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하나님을 아는 것과 영적 분별력
요17:3
우리는 지난 7번의 설교를 통해 영적 분별력에 대하여 몇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정리해 보면
1.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진 교회
2.거짓 신앙의 실체
-신앙이 타락한 시대마다 항상 나타나는 것이 신앙에 대한 그릇된 이해인 거짓 신앙체계 입니다.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
3.거짓 신앙체계의 특징인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부터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 신앙생활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각 요소에서의 영적 분별력의 중요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하나님의 다림줄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전적인 순종 등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야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우리 신앙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친밀한 교제를 원하십니다.
(출19:3-6)
3-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4-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가장 주된 목적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함.
우리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함 ->그러나 가나안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머물러 있을 때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보너스와 같은 것이었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초점은 하나님께 있기보다는 가나안 땅에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라도 그곳에서 쫓겨났습니다.
(막3:14,15)
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첫 번째 목적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 즉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함. 당연히 사역을 위해서도 부르셨고, 누구보다 더 많은 사역을 감당하였음. 그러나 주님이 그들을 부른 주된 목적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였음.
2.하나님을 아는 것과 영적 분별력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주된 목적 ->친밀한 교제를 위함 ->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을 말함.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말씀하셨음.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필 수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성화, 사역, 믿음,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 치유를 위서 등 모든 것을 위해 필 수임.
문제는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임. 우리가 이 부분에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실제로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무지 가운데 있으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할 수 있음.
그 예를 예수님의 시대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좋은 예를 찾아 볼 수 있음.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롬2장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찾아볼 수 있음.
17-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유대인들은 율법이 진리와 지식의 통합체라는 것을 믿었음.
여기서 율법 ->단순히 모세오경만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말한다고 보아야 더 옳을 것임. 그래서 율법을 열심히 연구했고, 철저히 믿고 신뢰했음.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했고, 지극히 선한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함. 그리고 자신들을 소경을 위한 인도자, 어두움에 있는 자들을 위한 빛, 어리석은 자들과 어린 자들을 위한 선생이라고 믿음.
그런데 예수님은 요5장에서 동일한 종류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전혀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5:37-38)
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 즉, 관점이 다름. 다시 말해 그들에게 하나님의 다림줄, 하나님의 관점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임.
3.하나님을 아는 것의 의미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을 말함.
당시 유대인 ->하나님에 관해서 교리적으로, 성경적으로, 이론적으로 잘 알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함.
자서전을 통해서 아는 것은 관해서 아는 것 ->사귐을 통해서 알아야 함.
성경은 하나님의 자서전임. 어떤 사람이 성경을 100번이나 읽고, 신학을 많이 공부했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은 아님.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따름.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을 말함.
4.하나님을 아는 것에 포함되는 것들
요7:37, 38절에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심. 그러나 하나님을 모른다는 표현 대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가 없다고 말씀하셨음.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하나님의 형용을 본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심.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최소한 이 세 가지를 포함하는 것을 알 수 있음.
1)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포함합니다.
(요10:14-16, 27)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남편과 10년을 같이 살아요, 그런데 한 번도 애기하지 않아요. 그러면 상대방을 알 수 있나요? 없나요?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이 포함됨.
(삼상3: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말.
보세요 여기 7절은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연계시키고 있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포함함. 다시 말해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말함.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교제를 가졌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실제였음. 단순한 이론이 아니었음. 모세도 그랬고, 다니엘, 사무엘, 다윗에게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더 말할 갓도 없이 그랬고 바울에게도, 베드로, 요한에게도 그랬음.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단순한 이론에 불과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격체이시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실제적인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어떠한 실제적인 관계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저 그분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따름임. 이것이 바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의 문제점이었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문제점임. 그리고 오늘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거의 대부분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 것임.
2)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포함함.
요5:37절에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형용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형용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임.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떠한 형상도 가지고 계시지 않음.
헨리 블랙가비 목사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 ->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하나님 목적을 계시
하남의 길을 계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의 중요한 한 부분임. 이사야는 이사야6장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사6:1-5)
1-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것은 이사야가 이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하는 사실을 배웠다는 말이 아님. 그날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주권자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임. 그래서 5절에서 이사야는 그가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다고 말하고 있음.
성경은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말함.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하며 그 모든 것이 성령으로 되어진다고 말하고 있음.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함. 이사야기 그가 주권자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 앞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정결케 하심을 경험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이사야는 우리에게 비하면 비교도 안될 만큼 거룩한 삶을 살았던 사람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 앞에 그의 모습이 비춰졌을 때 거기에 진정한 회개가 있었고, 거기에 진정한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고 마찬가지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그리고 그 빛 앞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우리의 삶이 변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성령으로 가능함.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함. 그런 사람들에게 나타난 특징->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로
① 하나님과 친밀함을 인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②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삶이 변하지 않는 것임.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포함함 ->매우 중요한 사실임.
3)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매우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음.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하셨음.
그런데 이들이 누구입니까? 누구보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누구보다 철저히 말씀을 믿고 신뢰했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 그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임.
여기서 우리가 꼭 보아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우리 속에 거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예)
우선 호세아 시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호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 그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예레미야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도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본질에서 떠난 시대였음. 그래서 하나님은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그러면서 하나님은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음
(렘6:19)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
예수님시대 유대인들도 정확하게 똑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말씀이 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하셨음.
(요5:45-47)
45-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의 의미 -> 이론적으로는 말씀을 잘 알았을지 모르지만 그 말씀들이 실제적으로 그들 속에 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 앞에 설 것을 믿습니까? 서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던 것으로 심판 받을 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실제 믿지 않습니다. 믿으면 이렇게 살지 않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우리의 자세를 두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을 버렸다 그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우리 속에 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와 언어 속에는 가득할지 모르지만 우리 마음에는 거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는 것이 필수적임.
말씀을 자기의 목적을 따라 선별적으로 취하는 자세나, 옳은 교리를 위한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면서도 우리의 삶과 사역을 위한 기준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자세를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음.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동의하고 엎드리는 자세, 무엇보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면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자세가 필수적임.
5.이론이 인격체를 대체해 버린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차이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을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거짓 신앙체계인 율법주입니다. 다시 말해 인격체에 관한 이론이 인격체를 대체해 버린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 ->누구보다 율법을 열심히 연구했고, 그 율법을 믿었음. 그 율법에 자기의 삶을 걸었음.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였음.
그런데 문제?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 하나님에 관해서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잘 아는 것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었음. 즉 거짓신앙체계인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고 외쳐도 그들은 전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당연한 이야기를 뭐 그렇게 자주 하느냐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호세아 4장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호4:1.6)
그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그들은 자기 조상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율법을 열심히 배우고 묵상하고 지키고 가가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자기 조상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호세아 시대의 그들의 조상들과 정확하게 똑같은 상황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적 분별력이 가리어져서 거짓 신앙체계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수백 번 읽으면서도 그 올바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자기 조상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전혀 배우지도 연구하지도 실천하지도 않은 채, 무지 가운데 살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조상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올바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말씀으로 자기들의 삶이 전혀 비춰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호세아서와 같은 성경을 통해서 그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로 돌아오라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또 외치셨지만 그들은 전혀 그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그 성경구절들을 수백 번 읽고 그 구절들을 가지고 수백 번 설고하면서도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는 눈을 열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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