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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하나님 음성듣는 것

제8강 성경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

by 오용주목사 2016. 9. 16.

8강 성경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

 

 

고후1:20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3주 동안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하나님의 음성의 관계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 예를 들면 오늘날 이런 어떠한 가치관이 팽배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사업을 새로 시작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성경중에서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상황에서 좋은 약속이 무엇일까 살펴보는 중에 이사야 4110절과 같은 약속이 마음에 쏙 듭니다.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이 약속을 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취합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늘 묵상하고 붙잡고 늘 기도합니다. 그러면 그 약속이 이루어질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떡줄 사람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는 말이 있지요.

 

이런 자세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자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임의대로 취해서 자기임의대로 주장하고 자기 임의대로 믿고 자기 임의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의 뜻과 그 사람의 뜻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 어떤 자세로 받아야 하는가?

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약속을 주실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일반적인 약속과 둘째는 특수한 약속입니다.

 

 

1.일반적인 약속

우선 일반적인 약속이라는 말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요한일서 19절과 같은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은 모든 시대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자백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을 믿음으로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약속을 일반적인 약속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성취됨에 있어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아까 본문으로 읽었던 고린도후서 120절 말씀입니다.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안에서 예가 되니 여기 예라는 말은 예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안에 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우리에게 예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그리스도안에 거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안에서는 말은 당연히 예수 믿는다는 것을 말하지만 그러면 예수 믿으면 자동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포함됩니다.

하나는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친밀한 교제를 표현하면서 예수님이 아버지안에 아버지가 예수님안에 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예수님과 교제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예수님안에 예수님이 우리안에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안에라는 말은 그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본문과 요한복음은 저자가 다르기 때문에 용법이 다를 수 있지만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안에 그것이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안에라는 말은 사도바울의 서신서 전체를 볼 때 우리가 십자가 복음 위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의를 철저하게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서는 삶,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는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격체이신 하나님만을 알고 존재를 다해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의 온전한 주권적인 통치 가운데서 그분의 행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신앙의 본질과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으로 십자가의 공로만 의지하여 서는 삶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삶으로만 가능한데 이런 의미가 예수님안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우리에게 예가 됩니다.

무슨 말인지 복잡하지요. 제가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성경적인 이해는 성경이 말하는 복을 살펴볼 때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복에 대해 다른 기회에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오늘은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 그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복입니다.

신명기 3019-20절입니다.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하나님이 우리 앞에 두 가지를 두셨습니다. 생명과 복 그리고 저주와 사망을 두셨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을 택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생명과 복을 얻는 방법을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계명과 규례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그(하나님)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생명과 복을 두셨다고 하시면서 생명을 택하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네 생명이시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복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도 우리는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역대하 152절입니다.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실 것이다. .....

너희가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실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의미입니다.

함께한다는 말의 의미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며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적인 통치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 온 삶으로 동행하여 사는 삶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삶에서 떠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날 우리가 이사야 1장을 살펴보면서 이사야 시대는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고 월삯예배를 드리고 살진 짐승을 드리고 금식과 기도가 많았지만 신앙의 본질에서 떠났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시대에도 멀리까지 가서 특별한 향료를 사다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만큼 헌신적이었으나 신앙의 본질에서 떠났기 때문에 렘2:13절에서 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범했는데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신 나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이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되 자기들의 관점에서 자기들의 생각대로 하게 되었다. 아무런 생명도 없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 보십시오.

이렇게 신앙의 본질인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며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적인 통치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 온 삶으로 동행하여 사는 삶을 살 때 하나님도 함께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분이 복이기 때문에 그 삶을 살 때 여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복이 넘칩니다.

반면에 이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이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임재를 거두시기 때문에 이사야 시대처럼 예레미야시대처럼 바리새인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어떤 복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떠한 생명과 복도 없지요.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 설교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도 하나님의 생명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때 신앙의 본질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이 약속이 성취하는 것이고 반면에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아무리 의식이 가득해도 하나님이 임재를 거두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하나님의 약속도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19장과 호세아 4장의 대조입니다.

194절부터 읽겠습니다.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에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내가 너희를 내게로 인도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로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내 목소리를 듣고 지키고 살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고 제사장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호세아 4장을 봅시다.

이사야 시대와 호세아 시대는 동일한 시대입니다.

이때는 안식일 월삯 대회 절기 헌금 살진 짐승 금식 수많은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41절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6절입니다.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식을 버리는 것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을 대신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즉 신앙의 본질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본질에서 떠나니까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것은 신앙의 본질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안에 거할 때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안에 거한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인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며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적인 통치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 온 삶으로 동행하여 사는 삶을 말합니다.

이때에만 그것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때에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이때에만 하나님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이런 삶을 떠난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의 약속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에 너에게 말하기를 너와 네 조상의 집이 네 앞에서 영영히 행하리라고 약속하엿으나 이제는 그렇지 아니하리니 나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멸시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다는 말은 함께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고 멸시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엘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그 가문에 주신 약속을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명하게 보이시지요.

 

그러면 이렇습니다.

이렇게 신앙적으로는 의식적으로는 풍부할지 몰라도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러면서 성경에 나와있는 좋은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두고 성경은 뭐하고 합니까?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 예레미야서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저녁에 예레미야서를 강해하고 있습니다만 많은 부분들을 하나님이 계시하셨습니다.

참석하지 못한 분들은 반드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레미야시대를 보십시오.

안식일날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든 다른 희생들을 드리고 번제를 드리고 인도에까지 가서 특별한 향료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자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선지자들은 다윗에게 하셨던 약속들을 붙잡고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명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고.

이것을 두고 하나님이 반복적으로 뭐하고 하셨냐면, 저들이 거짓을 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외치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저들의 마음에 강팍한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평화를 외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거짓을 말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때만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을 보아도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가 된다는 말을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안에 거하면 즉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며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적인 통치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 온 삶으로 동행하여 사는 삶을 살면, 그러면 하나님이 성경에 말씀하신 그 모든 약속은 따로 추가로 말씀하지 않아도 이미 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미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학개서 2장을 통해서 선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학개서는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개축하게 되었는데, 중단되었어요.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포로에서 돌아오면서 성전을 지으라고 독려합니다.

그러면서 24절부터 봅시다.

4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

이 말을 그냥 읽어가면 잘 보입니다.

그런 성경을 읽을 때는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듯이 읽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굳세게 하라 힘을 내라 하면서 내가 너희와 함께하고 있다.

내가 애굽에서 너희를 건져낼 때 너희에게 언약한 바대로 이미 함께하고 있다.

이미 언약한 바대로 이미 성령이 너희와 함께 있다 그러니 힘을 내라 그말입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저들이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잇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어도 그 약속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성령이 함께하는 삶을 살 것이라는 말씀을 안하셨어도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을 때 이미 언약 가운데 약속하신 바가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너희는 힘을 내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됩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간단하게 생각하는데, 성전 짓는 것이 산에 올라가서 나무 배어다 지으면 되는데 이런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에서 돌아온 것이 주전537년이었습니다.

바벨론이 바사나라에 망합니다. 바사나라의 첫 번째 왕이 고레스 왕이었습니다.

그 고레스 왕이 원년에 칙령을 내려서 유대 백성으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리고 성전기물을 다시 가져가서 성전을 세우라고 합니다.

유다나라가 주전 587년에 멸망했어요, 처음 포로로 잡혀간 지가 605년입니다. 그로부터 70년만에 돌아올 것이라 했는데 거의 70년만이 돌아온 것입니다.

오게 되었는데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옵니다.

에스라 3-5장까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주전 536년에 성전개축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지역 주민과 사마리아사람들이 반대합니다. 상소문을 올리면서 반대합니다.

주전 고레스가 살아있는 동안 주전 536-530년까지 6-7년 동안 계속반대하고 그 다음에 왕이 된 자가 아닥사스다 왕 때도 반대하고 그 왕이 성전 짓는 것을 중단하라고 칙령을 내립니다.

그들이 반대한 명분을 유다백성이 반역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자기 나라를 세워서 바사에 대적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닥사스다왕이 성전을 못짓게 칙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10년 동안 방치됩니다.

그러는 중에 주전 520년에 학개와 스가랴 가 올라와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지으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성전을 지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반역행위입니다. 몰살됩니다.

그 상황에서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너희가 내 명령을 따르면 내가 애굽에서 건져낼 때 이미 약속한 대로 내가 이미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않고 내 영으로 말미암으리라고 했는데, 내 영이 함께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하셨는가 하면 주전 520년에 다리오가 왕이 됩니다.

그때에도 상소가 올라가는데 다리오가 자기 선왕들의 서고를 뒤지게 합니다. 고레스왕 원년의 칙령을 발겨하게 되고 성전짓는 것이 선왕들의 뜻으로 알고 허락을 합니다.

그래서 성전이 완성됩니다. 주전 516년에. 주전 586-587년에 파괴되었는데 정확하게 70년만에 성전이 회복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고 있으면 주님이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성경에 이미 약속하신 모든 약속들이 우리가운데 이미 함께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전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 임의대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성경에 하나님이 하시겠다. 채우시겠다. 함께 하시겠다. 오른손으로 붙들겠다는 말을 따로 말씀하지 않아도 이미 하나님께서 모든 약속으로 함께하심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 예수님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그 삶에서 떠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라도 얼마든지 거두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약속입니다.

 

 

2.특별한 약속

 

이 부분은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특수한 약속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특정하게 주신 약속을 말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구절인데요.

사도행전 13장을 보십시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갔을 때 유대인들이 대적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방인에게 가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46절부터 읽겠습니다.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

이방에게 간다고 말하면서 주께서 이같이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49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은 사49:6절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특수한 약속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약속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개인에게 주시는 약속이 특수한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특수한 약속을 네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님이 주셔야 합니다.

핵심은 성경을 읽다가 이 말씀이 좋다 이 말씀을 내가 좋아해 해서 취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바울의 경우도 이사야 성경을 읽다가 내 마음에 든다고 그가 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3:47절을 보면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둘째 문맥의 중요성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주셨어도 그 성경구절에서 문맥에서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에서 사도바울이 말씀하는 부분이 이사야 49: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491절부터 읽으면 좋은데 5-6절부터 읽겠습니다.

“5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6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 구절은 문맥을 보면 메시야에 대한 구절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 자신이 메시야입니까? 아닙니다. 당연히 자신이 아닌 것을 압니다.

그런데 바울이 메시야에게 주신 약속을 어떻게 자기에게 주신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메시야에게 주신 말씀을 어떻게 바울에게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야인 예수님에게 약속하시되 이 약속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눅24장에서도 제자들의 눈을 열어 성경을 가지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성경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고 부활하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 53장입니다.

그 다음에 이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면서 너희가 이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약속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까?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유업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정확하게 옳습니다.

 

셋째, 그런 의미에서 특수한 약속도 일반약속과 같습니다.

왜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되 땅끝까지 전하는 사역은 사도바울만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부름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자기의 예루살렘에서 자기의 땅끝까지 주의 복음을 전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특수한 약속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약속과 같습니다.

그래서 일반 약속에게 적용되는 모든 약속들이 다 여기에 적용되기도 합니다.

 

넷째,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특수약속을 주시는가?

특수약속은 각 개인이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인도하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씀드린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열방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예언하는데, 이 일이 주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에게는 이 구절을 명령하셨는가?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부르심이나 인도하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한번은 중보기도를 인도하고 있는데 제가 얻은 상급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요.

너무나 절박한 상황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하나님의 아들됨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하여서.

그러면서 곧바로 말씀하셨어요. 열방을 구하라 내 아들아 그것을 내가 너에게 주리라.

이 말씀은 시편 2편에 나오는 말씀인데 왕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가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 약속을 내게 주십니까?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약속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모든 성도들에게 다 주신 약속입니다. 모든 교회에 다 주신 약속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구절을 구체적으로 저에게 말씀하셨는가?

우리의 부르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해외선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초점을 더 두라 더 나아가라 더 품으라 더 품고 기도하라 그곳에 더 헌신하라.

우리의 부르심과 인도하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수약속은.

 

이처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약속을 일반적인 약속과 특수한 약속 두 가지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차원 모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약속도 내려놓고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건 주님이 주신 약속만 붙잡고 있지 주님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 주님의 모든 약속은 예수님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놀라운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도 단 위에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모든 약속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지 않았으면 실제로 이삭을 죽였을 것입니다.

모든 약속까지도 내려놓고 하나님만 붙잡게 하십니다. 그분만 사랑하고 그분께만 순복하라고요.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주셨지만 그 약속 내려놓고 하나님만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지만 때로는 반대로 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요셉처럼.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안에 거할 때 주님을 붙잡을 때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것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한 하나님의 길이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왜 신앙의 본질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은 삶을 살면서 선별적으로 자기가 원하는대로 약속을 붙들고 주장하는 것이 거짓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서 나갈 것인가를 보여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길을 인식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되 그 약속까지도 내려놓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렇게 동행할 때 하나님이 따로 말씀하지 않았어도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것이 이미 우리가운데 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