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이번 주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타부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이 이런 내용을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했다고 하면 그것을 기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정신병원에 가야한다.”
그만큼 하나님의 음성듣는 것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나하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의 필수성에 대해서 몇 주 동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파워포인트를 사용해서 전달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것의 의미
셋째,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의 관계
1.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께서 뭐가 영생이라고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어떻게 신앙의 본질인가 대한 부분은 호세아서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를 보기 전에 이사야서 1장을 보겠습니다.
호세아 시대와 이사야 시대는 같은 시대입니다.
사1장을 보면 많은 의식이 있었습니다.
사1:10-15절입니다.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
여기보면 그들에게 참으로 많은 의식이 있었습니다.
먼저 예배만 봐도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월삯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매월 첫날 드리는 예배입니다.
모든 대회와 모든 절기를 지켰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많은 희생을 드렸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많은 헌금이지요.
수송아지 살진 짐승들을 무수하게 드렸습니다.
많이 기도했습니다.
많은 금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6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이렇게 많은 의식이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인애(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하십니다.
그런데 호세아 시대에 바로 4장 1절을 보면 그 당시에 많은 의식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호세아 1장 1절입니다.
“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데 그땅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 4장 6절을 보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 있는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이 제시하신 해결책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 6장 3절입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이것을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신앙의 본질인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 신앙에 있어 본질입니다.
구원을 위해서도 성화를 위해서도 예배를 위해서도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2.하나님을 아는 것의 의미
이렇게 우리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모르면 우리는 하나님 따로 우리 따로의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신앙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쓴 책이 영적 분별력이라는 책입니다.
보시면 참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의 의미를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
또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의 성경적인 의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의미에 대해서 두 구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한 구절은 로마서 2장 17-20절이고 또 다른 구절은 요한복음 5장 37-39절입니다.
거기 로마서 2장 17-20절은 사도바울이 쓴 것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로마서는 서기 55년 경에 쓰여졌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신 때는 서기 30년 경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같은 시대에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롬2장 구절은 아주 중요합니다.
롬2:17-20절입니다.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
여기보면 그들은 성경안에 율법안에 하나님의 지식과 진리의 본체가 들어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율법으로 교육을 잘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자신의 생을 건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철저하게 연구하고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성경에 나온 모든 선한 것들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한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눈먼 자들의 인도자요 영적으로 어리고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랍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이렇게 자신들에 대해 생각했는데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십니까? 라고 어떤 사람이 물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당연히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안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실 것은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까 우리가 살펴 본대로 호세아서 4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을 때 이런 구절이 자기들에게 조금도 도전을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조상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했지만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 말씀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 구절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절을 가지고 설교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지식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고 설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아라고 말합니까?
그 종교지도자들에게 뭐하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한 마디로 말하면 “너희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
본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빛이요 소경의 인도자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너희가 소경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 차례 소경된 인도자여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이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37-39절은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여기보면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고 말할지 몰라도 거기에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실제로는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차이입니다.
도표를 한번 보여주세요.
먼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신학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적인 지식을 말하지요.
여러분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분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로 살릴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십니까?
이런 지식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이것은 자서전적인 지식과 같습니다.
자서전이라면 여기에 저희 부모님에 대해서 저의 태어난 과정 자라난 과정 제 취미 특기 교육 친구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나에 관해서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분이 나를 안 것입니까? 나를 안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나에 관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아는 것과 나에 관해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서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임을 알고 세상을 창조하신 분임을 알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임을 알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신 분임을 알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임을 알고 신실하신 분임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뭐냐? 자서전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제 자서전을 읽고 나에 관해서 아는 것과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 나와 사귐을 통해서 나를 아는 것은 다릅니다. 이렇듯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서 교육받는 것과 성경이 말하는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해서 잘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 그분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하루는 성전에 들어갔지요.
제사를 드리는 중에 하늘이 열렸고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계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실 뿐아니라 보좌에 앉으셔서 온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스랍들이 날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이렇게 말하면서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거룩하신 분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그날에 성전에 들어가서 성경책을 펴놓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이사야가 하나님은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성경적인 사실을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이사야가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성경적인 진리를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날 성경이 말씀하시는 천지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을 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교육을 통해서 배웁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신앙서적을 읽고 테이프를 듣고 해서 배우는 것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반면에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은 오직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컵처럼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물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면 물을 담기 위해 컵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가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면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의 삶에 변화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백번 읽는다고 우리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학을 많이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않습니다. 테이프를 많이 듣고 신앙서적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은 우리 삶 속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자 도표를 다시 한번 보여주세요.
이처럼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전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잘못알고 있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죽은 정통주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죽은 정통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볼께요?
“이 항복에 들어있는 가장 우선적인 문제꺼리는 인격자신과 더불어 옳은 관계를 맺기 보다는 그 인격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정통적이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꺼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교리에 관해서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잘못은 교리 참된 교리 인격에 관한 참된 교리를 인격에 서야 하는 자리에 세우는 무서운 위험입니다. 그것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사람들 정통적인 사람들이 흔히 걸려 넘어지는 매우 흔한 함정입니다.......사실상 죽은 정통은 이단만큼 나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죽은 정통은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바리새인들도 정통이였습니다.
그래서 마23장 2-3절에서 예수님안 자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행하고 지키되’라는 말은 영어성경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것이 정통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저들이 가르치는 바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했을까요? 이들의 가르침은 정통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정통이었을지 모르지만 성경이 말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교회를 보면 매우 심각합니다.
여러분이요 저요 매우 심각합니다.
이 부분은 아마 방송에서 짤릴 것입니다. 제가 짜르라고 언질을 주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1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예배 시간에 압도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2부 예배를 드리면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뭐가 느껴진 줄 아십니까?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아는 내용이라고 사모함도 없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팽배하게 느껴졌습니다.
설교하기 힘들만큼 아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을 안다면!
어제 한 형제가 제 사무실에 찾아왔습니다. 물론 그 형제는 그 형제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목사님 저부터 시작해서 우리 성도들 보십시오. 무슨 변화가 있는지, 목사님 이렇게 가다보면 10년 후면 목사님 목회에서 실패한 것 아닙니까? 제가 그래서 ‘그렇다’라고 대답했어요. 그 형제와 제가 똑같은 것을 보지만 관점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비판의 차원이 아니라 책임감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돌이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는 다 알고 있다고 팽배해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진짜 우리 삶이 전혀 다를 것인데. 지금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데. 지금 우리들의 삶이 바로 바리새인의 삶인데.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정확하게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은 정통주의입니다. 우리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앉아있는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3.하나님에 음성을 듣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관계
오늘 주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의 필수성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인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37-38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 말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는 말을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한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형용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음성이 너희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인격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세 가지가 포함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하나님의 형용(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용을 본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입니다.
아까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그분 자신 그분의 영광과 목적과 인격을 아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한 가지가 뭐냐면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음성을 듣는 것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이 두 구절을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의 구절은 요한복음 10:14-16절입니다.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여러분 예수님이 자신을 목자로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비유하셨을까요? 돼지로 또는 소로 비유하지 않고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셨을까요? 그 의도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요즘 시대는 그 말을 이해를 못합니다.
제주도 같은 데 가서 양을 치는 것을 보면 몇 백 마리씩 치면서 개들을 통해서 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양을 가족처럼 키웠습니다. 양마다 자기 이름이 있었습니다.
어디 갈 때도 이름을 불러서 안고 다니면서 이름을 불러내서 대화를 했습니다.
심지어는 같은 방에서 자기도 했답니다.
이처럼 양들은 주인의 식구와도 같았습니다.
이런 관계로 우리를 부르신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로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중에 보면 이사야 40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을 목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양으로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1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은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팔로 품에 안으시며 그 말을 영어로 보면 그의 심장 가까이 그들을 안고 나르신다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신 것은 우리들에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친밀한 교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10장에 보면 목표가 나오는데, 얼마나 친밀한 교제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아버지가 예수님을 아는 것처럼 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가지고 있는 친밀한 교제로 예수님이 우리를 알기 원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표입니다.
그러면서 필수적인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구절이 있는데 삼상3:7절입니다.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여러분 이 때는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나타나 사무엘을 부르신 때입니다.
그전에 삼상3장 1절을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엘리 제사장 때는 신앙이 지극히 타락한 때입니다.
그러나 의식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실로에 와서 많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드뭅니다.
이사야시대처럼 바리새인들의 시대처럼 의식은 많을지라도 신앙이 타락하면 살아있는 하나님과 실질적인 음성을 드뭅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이 사무엘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물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이 처음에는 엘리 제사장을 찾아가지요. 부르셨습니까? 세 번씩 일어나지요.
세 번째 갔을 때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을 엘리가 알았습니다.
다시 부르면 종이 듣겠사오니 말씀하시옵소서 하라고 가르쳐주지요.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엘리는 과거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가 사무엘에게 말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사실은 정작 본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교리는 정통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교리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절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사무엘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두고 삼상3장 7절에서는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사무엘이 하나님에 관해서 교육을 안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는 자리가 언약궤 앞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여기 보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필수입니다.
우리 신앙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사랑의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노아가 모세가 아브라함이 여호수아가 사무엘이 다윗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엘리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나중에는 듣지 못했습니다.
사울도 보십시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자 영매를 찾아갑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엘리야가 엘리가사 이사야가 예레미야가 호세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신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바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빌립이 스데반이 바울을 전도했던 아나니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을 위해 필수이며 핵심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존중합니다.
나름대로 성경에 나와있는 진리를 열심히 연구하고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자신들의 삶을 건 자들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연구해서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럴지라도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은 바리새인들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어떤 개인적인 교제도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그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신앙적인 요소들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타락한 삶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신앙생활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 가운데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과의 더 깊은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나아가리를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 모든 지체들이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으로 무장할 뿐아니라 실질적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의도와 의중을 알고 그 가운데 함께하며 주님을 알고 주와 더 친밀하게 교제하고 동행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시리즈설교 > 하나님 음성듣는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6강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0) | 2016.09.16 |
---|---|
제5강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오해 (0) | 2016.09.16 |
제4강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0) | 2016.09.16 |
제3강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0) | 2016.09.16 |
제2강 우리의 사역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0) | 2016.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