라. 그래서 띠를 사서 허리에 동이자 하나님이 그것을 유프라데 강으로 가서 바위 틈에 감추라고 합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유프라데 강까지는 아주 먼 거리입니다.
이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강에 가서 띠를 숨깁니다. 갔다 오는 시간만 해도 많이 걸렸겠지요.
그랬더니 여러 날 후에 가서 그것을 꺼내오라고 하십니다.
아니 그것을 언제는 숨기라하더니 이제는 뭣 때문에 가져오라고 하십니까? 하지 않았어요.
예레미야는 순종했습니다. 가서 띠를 보았더니 썩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배 자체는 귀한 섬유가 아니듯이 이스라엘 자체가 귀해서 택한 것이 아니라 쓸모없고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띠를 두루는 영광의 도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고로 썩어진 베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서 예언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아래 납작 엎드려 말씀하시면 순종하는 자세로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주 중요한 것이 여기 있는데, 하나님의 뜻이 최선이라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엎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데,
이유 중에 하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해.
집을 팔아서 헌금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
나는 목사가 되기 싫은데 목사 되라고 하면 어떻게 해.
이런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 앞에 못 엎드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하나님은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선이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최선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그분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최선이라는 것을 신뢰함으로 주 앞에 엎드려야 이 자세로 엎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가 필수적인 자세입니다.
3.자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방해하는 쓰레기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과 이 시간이 서로 보완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주된 것이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 생각이 완전히 전파를 방해하는 방해전파처럼 가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들으려면 자기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을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는데 대부분 자기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5만번 기도응답을 받았다는 조지뮬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는가를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책에도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제가 한번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처음에 저는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하여 제 마음에 한 치라도 자신의 뜻이 남아있지 않는 상태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을 때 자기 생각이 자기 일이 아닙니다. 문제의 90%는 벌써 해결된 것입니다. 이것이 된 후에 저는 제 느낌이나 감정에 결과를 맡겨놓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저는 제 자신을 큰 착각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성경을 통해서 성령과 교제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은 자기가 할 것을 다 정해놓았어요. 자기 목표 다 정해놓았습니다. 자기 계획 자기가 선호하는 바 다 정해놓았습니다. 결국 기도하는 이유는 지가가 하고자 하는 일에 결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로는 절대 하나님의 음성을 못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더라도 자기 소리를 듣습니다.
추인해 주라는 것도 내려놓고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최선이라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저와 같은 경우도 어떤 일꾼들을 세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가장 방해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내 생각인가 하나님의 음성인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데, 어떨 때는 이럴 때가 있어요. 저는 이 분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세우지 말라 하면 확실히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런 분을 세우고 싶지 않는데 하나님이 세우라고 하십니다. 이런 경우는 확실히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자기 생각입니다. 따라서 자기 생각 자기 목표 자기 선호하는 바 자기 계획 그 일에 대한 자기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구하여 서야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면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서야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습니다.
4.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자기 생각이고 또 다른 것이 환경입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면 염려와 근심이 생깁니다. 곧바로 혼돈으로 이어집니다. 그런 가운데서는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들을 수 없습니다. 혼돈만 있을 따름입니다.
요한 웨슬리 선생님이 하루는 길을 가는데 담이 있었어요.
당나귀 한 마리가 담을 뚫고 쳐다보려고 노력을 하더래요. 어리석은 짓이지요. 고개를 들고 담 너머로 보면 보일텐데 담을 뚫고 보려고 하니 보이지 않지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너무나 많이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못 듣습니다.
환경이 하나님의 음성을 가리웁니다. 번민과 혼돈만 있을 뿐입니다.
환경 너머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제가 직장을 다닐 때 한번은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직장에 앉아서 일을 하는데 이런 생각이 떠 놀라요.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했는데 말랐지요. 베드로가 무화과 나무가 말랐다고 하니까 그것을 통해서 가르치시잖아요.
누구든지 이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하고 그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이 생각이 나요.
그래서 남산을 보면서 적용을 해보았지요.
남산을 향해서 내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들려서 한강에 떨어져라 말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된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까 하고 노력하면 할수록 의심이 더 생겨요.
의심이 훨씬 많이 생겨요.
그날 저녁에 집에 가서 성경을 펴보니까 해답이 거기에 있었어요.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어요.
무슨 말이냐면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께 있을 때 하나님은 능히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울 능력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분이 하실 수 있다는 신뢰함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분별할 때 환경을 넘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능히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그분의 자원과 능력으로 반드시 이루실 것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가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개인일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환경을 보지 않습니다.
돈이 얼마든지 우리 현실에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그것을 보지 않습니다. 제가 그것을 본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이곳으로 올 때도 그 당시 성도 250명 정도 될 때인데 우리가 그 당시 1500평 이상의 땅이 있어야 하고 땅값만 해도 26억입니다. 건축비는 얼마다 들고요. 우리가 20억은 커녕 1억도 없고 성도들 중에 부자로 없는데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전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환경을 보았더라면 하나남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제가 따라가면서 주님이 제가 가르치신 것이 그것입니다.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에 가두어두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따라가는 과정을 통해서 가르치신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환경을 완전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우리 자원으로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등등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만 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내려놓고 주님의 뜻이면 당연히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그분의 능력으로 채우실 것을 신뢰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뜻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이루십니다.
5.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 부분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자세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지난 번에도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수시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귀 있는 자는 들이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17차례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귀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시가 시편 119편입니다.
여기서 기자는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에게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너무너무 부족합니다.
예수님이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하는 것이 한번 기록되어 잇습니다.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드리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하는 17배나 말씀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이미 살펴보았지만, 계2장 2-3절을 보아도 그 부분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예수님은 소아시아 교회 일곱교회에 편지하명서 잘한 일은 먼저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이 에베소교회를 칭찬하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하나님이 그들을 칭찬하시되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분별력과 오래참고 인내한 것 그들이 게으르지 않은 것을 칭찬하십니다. 한국교회 중에서 이처럼 칭찬받을 교회가 많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첫 사랑을 버렸으니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촛대를 옮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많이 예레미야 시대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수님시대의 종교지도자들처럼 너무나 많이 자기 소견대로 행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합니다. 자기의 신학적인 주장대로 행합니다. 자기들의 전통대로 행합니다. 자기들의 안일한 자세와 태도대로 행합니다.
그런 그릇된 자세로 행하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음성 앞에 경청하는 자세를 주 앞에 엎드려 주님의 길과 의중을 깨달아 삶을 조정하여 그 가운데 있기를 구하여 주님을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엡6장 18절에서 사도바울은 무시로 기도하되 성령안에서 기도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시로 순간순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하는 자세가 포함되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에서처럼 베데스다 못가를 갈 때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많은 환자 중에서 38년된 병자에게 가서 치유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중을 발견하고 순종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시대건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중을 주시하여 보고 그것에 온 삶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필수적인 중요한 다섯 가지 자세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런 자세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신학적인지식에 불과합니다. 신학적인 지식이 중요하지만 수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로 이런 올바른 자세로 돌이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가운데 행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 가운데 거할 뿐만아니라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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