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우리의 사역과 영적 분별력
요5:17-20
우리 신앙의 본질(핵심)
1)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
2)하나님의 행하심에 전 존재로 동참하는 것 ->우리 사역과 관련된 부분
12제자를 세우실 때 1)하나님과 친밀함, 2)사역, 이 두 가지를 위해 세우셨습니다.
(막3:14-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사역의 관계
①사역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대한 증거임.
즉,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행하심에 전존재로 동참하게 되어있음.
바꿔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에 전존재로 동참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복음서중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자신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②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전존재로 동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전존재로 동참하는 것은 불가능함. 왜? 하나님과 친밀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도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의 전존재로 동참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우리의 사역과 영적 분별력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 중 하나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우리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성취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사역의 이해 -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하는 우리의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그 크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역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예- 성경이 말하는 우리 사역의 가장 훌륭한 모델은 예수님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5:17, 19-20) 1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9-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우리는 이 예수님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하나님께서 오늘도 일하신다.
②나도 일한다.
③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④나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주시하여 본다.
⑤나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본 것을 행한다.
⑥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아버지의 행하시는 모든 것을 보이신다.
3.우리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사역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 사역은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주를 위해서 스스로 계획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노력해서 무엇인가 주를 위해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정도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11장의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그들 중 자기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해서 그 일을 감당했던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이라도 찾아보십시오.
우리는 “주의 일”일이라는 용어부터 그 이해하는 바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하면 우리가 주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 “아버지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위해 하신 섬김과 봉사를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예수님이 본 그 일, 즉 아버지께서 하고 계신 일을 의미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몇 구절을 보면 그 점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요10:37-38)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요14:10-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 일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가운데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라는 표현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말합니다.
둘째, 성경이 말하는 사역은 하나님께 자신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 ->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낸 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휘하시고, 역사하셔서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건져내신 일이나,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바울)을 구원하신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자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 치유하시는 것, 변화시키시는 것, 회개시키시는 것, 교회를 세우시는 것, 자라게 하시는 것, 개인과 교회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 등 모두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주도하시며 인도하시고, 채우시고,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이루시는 것들입니다.
4.하나님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사람들에게 보이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사람을 통해서 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때, 그 일에 동참하라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해 하나님의 행하심을 그들에게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이 곧 그 일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모세의 경우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낸 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위해 계획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최선의 노력으로 그 계획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 일로 모세를 부르시기 위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계시하셨습니다.
(출3:4, 7-8)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모세에게 계시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길, 혹은 방법도 계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길 혹은 방법을 통해서만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출3:15-20)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면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사울(바울)을 전도한 아나니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사울을 직면하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을 가지시고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으로 그를 직면하셨습니다. 사실, 사울(바울)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들을 주님이 다하셨습니다. 그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등등, 그런데 주님은 다메섹에 살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주님의 행하심을 그에게 계시하심으로써 그를 하나님의 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니니아를 통해서 사울을 구원하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동역자의 삶이 비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차피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열심히 해야 결국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상경이 말하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방법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우리를 향한 그 놀라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와 아나니아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주님은 주신 자신의 모든 능력과 자원으로 주님의 듯을 이루십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초청하여 그들을 통해서 그 일들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시랑이며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을 위해서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필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과 길들을 아무리 보이기 원하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한다면, 그 일에 동참하는 일은 더욱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나름대로 주님을 위해 산다고 열심히 노력할지 모르지만 주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소위 주님 따로 우리 따로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5.우리가 믿음으로 동참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사역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실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에게 자신의 목적과 길들을 보이십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라는 초청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 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자원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십니다.
모세의 예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모세에게 보이셨을 때, 모세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 나중에는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모세의 자원과 지혜와 능력이 아닌,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원과 지혜와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자원과 지혜와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신 요5:17, 19-20절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환자를 고치신 배경이 아온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날 어떻게 그 38년 된 환자를 고치셨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베데스다 연못을 지나시다가 그 38년 된 환자를 고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그 환자에게 가서 자리를 들고 거어가라고 말하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순종하셨고,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38년 된 환자를 일으키셨습니다.
6.포도나무 가지의 삶
성경은 우리의 사역 또한 예수님의 사역과 정확하게 똑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15장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요14: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요5장에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해야 그것이 가능하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가 무엇인가를 알면, 우리는 이 점을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의 열매가 성령의 열매를 가리킨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전도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열매는 그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을 말합니다.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열립니다. 그리고 배나무에는 배가 열립니다. 여기 나무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열리는 열매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열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예를 생가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나무고 예수님이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삶을 통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그러한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전 존재로 동참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많은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맺으신 열매였습니다.
요15장에서 말하는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바로 그러한 열매를 말합니다. 즉,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의미에서의 아버지의 일 혹은 주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요15장은 이렇게 열매 맺는 삶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무엇보다 하나님은 이렇게 열매 맺는 삶을 위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열매 맺는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입니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우리의 삶에서 무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요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 방법 중 하나는 열매 맺는 삶을 통해서였습니다.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마찬가지로 우리도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말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목적하시고 계획하신 일들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통해 얼마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셋째,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요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자요,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자입니다. 또한 스승을 닮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많은 뜻과 목적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동일한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단순히 신분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자로서의 삶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정명훈씨가 어떤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정명훈씨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해서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피아노는 전혀 배우지 않습니다. 그의 피아노 실력은 그저 “학교종이 땡땡땡”을 칠정도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확히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넷째,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우리 임의대로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합니다. 그러므로 그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모든 필요를 채우십니다.
다섯째,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거기에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포도나무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많은 대가를 치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대가도 모도나무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짐이나 부담이 아닌 진정한 특권이요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통해 성취되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리즈설교 > 영적분별력'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 우리의 믿음과 영적 분별력 (0) | 2016.09.16 |
---|---|
12. 우리의 순종과 영적 분별력 (0) | 2016.09.16 |
10.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과 영적 분별력 (0) | 2016.09.16 |
09.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영적 분별력 (0) | 2016.09.16 |
08.하나님을 아는 것과 영적 분별력 (0) | 2016.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