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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3.하나님과 동행한 아브라함(창12:1~5)

by 오용주목사 2019. 1. 20.

2019.1.20                                                         3.하나님과 동행한 아브라함

12:1~5

 

 

여러분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가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위에 자기를 실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로또에, 또 어떤 사람은 주식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건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는데 그 드라마에 나오는 엄마들은 자녀들이 스카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제가 부산에 있을 때 해운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집사님 부부를 잠시 섬긴적이 있었는데 그분들이 저희 집에 오셔서 하는 말이 뭐냐하면 자녀가 잘 될 수만 있다면 마귀의 힘을 빌려서라도 잘되게 하고 싶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내 자녀가 잘 될 수 있다면 그게 하나님이던 마귀의 힘이던 세상의 힘이든 상관하지 않고 자녀를 위해서 모든 것을 걸겠다는 이 집사님 부부의 마음이 스카이 캐슬에 등장하는 부모들의 마음과 똑 같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여러분은 무엇에 생명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나의 온 생명을 걸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난주일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지만 또한 예수님께만 모든 것을 걸고 살 수도 없는 것이 오늘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오늘 많은 믿는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왠 줄 아십니까? 아브라함처럼 되기를 원하는데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나를 싣는 것입니다.

 

지난 주중 손기철 장로님 설교를 듣는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시시던 것을 들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 비가 오지 않게 해주세요. 그러고는 우산을 챙겨서 간다는 겁니다. 실컷 비오지 않기를 기도해 놓고 우산을 가지고 가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지 않은 것이라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었다면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아야죠, 그래야 그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거는 것이 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동행이란? 하나님이 나의 삶에 전부가 되는 삶이다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명을 거는 삶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창세기를 읽는 중에 창12:4절 말씀에 늘 집중하게 됩니다.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1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게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의 극치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한 아담과 하와가 타락을 합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 쫓겨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인간이 한 짓이 뭐냐? 바로 인간이 왕이 다스리는, 인간의 나라, 세상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하나님을 떠나 인간이 세운 인류 최초의 나라가 바로 창11장에 나오는 바벨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발휘되는 내 나라를 세우겠다 선언이 바로 창12:1~3절이며 이 일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1. 하나님과 동행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은 말씀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앞서 설치는 겁니다. 이런게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지도 않는데 하나님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을 무대뽀식, 막무가내식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표적인 예

삼상4: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4: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그래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삼상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4: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4:10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이건 믿음도 아니고, 동행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저희들이 춘천으로 온 것이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설레발 쳐서 하나님 저희들이 춘천으로 갑니다.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동행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춘천으로 왔다면 이것은 올바른 동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힘드는 것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까지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우리가 조급함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냥 믿습니다. 믿습니다. 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자입니다.

 

기다림에는 하나님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이 기다림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항복할 때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기다림입니다. 두 번째 기다림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모세는 나이 40이 되어서 이 기다림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디안광야에서 40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2. 하나님과 동행은 떠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그 동행을 방해하는 것들을 떠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을 위해서 본도 친척 아비집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는 하나님과 동행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을 하기 위해 배와 그물을 심지어 가족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것들을 다 누리면서 하나님과 동행은 불가능합니다.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을 떠나지 않고는 하나님과 동행을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가장 순종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생각입니다. 그 좋은 예가 나아만 장군입니다.

왕하5: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왕하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또 하나가 물질입니다.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0: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10: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자기 생각, 물질을 처리해야 합니다. 자기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물질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내 생각의 문제를 처리하려면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게서부터 나온 생각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3.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도중하차를 조심해야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잘 출발하였습니다. 잘 출발하여 하란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란을 지나 목적지 가나안으로 가야하는데 그만 하란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11: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여기 거류하였으며는 그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왜일까요? 여기 하란의 이름의 뜻은 교차로인데 사방팔방의 국제무역로의 교차점으로 무역과 상업도시로 번성한 지역이 하란이라는 겁니다. 자기들이 떠나온 갈대아 우르보다 더 화려한 도시가 하란입니다. 그래서 그 화려함에 도취되어 하란에 주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창11:31절을 자세히 보면 주체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입니다. 어찌 보면 데라 한 사람 때문에 온 가족이 하란에 머물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가나안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 주범이 데라라는 사실입니다. 혹시 이 데라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오직 여기 하란만을 추구하며 살도록 하고 있지는 않느냐 말입니다. 이 세상의 화려함, 세상의 부, 명예, 성공만을 추구하며 살도록 가르치지 않느냐 말입니다.

 

어찌보면 우리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목적지 가나안을 꿈꾸며 갈대아 우르를 떠난 자들입니다. 실제로 갈대아 우르와 같은 이 세상을 떠나 세상에 물들며 살지 않겠다 결단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는데 지금은 하란에 둥지를 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쩌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비전, 가나안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하란에 머물러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지, , 비전을 다 잃어버리고 하란이라는 돈, 명예, 권세에 머물러 거기에 온 신경을 쓰고 그것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하란은 무엇입니까?

 

4.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가나안에 입성할 수 있었을까요?

12: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이 말씀과 11: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이 두 말씀이 너무 대조가 되지 않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생은 데라로 살다가 가느냐, 아브라함으로 살다가 가느냐 그 차이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데라의 길을 걷는 인생이 아니라, 마침내 목적지 가나안에 들어갔더라, 아브라함의 길을 걷는 복된 인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진짜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아니 그러면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는 목적지에서 이탈해서 하란에 살다가 죽었는데 왜 아브라함은 똑 같이 하란에 머물렀지만 기어이 목적지 가나안에 마침내 입성할 수 있었는가?

 

1)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겁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 말씀이 어떤 시점에서 나온 말씀입니까?

11: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11: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보세요, 지금 아브라함에게 현실적인 결핍, 현실적인 고통과 슬픔이 있었지만 이것을 뛰어 넘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하란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꿈꾸시려면 말씀이 임해야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기를 꿈꾸셔야만 합니다. 꿈을 꿀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환경을 만드셔야 합니다. 그 환경은? 말씀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12:1절에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사모해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죠.

 

또 기도해야죠?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래야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 알고 달려갈 것 아닙니까?

 

 

2) 아브라함은 똑 같이 하란에 머물렀지만 기어이 목적지 가나안에 마침내 입성할 수 있었는가?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뿐 아니라 그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나를 싣는 것입니다.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보세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사실 상황은 환경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에게 요구하는 것이 떠나라! 가라! 인데 3가지를 떠나라 하십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입니다.

 

여러분 고대사회는 지연공동체, 혈연공동체입니다. 그런데 땅과 핏줄을 떠나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떠난 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요?

 

또 아브라함은 당대 최고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신전에서 사용하는 신의 형상을 만드는 수공업자로서 당대 기록에 의하면 수공업자는 최고의 부자에 속하였으며 귀족중의 귀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부, 명예, 안락함, 평안함, 안전함, 화려함과 그가 지금껏 쌓아 놓았던 삶의 기반을 모두 다 포기하고, 네가 지금까지 의지하였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다 끊어 버리고, 나와 더불어 비전을 향하여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자 그러면 내가 너로 땅을 소유하게 하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약속한 3가지, , 큰 민족,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가능한 약속같이 보입니까?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자기가 소유했던 땅을 다 버리고 떠난 아브라함이 어떻게 땅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큰민족 11: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어디 그것뿐입니까?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약속 아닙니까?

요즘 귀농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귀농하는 사람들이 귀농해서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하는 것, 그곳 사람들과 잘 사귀는 겁니다. 그래야 도움을 받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그네인데 나그네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 말은 말씀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었다는 말입니다.

 

지난 금요일 우리가 읽어가는 성경 요11-15장인데 이 말씀대로 믿어지는 겁니다 .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이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내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브라함과 같이 마침내 목적지 가나암에 입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생명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데라를 하란에 머물게 했던 이세상의 성공, 평안한 삶, 안정감,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삶, 이 세상의 화려함에 생명을 걸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창12:1-3절에 아브라함에게 임했던 말씀,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임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거는 여러분들이 되기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