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리즈설교/하나님 음성듣는 것

제5강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오해

by 오용주목사 2016. 9. 16.

5강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오해

 

 

오늘부터는 몇 주에 걸쳐서 성경과 하나님이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오해 특별히 성경과 관련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두 가지를 살펴보겠는데,

 

1. 하나는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오해입니다.

 

이것이 오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우리는 성경을 잘 연구해서 우리 삶에 잘 적용하면 된다. 따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 많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실재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서 잘못된 사람들이 있기도 하지요.

그래서 그들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보다는 안전한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즉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요하지 않고 성경을 잘 연구하여 우리 삶에 적용하면 된다는 주장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론이 나옵니다.

 

이 결론은 이런 주장에서 나오는 결론입니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다윗 베드로 바울 그들 모두는 우리 신앙의 본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런 주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반박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은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저들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우리의 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도 우리 신앙의 본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은 성도들의 결정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각자가 우리 삶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일을 성경을 잘 연구해서 적용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에 의하면 성도들이 성경적으로 결정한 결정이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예를 들면, 우리 부르심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제가 목회자가 되었다. 성경 어디에 제 이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있습니까? 없지요.

성경 어디에 제가 목사되라고 나와있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목사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똑같은 목사여도 사도바울은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교회를 자라게 하는 사역인 반면에 자신은 교회가 전혀 없는 지역에 교회를 처음으로 세우는 기초를 세우는 사역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의 뒷받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을 위해 성경공부를 통해서 저들을 양육하는 사역을 했다면 나름대로 열매를 맺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서 볼 수 있는 놀라운 사역은 안 나타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부르심의 자리에서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르심의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거든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되 교수로서 살지 사업가로서 살지 아니면 직장인으로 살지 이 모든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그것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계시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잘 연구해서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하나하나가 필요하지만 그렇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 개인적인 결정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 말은 성경적으로 틀린 말입니다.

 

교회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포도나무교회도 하나님이 부르신 푯대를 선명하게 보아야만 합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 요즘 포도나무교회에 갔더니 은혜받았다 하고 오셨다면 나름대로 귀하지만 죄송하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전혀 못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그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전 2장에서 내가 너희가운데 있을 때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3장에서도 모든 것들을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해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여기 보면 사도바울은 그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 주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안에서 그의 부르심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이것이 부르심 비전입니다.

그런데 이렇다고요.

이 부르심의 푯대는 언제 선명하게 보이는가?

주님을 간절히 구할 때 보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런 것을 여러 번 경험했는데요.

제가 주님을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이 저를 부르신 부르심이 소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요.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는지 내 삶을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것인지를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여러 번 보이셨기 때문에 잘 알잖아요. 그리고 포도나무교회 비전만 해도 다 정리해놓았잖아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론적으로 알지 몰라도 제가 주님을 구하지 않으면 부르심의 비전이 푯대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포도나무교회만 해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그 부르심의 푯대가 선명하게 보여서 그 푯대를 향하여 오늘도 달려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우리 각자가 주님을 간절히 구해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교회면 교회적인 부르심의 푯대가 보여질 때 우리 속에 열망이 생겨요.

그리고 어디에다 우리의 돈을 투자할 지 에너지를 투자할지가 보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우리 인생을 투자할지가 보인다고요.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는 삶만큼 우리에게 삶의 만족과 기쁨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요. 주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요.

그 삶에 거하는 것보다 더 순종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대로 그런 주장에 의하면 세 가지 결론이 나오는데 결론이 다 틀립니다.

 

그러면 이 주장에 대한 반박을 살펴봅니다.

 

1)모세 이후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 보세요.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시기를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고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호수아는 기록된 말씀의 토대위에 살되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요단강을 건너고 나중에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했습니다.

성경을 당연히 가지고 있었고 열심히 묵상하고 적용하는 것이 필수였지만, 여호수아는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외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이사야가 그랬고 예레미야가 그랬고 사무엘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하나님이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낸 사건을 봅시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낼 때 구약성경에 복음이 이방인의 집에 전파될 것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야고보가 아모스서 911-12절을 인용해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었는데, 베드로의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하다고 증언할 수 있는 계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베드로의 눈을 그 성경에 집중하게 하시고 그래서 보내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환상을 보게 하셨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게 하셨고 성령께서 말씀하셨고 고넬료에게는 천사를 보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성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토대 위에서 살되 철저하게 그 말씀을 연구하여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2)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속은 우리 중 아무도 본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외에 예수님의 삶, 예수님이 가지셨던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의 본보기입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우리에게 예수님을 닮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사역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삶을 먼저 사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포도나무의 삶을 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예수님이 아버지안에 아버지가 예수님안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14장에 보면 이 부분을 알 수 있어요.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0:37절입니다.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예수님이 아버지안에 아버지가 예수님안에 관계를 통해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14:12절입니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안에 아버지가 예수님안에 라는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삼위일체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말합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1412절을 보면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만일 삼위일체관계로 말한다면 우리 중에 아무도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말하는 포도나무의 삶을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가운데 사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렇게 친밀한 관계안에 거하시면서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동참할 때 아버지가 우리를 통해서 아버지의 능력으로 일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정확하게 이런 삶을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합니다.

“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 그보다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니라

 

그러면서 요15장에 보면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포도나무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4절부터입니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똑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4복음서 다 성령의 사역의 회복이라는 책 1장에 기록한 것처럼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이렇다고 한 대로 제자들에게 똑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은 마태복음대로 마가복음은 마가복음대로 누가복음은 누가복음대로 똑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사역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까 주장이 틀립니다.

 

 

3)성경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포함해서 우리 모든 삶과 사역과 신앙에 유일한 기준입니다. 그 외에 어떤 기준도 없습니다.

 

성경이 기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제 너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똑같이 하라고 합니다.

성경이 기준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 그것도 성경이 기준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가? 그것도 성경이 기준입니다.

 

 

4)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모두 단순히 성경을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베드로 시대건 바울시대건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요했고 오늘날은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음성을 듣는 것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는 것이 성경을 쓰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뜻을 전하신 것은 성경을 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도.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모든 것들이 성경을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인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큰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사막으로 갔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사막으로 내려가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디시 말해서 모든 시대에 걸친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서 사막으로 내려가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뭐하기 위해서? 애굽에서 예배를 드리고 에디오피아 국왕 국고를 맡은 내시를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것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인도하시는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내용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개인을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이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이 우리 개개인을 인도하십니다.

 

5)성경을 잘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주장은 불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성경을 잘 연구해서 우리 삶 속에 잘 적용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연구하여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체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11장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심지어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막으신 것과 사단이 막으신 것을 분별할 줄 알았습니다.

성령께서 막으실 때는 하나님의 다른 뜻을 찾아 그리로 갔고 사단이 막을 때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이 길을 열어서 그리고 가게 하시기를 구했어요.

환경이 막힌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면 전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오해입니다.

 

 

2. 두 번째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성경에 더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1)우선 성경에 더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몰몬교가 그렇습니다. 몰몬교는 성경에 몰몬경을 더합니다. 그리고 몰몬경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이단입니다.

다른 이단들도 다 성경을 인용합니다. 성경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에 덧붙힙니다.

성경에 덧붙히는 것은 이단이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성경에 덧붙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이제까지 성경에 나와있지 않는 새로운 진리를 들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사단이 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성경에 더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그들은 잘 연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성경에 더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우리 삶 속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나와있는 진리를 우리 삶 속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의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한쪽 극단은 바리새인의 위험입니다.

그것은 교리적으로는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그들은 교리적으로만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나 목적이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다른 쪽 극단은 신비주의입니다.

자기들이 듣는 하나님의 음성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모든 환경이나 성경을 자기들이 듣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극단입니다.

우리들은 이 양쪽 극단을 배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말씀과 성령의 조화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며 적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신앙이 철저하게 말씀의 토대 위에서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토대 위에서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개인적인 살아있는 교제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이 음성을 듣는 것도 분별하는 것도 성경을 통해서 그 원리를 따라 분별하고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살아갈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성경에 관계를 살펴보면서 첫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오해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열지도 않고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편견입니다.

성경을 자세하게 보면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하게 보면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제가 왜 이런 부분을 살펴보느냐면 제가 여러분에게 신학적인 지식강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편견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위해 마음을 열고 그분께로 나오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꼭 붙잡고 있으면서 전혀 안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면 아무리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라도 말씀에 비추어서 틀리면 기꺼이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은 자세가 겸손한 자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고 나올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드린대로 앞으로 어떻게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인가?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