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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하나님과 친밀함

05. 하나님을 아는것

by 오용주목사 2016. 9. 15.
                   

05. 하나님을 아는것

마7:21-22



모두들 선물 꾸러미를 들고 고향을 찾아가는 설날입니다. 그리운 부모 형제를 만나는 설레임을 가지고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들을 바라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주위에는 고향을 찾아가고 싶지만 고향을 잃어버려 가지 못한는 이들이 많이 있다는 겁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시랑민이라고 부릅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누구냐? 바로 육신의 고향은 있지만 영혼의 고향을 잃어버린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다 영적시랑민들입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고향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가서 영원히 살아야할 영혼의 고향은 있습니까?

오늘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모두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길 원합니다.


먼저 22절을 같이 읽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다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 날에 -> 우리가 죽는 날, 세상의 마지막 종말에

많은 사람이 이런 신앙생활을 한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날마다 주의 이름을 불렀으니 종교적으로 흠이없고, 주님의 말씀을 전했고, 열심을 다하여 충성, 봉사, 헌신 하였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하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반응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줄 아세요?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23절 중반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불법 -> 국어사전 법에 어것나 있은 것을 가리켜 불법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불법은 하나님의 길로 행치 않았다,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났다, 하나님의 관점에 맞지 않음을 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하였는데 왜 불법을 행하였다하는가?

주의 이름으로 하였지만 그 중심이 자기중심이라는 겁니다.

말씀을 전하지만 선별적으로 전하고 선별적으로 듣습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 목적을 따라 말씀을 각색함.

주여 주여 하지만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겁니다.

자기자원, 자기목적, 자기방법으로 한다면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안다고 하지만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주님이 아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21절 다같이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오직한길)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 알아야지 뜻대로 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길을 보이십니다.


1.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하나님에 관하여 성경을 통하여, 성경공부를 통하여 교리적으로, 이론 적으로 알면 하나님을 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엄청난 착각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우리 신앙에 치명타를 줍니다.

성경을 통해서 교리적으로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은 우리에게 중여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정표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길을 모르면 어떻게 목적지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길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은 목적지가 아니듯이,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은 이정표같고, 길과 같아서 우리 신앙에 매우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이정표를 따라가면, 길을 따라가면 우리의 목적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정표를 보고 나는 예수님을 이젠 다 안다라고 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추구해야할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익까요?

주님에 관해서 성경공부를 통해 주님에 관하여 안 주님을 이제는 실제적이며 개인적인 교제를 통하여 경험적으로 알아야합니다.


다윗이 시편18:1절에서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것을 배워서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적으로 나의 힘이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기에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라고 고백한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알 때 성경이 말한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연구와 교육을 총해서 습득되는 반면 주님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엡1: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이 기도는 믿음과 사랑에서 뛰어난 에베소 교회를 위한 사도바울의 기도입니다(15절). 이 기도는 불신자들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무엇을 기도하느냐 ->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라고 번역해야 더 옳습니다. 실제로 NIV 성경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알기를 구해야 합니다.

다윗 -시편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바울 -고린도전서2: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빌3:7-8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해야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이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길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보이실 때 그길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자들이 천국이 저희 것이요, 주님이 아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할 때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중과 길을 우리에게 보이실 것입니다. 개인이 하나님과 알기를 열망하고 그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면 여러분 개개인의 비전을 보이시고, 교회가 그렇게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면 교회의 비전을 보이실 것입니다.


나를 왜 태어나게 하셨는지

왜 보내셨는지, 왜 오게 하셨는지, 어디로 부르셨는지, 지금까지 왜 인도해 오셨는지, 왜 교회를 이곳에 세우셨는지, 왜 이러한 아내, 남편, 자녀들을 만나게 하셨는지..그 하나님의 의중을 보이십니다. 이때 그분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내 삶을 조정하고 동참할 때 이것은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이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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