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우리의 순종과 영적 분별력
요14:21
우리의 신앙은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행하심으로고 그 일에 우리의 전존재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기 위해서 온전한 순종과 전적인 신뢰가 필수적입니다. 오늘은 그 중 우리의 순종과 영적인 분별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선별적인 순종은 전적인 불순종입니다.
우리의 순종과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선별적인 순종은 전적인 불순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실제로는 불순종하는 삶을 살면서도 자신은 순종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사울은 그의 가문으로 보나, 그의 외모로 보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상9;1-2)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성령께서 그 위에 놀랍게 임하셨습니다.
(삼상10:6, 10-11)
그런데 그렇게 훌륭하게 시작한 사울은 머지않아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가장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불순종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그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사울에게 아말렉의 모든 사람들과 짐승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삼상15:2-3)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집하여 아말렉을 쳤습니다. 그래서 아말렉 왕 아각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또 짐승 중 기름지고 살진 것을 남기고 나머지는 다 진멸하였습니다(8-9절)
사울은 당연히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비율로 따지면 90% 이상을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를 직면하러 온 사무엘을 만나자 마자 자기는 하나님께 순종했다고 그 첫 마디를 던졌습니다.
(13절)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정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10-11)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와 사울의 이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은 순종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해가 달랐습니까? 사울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을 거의 다 행했기 때문에 당연히 순종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 아말렉의 인구를 알 수 없으나 왕 한 사람만 남기고 모두 죽였으니 얼마나 많이 순종한 것입니까? 또한 아말렉이 소유한 짐승의 수를 알 수 없으나, 약대와 나귀 등은 모두 다 죽이고 양과 소 그리고 어린 양 중 좋은 것 일부만 남기고 나머지를 다 죽였으니 얼마나 많이 순종한 것입니까? 그러니까 사울은 당연히 자신이 순종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선별적인 순종은 전적인 불순종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이 불순종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100% 다 행해야지, 단 1%라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전적인 불순종과 같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사울과 아브라함의 차이(둘 다 부분 순종을 했는데)
아브라함
(창12장) 조카 롯을 대리고 떠났습니다. 분명 부분 순종입니다. 그럼에도 힙11:8절에서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사울
(삼상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삼상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이 말은 자기의 야망이 내려지지 않은 채 자기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별적으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와 태도로 하는 선별적인 순종은 전적인 불순종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면서도 선별적으로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의 목적과 취향에 따라 어떤 말씀은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받아들이지만, 자기에게 부담이 되는 말씀은 적당히 넘어갑니다. 그것이 전적인 불순종과 똑같은 선별적인 순종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2.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순종과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야할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우리의 말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입으로 말한 것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행동으로 말한 것을 말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렘18:11-12) 11-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12-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회개를 촉구하며 말씀하실 때 그것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대적했구나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께 “헛소리 마세요. 우리는 각기 우리 악한 마음대로 행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생가가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심판이 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무나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들은 시바에까지 가서 유향을 사고, 원방에 까지 가서 향품을 사다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자들입니다. 시바는 학자들에 따라서 의견이 다릅니다만,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내지는 남예멘입니다. 그리고 원방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오늘날의 인도를 의미한다고 동의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당시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물었을 뿐 아니라, 친구나 친척을 만나면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었습니다.
(렘23:35,37) 35-너희는 서로 이웃과 형제에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응답하셨으며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냐 하고 37-너는 또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이라 대답하셨으며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냐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렇게 정면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나섰겠습니까? 그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이 하지도 않은 말을 그들이 했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까? 그것은 있을 수 도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관점의 차이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입으로 말한 것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으로 말한 것을 그들이 말한 것으로 이해하십니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하시면서 악한 길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수없이 외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이 행하던 대로 자기들의 생각대로 행하며 자기들의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외쳤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를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30:9-11) 9-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10-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11-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에게 정직한 말을 하지 말고 거짓된 말을 하라고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게 만들라고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자 그대로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가당치도 않는 말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우리가 여러 차례 살펴본 것처럼 이사야 1장에 나오는 그들의 의식과 희생과 기도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그들이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관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을 말한 것으로 보지 않고, 우리가 행동으로 말하는 것을 말한 것으로 보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을 청빙할 때, 이렇게 광고하는 찾아보셨습니까? “우리는 진리를 망하는 목사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전할 목회자를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게 만들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서 떠나게 만들 목회자를 찾습니다” 그런 교회는 우리나라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사랑하라는 본질적인 메시지를 듣기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자기들의 욕구와 필요를 만족시켜줄 부드러운 메시지를 원합니다. 이런 성도들은 아무리 말로는 올바른 진리의 말씀을 원하고, 또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원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으로 하는 말이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심각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까?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3.순종과 사랑의 관계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전적인 순종이라야 진정한 순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순종에 대한 이러한 참된 이해를 말하면 부담부터 가집니다. 그리고 누가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쉽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30: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마11:29-30)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삶이 너무 어렵고, 심지어 불가능하게 느껴집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4장은 이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14:15, 21, 23-24) 15-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21-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 순종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다.
만약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순종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문제에 이상이 생긴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재를 다하여 사라하면, 즉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어 지면 우리가 준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사이에는 “누가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킬 수 있나” “그러면 목회자가 되었어야지” 등의 자기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말과 함께 선별적인 순종의 자세가 만연해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오늘날의 교회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에서 떠나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 시낭ㅇ의 두 가지 요소 중 첫 반째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되지 않으면 두 번째인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순종과 믿음의 관계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가려면 순종과 믿음이 필요한데 이두가지 사이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실, 순종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도 그들에게 믿음과 순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히3:18-19)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가데스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그 땅을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때 순종했더라면 그 동안의 모든 불신과 불순종을 다 용서하시고 그 땅을 그들에게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탐꾼들 중 믿음 없는 자들의 소리를 듣고 환경만 바라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대신 불신 가운데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 세대를 광야에서 흩으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 그럼 왜 그들이 불순종했습니까?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환경에만 기초하여 본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휘발유를 잔뜩 짊어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무엇을 믿는가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굳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를 진실로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여기 어떤 성도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시며 전능하신 창조주라고 굳게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며 그 필요를 채우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필요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기보다 자기의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면 그는 실제로는 그가 하나님에 대하여 고백한 그 모든 사실들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한 교리들에 동의할 뿐이지요.
5.순종과 대가 지불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대가 지불 없는 순종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그의 나이 75세 때에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시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순종은 대가 지불, 때로는 큰 대가 지불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원합니다. 이 시대를 향한 목적을 위해 귀하게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그렇게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성도들은 그것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실과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더,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이든지 그것으로 인하여 얻어질 결실에 비하면 그 대가와 희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이 주님을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작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집 등 가족과 배 등 전 재산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아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 혹은 결실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6.순종과 영적 분별력
또한 순종은 영적인 분별력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순종할 때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자신의 목적과 길들을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더욱 하나님을 따라 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가는데 있어서 순종은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전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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