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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권별설교/로마서

51강 믿음과 영적 예배

by 오용주목사 2024. 3. 24.

51강                                                                        믿음과 영적예배

                                                                                      롬12:1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사님들은 로마서를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1-11장을 전반부로 그리고 롬12-16까지를 후반부로 나눕니다. 그러면서 전반부는 교리부분을 그리고 후반부는 삶의, 실천부분을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로마서의 전반부는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을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우리가 행동해야 할 것들을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또 이렇게도 표현 합니다. 전반부는 교리부분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동하신 것에 대한 내용이고, 후반부 윤리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행동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나누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둘로 나누다 보면 우리 신앙이 자칫 이원론으로 흐르기 쉽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은 좋은데 행함이 부족해, 나는 행함은 좋은데 믿음이 좀 부족해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믿음과 행함을 두 수레바퀴로 비유하면서 믿음만 말해서도 안 되고, 행함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11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이제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롬12-16장의 삶을 살리라 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과 행함은 그처럼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곧 믿음이고 믿음이 곧 행함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믿음 + 행함이 아니라 믿음 = 행함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는 말을 신자가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이 된다는 뜻으로 생각해 버린다면 결국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믿음이 죽고 산다는 의미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는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예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믿음에다가 행함을 보태서 완벽한 믿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은 인간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능력에 의한 열매고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믿음에 의해서 당연하게 나타나고 맺어질 수밖에 없는 결과가 곧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롬1-11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가장먼지 당연히 나타나는 행함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이 롬12;1절입니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롬1-11장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가장 먼저 믿음의 행함이 바로 예배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믿음과 영적 예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예배는 우리 몸을 드리는 예배입니다.

 

너의 몸을 드린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 전인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자주 들은 말씀 중에 하나는 신앙의 본질과 의식이라는 말 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오해해서 의식과 본질을 서로 나누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신앙의 본질인 마음이 중요하지 의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나눠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의식 = 본질 입니다.

 

바울 당시의 신앙 모습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마음이 중요하지 의식이 중요한가 하면서 의식을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한 부류는 의식이 중요하지 마음이 중요한가, 하면서 마음이 없는 의식만을 중요시하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사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금식 기도하는 것으로 자기들의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척도로 삼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물을 잡아서 바치면 제사가 되는 줄로 알았고, 처음 익은 열매를 갖다 바치면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알았고, 십일조를 바치면 그것이 곧 믿음인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시고 처음 익은 열매를 원하시고 십일조를 원하시는 것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늘도 많은 성도들이 주일에 모여서 예배하고 헌금하고 적당히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으로 성도의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여겨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예배도 주일에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헌금하면 안 하는 분들도 많지마는 이러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드렸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또 이와는 정 반대로 본질이 중요하지 주요하지 하면서 의식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시로 드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란 헬라어로 소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소마라는 단어는 몸, 육체 이런 뜻도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전 인격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본질(하나님과 친밀함)과 의식의 조화, 이것이 전 인격적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본질과 의식은 따로 떨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본질은 잘 되는데 의식은 잘 안된다던지, 나는 의식은 잘 하는데 본질은 잘 안된다던지 하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는데 표현을 잘 못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죠? 이것은 표현을 잘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표현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롬121그러므로내가 정말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깨달았다면 그 사람은 몸으로 드리는 예배, 즉 본질과 의식이 조화를 이루는 예배를 드리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2.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입니다.

 

거룩한 예배, 여러분 어떻게 드리는 것이 거룩한 예배일까요? 우리는 거룩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니까, 내가 신앙적으로 훌륭해지고 거룩해져서 드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적으로 거룩해져서 드리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거룩한 예배의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정한 거룩은 예수 그리스도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거룩함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거룩다 함을 받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성령의 조명을 깨닫고 믿고 감사함으로, 감격으로 예배하는 것이 거룩한 예배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의롭게 됨, 거룩함, 구원함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는 반드시 십자가의 복음의 터 위에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이 온전히 주인 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고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복음을 터 삼지 않는 예배는 더 이상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 되지 않는 예배는 더 이상 예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3.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기 산 제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 예배가 있다면 죽은 예배도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산 예배란?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삶으로 드리는 예배(제물)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미사(Missa)라는 용어는 보내다’, ‘파견하다의 뜻을 가진 라틴어의 ‘Mittere’에서 파생된 말로, 로마시대의 예식이나 법정에서 사용되던 관용어인 ‘Ite, Missa est’(이때 미사 에스트)에서 유래했다. 법정에서 재판이 끝났다는 것을 선포하거나, 황제나 제후를 알현한 뒤 알현이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용어였는데, 이것을 교회가 받아들여 성만찬 의식 후 해산을 명하는 의식어인 '가라, 식이 끝났다'(Ite, missa est)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예배는 이로써 마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의 예배는 이것으로 마치고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가서 행동하라는 말이다.

 

) 미국 메이즈 피치버그의 야구선수 강정호, 야구장에서는 야구를 잘 하였을지 모르지만 삶에서 음주운전을 하고 사고를 내고 도망을 가 버린 결과 얼마나 욕을 먹고 있는지 모릅니다. 죄질이 나쁘다.

 

이게 우리 모습 아닙니까? 예배시간에는 거룩 거룩 (홀리, 홀리) 한데 집에 가기만 딴 사람으로 변하지 않습니까? 예배당에서는 지킬박사인데 사회에서는 하이드로 돌변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 아니냐는 겁니다. 여러분 믿음의 예배는 예배당에서의 공동체 예배 = 삶의 예배입니다.

 

 

4.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는 말 아닙니까?

 

사도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물을 잡아서 바치면 제사가 되는 줄로 알았고, 처음 익은 열매를 갖다 바치면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알았고, 십일조를 바치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시고 처음 익은 열매를 원하시고 십일조를 원하시는 것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주일에 모여서 예배하고 헌금하고 적당히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으로 성도의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여겨 버리는 현실 상황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특히 예배도 주일에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헌금하면 안 하는 분들도 많지마는 이러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드렸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예배를 입술뿐인 예배다. 마당만 밟는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왜입니까? 방향성이 잘못되었기 때문 아닙니까? 여러분, 이 땅의 모든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순서로 어떤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든 예배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름대로 예배에 무척 신경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결국 내가 드리는 예배를 징검다리로 해서 신에게 나아가 내가 원하는 것을 기필코 얻어내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기어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야 말겠다는 그 의지가 가득하지 않습니까?

 

요즘에는 예배를 교회 부흥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가운데 소위 '열린 예배'에 관심을 두는 자들도 많습니다. 옛날처럼 경직되고 조용한 분위기의 예배에서 탈피하자는 것입니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예배를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직 교회 부흥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연관된 것이라면 가장 우선적으로 '교회 부흥에 도움이 되느냐?'부터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과연 그러한 것입니까? 인간들이 모여서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금식의 예)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의 의의 행위를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세리와 같이 내가 어떤 존재임을 알고, 그러한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 은혜, 긍휼, 자비하심을 베푸심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상한 심령의 예배입니다. 사실 이러한 예배는 우리 힘으로 드릴 수가 있습니까? 오직 성령이 오심으로 가능한 예배입니다. 그래서 영적 예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1-11장의 전반부에서 사도바울은 죄인이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후반부 12장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롬12:1-2절이 그 다음에 나오는 롬12-16장의 모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삶을 함축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내가 너희를 구원해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너희가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몫이고, 삶은 내 몫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에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믿음으로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다면 우리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17: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여기 영적 예배니라 할 때 영적이란 단어는 합당한” “합리적인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배드리는 것이 합당한 예배인가?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예배는 우리 몸을 드리는 예배입니다.

2.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입니다.

3.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 리는 예배입니다.

4.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