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
누가복음 5:15-16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세주 전부터 하나님의 음성과 성경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여러 가지가 필요한데요.
그중에서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필수적입니다.
1.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이 필수적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위해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남은 시간을 그저 하나님 앞에 선다는 자세를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 앞에 거의 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중보기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할 일 다 하고 남은 시간에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한다면 여러분 일 년이 다가도 하나님 앞에 설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반드시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이런 모범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이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우선시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게 펼쳐졌습니다. 말씀의 권세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놀라운 성령의 사역이 나타났어요.
치유되고 귀신들이 쫓겨가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전국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목적 그 일을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16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몇 주 후에 전국 집회가 있는데 전국에서 집회에 참석하려고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강사가 기도원 가버렸어요.
그런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안되었는데 영어성경에는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는 것입니다. often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우선시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그 시간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사실 주의한 것은 엑스트라 마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누가 너희를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가라. 오리라고 번역된 말이 원 마일이라고 하고 다른 일마일 가라고 하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것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느냐면 예수님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속국이었어요.
법적으로 로마 군인이 누구를 만나면 오리 즉 1마일은 짐을 들고 가도록 명령할 수 있었어요.
짐을 들고 가다가 유대인을 만나면 너 이것 좀 들어주어 라고 오리 즉 1마일은 명령할 수 있었어요.
갈 때 사람들이 불평을 하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누가 너희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오리를 더 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로마 군인이 얼마나 놀라겠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불평을 할 텐데 시키지도 않는 오리를 더 가는 것이어요.
지금 그것을 주님이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더라도 꼭 의무적으로 해야 할 부분보다 엑스트라 마일을 갈 때 하나님이 특별히 역사하십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수년전에 1월 1일 아침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면 가족단위로 다 기도해주었습니다. 지금은 수가 많아서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기도하고 교제하다가 집에 5시에 들어갔습니다.
1월 1일이고 전날 밤에 송구영신예배가 있었으니 그날 아침 아무도 안나올 것이잖아요.
그래서 나라도 나가야지 하고 나가서 앉아있는데 하나님이 놀라운 말씀을 주셨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엑스트라 마일을 갈 때 함께하셔요.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그것이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2.충분한 시간을 정기적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두 단어는 충분하다는 말과 정기적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식시기도처럼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기도하는데 약 30초 기도합니다 그리고 할 말이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라지 마세요.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경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충분한 시간을 정기적으로 주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려는데 온갖 종류의 생각이 떠오릅니다.
어젯밤에 보았던 연속극도 생각하고 기도하려고 했는데 온 시간동안 잡생각만 하다가 끝났어요.
괜찮습니다.
내일 또 엎드려 보세요. 내일도 한 30분정도 엎드려 보세요.
그런데 또 잡생각들로 온통 지배합니다.
기도 한마디도 못했어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또 엎드리세요. 이렇게 해서 4-5일 가다보면 잡생각들 금방 사라집니다.
오늘 기도 안된다고 염려하지 말고 충분한 시간을 정기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건강한 일상을 가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제가 아는 목사님이 한번 설교하면서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성경을 가장 많이 보았을 때가 언제나면 하루에 성경 3장씩 보았을 때라고 해요.
우리는 그럴 거여요. 겨우 세장 그것도 성경이라고 읽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부터 30장씩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노력합니다. 하루에 4-5시간씩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읽는 것보다 하루에 3장씩 하루 일상으로 읽은 것이 훨씬 더 많이 읽습니다.
우리는 기도도 그렇지요.
하루에 4-5시간씩 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노력하는 것보다 하루에 30분이면 30분 1시간이면 1시간을 일상으로 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충분한 시간을 정기적으로 서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일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마가다락방에서 최후만찬을 하고 난 다음에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시는 내용입니다.
39절입니다.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습관을 좇아라고 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일상을 말합니다.
여러분 기도가 습관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기도가 습관적이 되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습관적이 안되지만 습관처럼 해야 합니다.
그것이 건강한 일상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실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시면서 공생애를 갈릴리에서 주로 보냈습니다. 예루살렘 지역에서 사역은 마지막 일주일만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여러번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으로 보고합니다. 그러나 전체 사역에 비하면 짧은 기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지역에서도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가륫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기 위해서 만찬석상을 떠난 것이 만찬을 들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겟세마네 동산으로 잡으러 온 것을 보면 가룟유다도 이미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가시는 장소였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도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을 갖고 음성을 들으려면 정기적으로 충분한 시단을 엎드려야 합니다. 그것을 건강한 일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3.일상생활에서 떨어지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여러분 텔레비전 켜놓고 거기서 기도해보십시오.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 못듣습니다.
사무실에서 결제할 것 잔뜩 쌓아놓고 기도해보십시오.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 못듣습니다. 음성은 커녕 온갖 종류의 생각들이 날 것입니다.
제가 건축하면서 우리는 경제적인 면 때문에 크게 압박이 있고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할 때 생각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기도하려고 엎드리면 별 생각이 많이 납니다. 한 가지 한 가지에 대해서.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만남의 시간을 일상의 생활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를 들었는데 아까 읽은 본문 말씀에 16절도 예수님이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도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 똑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막1장 35절입니다.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의 기도가 나옵니다. 모세가 회막을 세웠습니다. 회막을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웠습니다.
33:7절부터입니다.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여기 장막은 모세의 장막이 아닙니다. 다른 장막을 말합니다.
진 밖에 쳤다고 합니다. 진과 멀리 떠나게 했고 회막이라고 하지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진 바깥 회막으로 나갔습니다.
이 회막을 진에서 멀리 떨어지게 했습니다. 일상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반드시 기도원에 가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상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미국유학을 갈 때 환경적으로 불가능했다고 했지요.
그때 한편 감사한 게 우ㅠ리 동내에 큰 감리교회가 있었는데 기도실 문을 항상 열어놓았어요.
저녁에 퇴근하면서 항상 거기를 들러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한번도 노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힘이 나고 믿음이 생깁니다. 그 다음날 환경을 바라보면 또 무너집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하나님이 또 예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공간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공간이 일상을 떠난 공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가져야 되는데, 만남의 시간을 위해 세 가지 필수적인 것은, 첫째 그것이 우선시되어야 하고, 둘째, 충분한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져야 되고 세 번째는 일상에서 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묵상이 필수적입니다.
시편 1:1-2절입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세우시며 명령하십니다.
수1:8-9절입니다.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기 보면 묵상이 중요합니다.
저는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듯이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남자들이 신문을 읽는 것처럼 읽어야 합니다. 신문 읽는 것만큼만 성경을 읽어보세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듯이요.
범죄가 일어났다면 범죄가 일어난 시간은 언제인지 잃은 물건은 없는지 등등.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인지 설명하겠습니다.
사1장을 봅시다.
여러분이 이사야 1장 1-20절까지를 읽었다고 가정합시다.
다 읽어야겠지만 시간 관계상 몇 구절만 따로 읽겠습니다.
4절입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여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이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10-15절입니다.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우리는 이런 본문을 읽으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 그 당시 사람들 참으로 타락했다.
얼마나 신앙이 타락했으면 하나님이 예배를 안받으셨을까? 얼마나 타락했으면 하나님이 저들을 소돔의 백성이고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불렀을까? 참으로 타락했구나.
4절에 보니까 저들이 하나님을 버렸구나 하나님을 멸시했구나 그러니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갑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렇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저들이 어떠한 상황 가운데 있었고 왜 하나님이 저들에게 이처럼 말씀하셨고 저들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떻게 느꼈을까 등등을 하나하나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10절 이하를 보면 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은 한번도 빠지지않고 지켰습니다.
그들은 또 월삯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월삯이 뭔가 알아보아야지요.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유대달력으로 매달 첫날을 말하는구나. 그러니까 유대백성은 매월첫날을 하나님께 예배드렸구나. 매월을 하나님 앞에 시작한다는 의미로 월삯예배를 드렸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뿐만아니라 저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수송아지 수염소 어린양을 드렸어요.
돼지나 낙타 같은 제물을 안드리고 하나님이 드리라는 것을 드렸어요. 저는 것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살진 짐승을 드렸어요. 다시 말해서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자기들의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하게 드렸습니다.
또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자 그러면 보십시오.
저들은 그렇게 예배를 잘 드리고 헌금을 많이 드리고 절기와 대회를 지키고 예배를 정성을 드려 예배했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문제가 달라지지요. 왜 하나님이 저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시지?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고 다른 우상숭배를 하는 것을 생각하지요.
그런데 주일날 예배 빠지지 않고 나오고 새벽기도도 안빠지고 헌금도 많이 드리고 금식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잖아요.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이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제 문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의미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우리가 잘 알듯이 호세아서를 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구약 선지서들을 보며 같은 시대에 쓰인 성경을 보면 도움이 많이 됩니다.
호세아 6장 6절을 봅시다.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애를 원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합니다.
이 구절도 표면적으로 가면 하나님이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주일날 예배에 안나옵니다. 그러면서 헌금도 안합니다. 본질이 중요하지 뭐 헌금을 해. 그러면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제사와 번제를 원치 않는다고 했잖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고 번제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어요.
말라기서를 보면 제사장들이 병든 것을 드리니까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하셨는데요.
우리는 성경을 사건을 취재하듯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과 의식을 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입니다.
그리고 의식도 중요한데 의식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의식도 중요하지만 본질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본질이 없으면 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러데 호세아 1장을 보면 저들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인애도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저들이 볹질인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유일한 주인된 삶,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에서 떠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의식은 가득했습니다.
안식일을 빼놓지 않았고 월삯 절기와 대회 금식과 기도 희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돔의 백성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말하고 패역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또 그 예배를 마당만 밟는 예배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증오하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본질에서 떠난 백성을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본질에서 떠났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을 만홀이 여겨 경멸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사건을 취재하듯이 하면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지요.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방법과 길을 제시하십니다.
이렇게 성경을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듯이 읽으면서 묵상하면서 하나님 자신과 목적과 길들을 발견하게 될 때 그것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제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사야 1장을 대충 읽고 넘어가면 우리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도 넘어갈 것인데, 그런데 성경을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듯이 읽으면 그 말씀이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뚜렷하게 보여집니다.
그러면 그 앞에 납작 엎드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묵상이 필수입니다.
3.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순종이 관건입니다.
여러분 지난 주에 살펴보았지만 시119편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시입니다.
이 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리적인 연구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열망하고 사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몇 구절 읽었지요.
다시 한번 볼까요?
12절입니다.
“12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18절입니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26-27절입니다.
“26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27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깨닫게 해달라 주의 법을 알게 해달고 주의 길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뭐하기 위해서요?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여러 곳에 나오는데 대표적으로 33-34절을 보십시오.
“33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34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너무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과 목적과 길을 알기를 구하여 간절히 열망하고 기도하고 잇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냐면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대로 행하기 위해서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과 목적과 길을 보여주셨을 때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따라 우리 삶을 조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있어서도 핵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감명받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은 신앙이 타락해서 성경만 해도 설교만 하더라도 어떻게 설교를 듣기를 원하느냐?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마음에 감동을 받은 것을 은혜받았다고 합니다.
찡한 감동을 받기를 원해요.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찡한 감동을 받기를 원하고 매주일 찡한 감동을 받기를 원해서 그래서 비방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마약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마약처럼 더 강한 감동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찐한 감동을 주는 것을 설교 잘한다고 생각하면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떻게 설교하셨는지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셨어요. 찐한 감동이 오던가요.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주시지 않는한 예수님의 설교 별로 찐한 감동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마음의 감동을 주기 위해 설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시고 그 길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설교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이 타락하니까 하나님의 길을 깨닫는대로 순종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그것을 위해서 길을 알기를 구했던 시편 기자와는 달리 감동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듣기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를 스스로 속이는 자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속으면 억울하잖아요.
얼마나 분통이 터집니까?
비싼 것을 샀다 얼마나 화가 납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이 어리석은데 진짜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요.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러번 스스로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속이는 것 중 하나가 야고보서 1장을 봅시다.
약1:22절입니다.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무슨 말입니까? 감동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행하지 않는 자를 스스로 속이는 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리고요 앞으로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지만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이 더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몇 번 말씀하시지만 더 이상 말씀하지 않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 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지금은 들을 수 없는 분들이 있으면요
지금 하나님과 조용한 시간을 가지시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 시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순종하지 않는 것 있는가 살펴보세요.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잘 안보이면 하나님 깨닫게 해주세요 용서해주시고 다시 말씀해 주세요 순종하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십시오. 그것부터 회개하고 그것부터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되 한번 안들었다고 당장 거두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몇 차례 반복해서 말씀하셨는데도 순종하지 않으면 말씀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사13장 1절 이하를 봅시다.
하나님께서 하루는 시장에서 베로 된 띠를 사라고 합니다. 그 띠를 가지고 유브라데 강 까지 가서 바위 밑에 숨기라고 합니다. 숨겼더니 다시 가서 파보라고 합니다.
아니 언제는 숨기라고 하고 언제는 파보라고 합니다. 그래도 가서 순종했습니다. 파보았더니 썩어서 끈이 떨어집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ㅇ 허리에 차는 띠처럼 소중하게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존재 자체는 베처럼 선한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소중하게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고로 베가 썩어서 떨어진 것처럼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예레미야가 순종했을 때 다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순종했을 때 다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청사진을 다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한 만큼 말씀하시고 순종하면 다음 단계를 말씀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등불 하나만 있으면 갈 수 있습니다.
등불을 멀리 비추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 발밑은 비추십니다. 그만큼 가면 비추고 그만큼 가면 비춥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에 등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종할 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더 알게 됩니다.
오늘 저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되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통로가 성경입니다.
성경과 기도로 하나님 앞에 기다림이 없이 그저 예언적으로 주어지는 꿈과 환상이나 마음의 그림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이 필수이고 성경을 묵상함이 필수이고 순종이 관건입니다.
오늘 말씀 시편 기자처럼 성경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앞에 서고 순종하고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더 깊이 알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성경을 통해 더 선명하게 보고 믿음으로 동참하여 더욱 더 큰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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