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롬4:17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우리가 주일날 낮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시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의 필수성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어떻게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믿음과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과의 관계를 살피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두 가지로 요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의 전 존재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앞서 가신 주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전적인 헌신과 온전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을 간단하면서도 정확하게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여호수아가 사무엘이 다윗이 무엇보다 우리 모델이신 예수님이 베드로가 바울이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신앙은 이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요 하나님이 행하심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 삶은 다른 말로 하면 포도나무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아버지안에 아버지가 예수님안에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보면, 요10:37-38절입니다.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예수님이 아버지안에 아버지가 예수님안에 거하는 친밀함 안에 거하셨고 여기에서 모든 사역이 나왔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0절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여기보아도 정확하게 예수님이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있었고 여기서 사역과 모든 말씀이 나와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삶을 살라고 요15장에서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친밀함 가운데 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할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요 또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이 세 가지를 계시하십니다.
첫째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보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이시는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나오도록.
둘째는 하나님이 앞서가실 때 우리가 따라가려면 우리의 자원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믿을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로 하나님을 믿고 따라오도록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계시하십니다.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 일에 동참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에를 들면, 모세의 예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오셔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출34장에 보면 하나님이 영광중에 임하셔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보이신 것입니다.
출3장을 보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에 나옵니다. 거기에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친히 함께하셔서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셔서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모든 자원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며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생명이 넘치게 하셨던 것처럼 모세에게도 지금 그렇게 하시겠다고 그 자리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하신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시고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그 일에 초청하시고 그 일을 위해서 본토 아비 친척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렇게 시작하신 그 일을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셔 그 일을 하시려고 하시기 때문에 그 일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뿐만아니라 야훼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야훼 하나님이라는 말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는 주권자 창조주 통치자 하나님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야훼라는 말은 우리가 영어로 일반적으로 I AM WHAT I AM 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렇게도 번역이 됩니다. I WILL BE WHAT I WILL BE. 이 말은 내가 앞으로 이룰, 지금 이런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이렇다. 영원전부터 영원끝까지 여상하다. 앞으로 이룰 그것을 통해서 내가 바로 야훼 하나님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모세를 부르시면서 싸인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네가 나와서 이 자리에서 나를 경배하게 될 것인데 그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바로 그렇게 행함으로 바로 너에게 내가 야훼 하나님임을 보이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왜 야훼 하나님으로 보이셨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시는 것을 위해 부르셨는데 이 일이 모세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세를 부르시는데 믿음으로 나오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셨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사역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고 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사역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이 사무엘이 다윗이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바울도 베드로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실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셨어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셨고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셨고 여호수아에게 사무엘에게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셨어요.
그리고 저들이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함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것이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목적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참여하도록.
그래서 그 시대에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알리시지요.
또한 그런데 하나님은 또한 모세에게 하나님의 길을 알리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알리신 다음에 이제 네가 한 번 열심히 해봐라. 열심히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기도하고 사람들을 동원해서 그 일을 이루어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일 모세가 그렇게 했다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알리십니다. 어떻게 할 것을 알리십니다.
어떻게 장로들에게 말할 것인지 어떻게 백성들에게 말할 것인지 바로에게 어떻게 말할 것인지 바로가 말을 듣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방법을 알리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할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역사하심으로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아이 성은 작은 성이라 자기들의 힘대로 하면 될 줄 알고 갔다가 대패를 합니다.
나중에 다시 아이성을 정렴할 때는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갔을 때 승리했습니다.
기도온을 통해 미디안을 물리칠 때도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다윗을 통해서 승리를 거두실 때도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방법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방법을 게시하십니다.
이처럼 아까 말씀드린 그런 신앙생활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목적을 계시하시고 방법을 계시하십니다.
사실 이 세 가지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요하고,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 의도를 아는 것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아는 것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나오는 것이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하나하나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듣는 것이 되어지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3.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고 목적을 계시하시고 방법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찾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제가 성경 몇 구절을 읽겠습니다.
대상28:9절입니다.
“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주일날 교회 안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안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시대에는 안식일 뿐아니라 대회와 절기를 지켰고 수많은 예배와 금식과 기도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에서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이들이 나를 버리고 멸시하고 멀리 갔다고 하셨습니다. 사1:4절입니다.
예레미야시대에 보면 그 시대에 인도에까지 가서 특별한 향료를 사다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대단한 헌신이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빼놓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렸습니다. 다른 많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렘:14절에서 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범했으니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니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고합니다.
그 신앙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빼놓지 않고 지켰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 바리새인들에 비하면 신앙도 아닙니다. 열심도 아닙니다. 의식만을 가지고 따진다면요. 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성경을 말합니다. 심지어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십니다.
아까 말씀드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하나님의 행하심에 온 삶을 동참하고 동행하지 않는 삶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기를 네게 여호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대하15:2절입니다.
“2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보십시오. 찾아야 만납니다. 찾되 마음을 다해 찾아야 합니다.
렘29:13절입니다.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대하15:15절입니다.
“15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호6:3절입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요즘에 어느 때보다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열망하고 계십니다.
이번에 비전트립을 인도하면서도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더라고요.
저 자신을 보아도 믿음의 선배들에 의한 제 신앙생활은 신앙생활도 아니어요.
믿음의 선배들은 보면 새벽기도를 하더라도 오리 십리를 걸어다니면서 하셨어요. 눈이 오고 비가와도 열심을 냈습니다.
산기도도 열심을 했어요. 비가오나 눈이 오나.
부모님에게 맞으면서도 열심을 냈어요.
사실 이런 일은 우리나라 믿음의 선배들이 했었어요.
사실 우리 봉사 이야기 나오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생활도 아니어요.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사랑할 것인데.
조금 뭔일만 있으면 다 돈으로 해결하려고 해요.
그것은 신앙도 아닙니다.
본질이 없을 뿐아니라 의식도 없습니다.
사실 이처럼 가다보면 유럽교회와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유럽 교회 박물관과 같아요. 너무나 크고 아름다운 건물인데 가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몇 명 앉아있어요.
그렇게 안된다는 보장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 자신을 보더라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살았던 신앙생활에 비하면 부끄러울 만큼 초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그분들에게 부은 것보다 더 많은 은혜를 붓고 계셔요.
왜 그럴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이 백성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이 임재를 거두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인한 질투로 인하여 일어나 역사하신다고 하셨어요.
오늘날이 그런 것 같아요.
오늘날 우리 신앙이 너무나 타락하여 모양뿐인 그래서 세상은 교회를 조롱하고 멸시하고 예수믿는 자들을 정신병자취급을 합니다. 하나님을 발가락의 떼보다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로 인하여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위하여 질투하사 우리 가운데 은혜를 부으시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요. 얼마나 그 열정이 크던지 예를 들면 제가 이야기한대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삶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데도 그런데 몇 시간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지 않아도 어떤 때는 쇼파에 앉아서 하나님을 알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주세요. 식사할 때도 잠자리에 들때도 하나님 하나님을 알게 해주세요. 제가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하는데 제가 하나님을 알지 못해요.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향하기만 해도 주님이 곧바로 함께하십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아까 우리의 신앙의 이런 것이라고 수없이 설교를 듣는데도 우리에게 실제가 안되는가? 왜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수없이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왜 나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와 의중이 전혀 안보이는가?
하나님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보다도 그 삶을 살도록 더 큰 은혜로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시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계시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삶을 못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몇 번 들었기 때문에 안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전혀 그런 삶을 못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확하게 바로 바리새인들의 삶입니다.
그것이 이론이 실제를 대체해버리는 죽은 정통주의 율법주의 거짓 신앙체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 가운데 너무나 팽배합니다.
사모함도 없습니다. 갈급함도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계시하십니다.
4. 믿음과 하나님의 음성
우리 신앙을 전반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만 해도 믿음의 성격만 해도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올바른 믿음을 위해 올바른 교리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진짜 보수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당시 성경이 구약성경인데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다 받아들였고 그 모든 말씀을 다 믿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도 정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23:2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저들이 가르치는 바를 반드시 지키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들이 가르치는 바가 틀렷다가 제자들에게 저들이 말하는 바를 반드시 지키라고 하셨겠어요?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나와있는 모든 교리를 다 믿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진리를 다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리가 정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마지막 절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안믿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나와있는 교리를 그대로 믿으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러면 네 믿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임을 믿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분임을 믿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습니까? 이처럼 교리들을 믿으면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말하는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 하나님을 존재를 다해서믿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믿었을지 모르지만 성경에 말하는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전혀 하나님을 안믿는 삶이었습니다. 열매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은 전혀 안계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도 전혀 하나님 앞에 안 설 것이고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자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진짜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땅을 떠나가면 하나님 앞에 설 것이고 우리가 이땅에서 선 삶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진짜 믿는다면 절대로 이렇게 안 살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에 관한 교리적으로는 믿지만 살아계신 그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열매는 믿음이 없는 삶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까 본문으로 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되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는 말은 지금은 없더라도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에 지금 존재하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
바꿔 말하면 말씀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보십시오.
그가 처음에 믿음이 약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고 열방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10년이 지났는데도 자식이 안생기니까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시는 줄 아십니까? 실제로 하나님을 안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심각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중동에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이 자랐는데 어느 정도까지 갔는가?
자기의 몸과 아내의 몸이 죽은 같음을 알고도 즉 아이 생산하는 면에 있어서 이미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연약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받을 때도 하나님이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서울대 병원을 가보았더니 의사가 이 병은 의학적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고 하면 그 말을 듣고나면 믿음이 싹 사라집니다.
이것은 원래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몰라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몸과 아내의 몸이 아이 생산하는 면에서 죽은 것 같음을 알았으면서도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자식을 주셨어요.
그런데 그 믿음은 초보단계에 불과했습니다.
나중에 보면 이삭이 컸을 때 그 자식을 모리아산에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삭이 누구입니까?
또 번제가 어떤 제사입니까? 제물을 죽이고 각을 떠서 조각으로 내서 다 태워 연기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삭을 이런 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100세에 나은 늦둥이일 뿐아니라 그 이삭안에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삭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그가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그 재 가운데서라도 이삭을 다시 살리셔서 당신이 이삭안에서 약속하신 그 일들을 이루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재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 약속을 지킬 것을 믿은 것입니다.
실제로는 죽이기 직전에 말리셨지요.
여러분 그 단계까지 갈 수 있습니까?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아야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필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주도권을 잡으시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제가 포도나무 교회 처음 개척할 당시 이야기를 잘 하잖아요.
그때 교회가 한참 자라려고 해요.
그런데 교회 가운데 그때 어떤 모습으로 세워지기를 원하시는 것 같은데 성도들이 반발하고 잘 안따라오려는 것 같아요.
그랬더니 어느 시점이 되니까 하나님이 저에게 뭐라고 하시냐면 이제는 됐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고 하셔요. 처음부터 다시 내려놓고. 94년 8월 15일에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제 개인 재산 100만원도 없었어요. 교회에서 생활비를 타야 다음달 생활할 수 있어요.
당시에 분당에서 우리식구 살 주택 전세를 얻어야 해도 5천만원이 필요했어요.
5천만원은커녕 백만원도 없는데요. 주위에서 개척하면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실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런데 길이 없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어요.
우리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제가 사임한 다음에도 어떤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집에 가만히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분이 채우실 것이니까.
어떤 분들은 소위 하나님이 한다고 해서 무모한 일을 해서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하다가 안되어서 큰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신의 신념일 뿐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은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만히 기다릴 수 있느냐? 아무 것도 안되는데, 누구에게 가서라도 돈이라도 꾸어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면 자기 자원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채우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이렇게 믿음으로 의지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또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려면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주를 위해서 계획을 세워놓고 믿습니다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앞서 가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보이시기 따라가려니까 믿음이 필요했어요.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앞서 가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보이실 때 따라가려니까 믿음이 필요했어요.
하나님이 앞서 가지 않으면 믿음이 시작도 안된 것입니다.
우리가 계획해서 믿습니다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중 어떤 사람도 자기가 임의로 계획하고 나서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앞서 가시면서 자신의 뜻을 보이실 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앞서 가시면서 보이실 때 이것은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채우실 것입니다. 그분의 일이니까.
따라서 믿음이 있으려면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마음의 감동으로 주어지는 음성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위한 삶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의 신앙이 바리새인들과 똑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성경을 교리적으로 잘 믿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규칙들과 규례들을 행합니다.
십일조 드립니다. 또한 몇 가지 일을 합니다. 이런 것들을 하면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이런 것들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하나가 중요하지만 이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위한 수단입니다.
신앙생활은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해 순종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하면서 앞서가실 때 우리의 온 삶을 통해 주님의 삶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배도 헌금도 봉사도 기도도 이런 삶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많이 바리새인들처럼 이것 몇 가지하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양은 있지만 열매가 전혀 없습니다.
생명이 없어요. 하나님의 실제가 없어요. 신앙이 타락할수록.
우리들은 예수님이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너무너무 잘 압니다. 저 외식하는 자들.
그러면서 그것이 우리의 모습인 줄을 모르고 있어요.
믿음에 의한 삶도 제가 설명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살어 그럽니다.
왜? 그런 삶이 전혀 감히 와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여 믿습니다 하면 그것이 믿음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전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개인적인 확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기 뜻이 다르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믿습니다 했다가 일이 안되고 낭패를 보면 하나님은 시작하라고 말도 안했는데 자기들이 해놓고.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참다운 신앙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삶을 실제로 사는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안되어지기 때문에 애통해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주님을 찾는 것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애통함도 없어요. 그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만을 행하면 되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 신앙이 타락했다니까요.
한편으로는 이번 비전트립을 통해서 우리의 현주소를 하나님이 확실하게 보이신 것 같아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가 멀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주님을 찾고자 하는 애통함도 없는가를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로 인하여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 때문에 어느 때보다 하나님이 회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제일 타락한 교회입니다. 돌이키라고 그러면서 약속된 축복은 제일 큽니다.
어떻게 제일 타락한 교회가 약속한 축복이 가장 큰가.
안일할 때 돌이키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그렇습니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 때문에 과거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지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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