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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집회설교

대만대사명교회 4강/ 중보기도로 나가는 길

by 오용주목사 2018. 10. 30.

4/ 중보기도로 나가는 길

 

 

우리는 그 동안 중보기도 전반에 대해 중요한 요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실제로 중보기도로 나갈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장에서는 중보기도로 나가는 기본적인 방법에 대해 살펴보고, 다음 장에서는 중보기도 인도자들에 대한 지침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 필수입니다.

 

중보기도로 나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도 필수입니다. 이 시간이 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도, 중보기도도 가능하기 않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삶의 모델이신 예수님께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그분도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과 관련하여 예수님께로부터 중요한 네 가지 요소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우선적으로(5:15-16)

2) 정기적으로(22:39)

3) 충분한 시간을(6:12)

4) 한적한 곳에서(5:16, 1:35)

 

1) 우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을 가지려면 '우선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의 삶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을 자신의 양식으로 아실만큼 신실하게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4: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항상 사역보다 하나님과 교제를 우선적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치유도 받기 위해 몰려 왔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어 NIV 성경은 여기에 "often(종종)" 이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예수님이 자주 그렇게 하셨던 것을 보여줍니다.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5:15-16).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우선으로 여기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는 시간을 우선적으로 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세우실 때에도 사역보다 먼저 자신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세우셨습니다.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3:14-15).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최우선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선적으로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심지어 우리가 원하는 것 다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하나님 앞에 서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로는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2) 정기적으로

예수님은 '정기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공생애 기간 종안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지역에서의 사역은 매우 제한적인 기간 동안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예루살렘 지역에 계실 동안에도 감람산에 가셔서 정기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습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22:39). 가롯 유다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을 배반하기 위해 떠났는데, 그 캄캄한 밤중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잡으려고 사람들을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만큼 자주 그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피터 드러커는 일상이 "이전에 천재에 가까운 사람들이나 할 수 있던 일을 판단력 없는 미숙한 사람들도 하게 한다"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 하나의 일상(a routine)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훨씬 쉽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한적한 장소입니다. 한적한 장소는 반드시 집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장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5:16).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1:35). 모세의 경우도 진에서 멀리 떠난 곳에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회막을 세워 놓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곳에 와서 하나님을 찾도록 했습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33:7). 우리는 각자 집이나 직장의 한적한 곳에서 중보기도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떠나 다윗의 장막에 모여서 함께 주님을 찾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4) 충분한 시간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의 '충분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밤을 세워 기도하시기도 하고,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을 집중적으로 찾기도 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6;12).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닐수록 하나님 앞에 나가도 그저 깜깜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구하면 머지않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충분한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필수적입니다. 특히 리더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는 그의 책 영적 리더십에서 리더가 확보해야 할 시간 중 첫 번째로 하나님과의 충분한 시간을 들고 있습니다. "영적 리더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조직을 향한 리더의 비전도 하나님께로서 온다. 리더의 하루 일정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조직의 가치관을 정하시고, 리더의 인선을 인도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영적 리더는 자기 조직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열쇠는 리더가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가가 아니라 그 시간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다 하실 수 있을 만큼 충분한가이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을 내는 것에서 성공하면 90% 이상은 성공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있어서 그리고 중보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2.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기도입니다. 중보기도에서 핵심은 더 나아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1)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

오늘날 적지 않은 성도들이 기도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된 이해의 유형은 많겠지만, 그 중 대표적인 두 가지를 여기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기도를 자기의 필요를 채워주시도록 그리고 자기의 목적과 뜻을 이루어주시도록 하나님께 줄기차게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래리 크랩 박사는 그의 책 파파기도에서 자기중심적인 잘못된 기도라고 부르면서, 그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간청

주세요! 주세요! 주세요!

사랑하는 하나님, 저를 축복해 주세요.

저의 삶이 만족과 기쁨으로 넘치게 해 주세요.

 

자기중심적인 기도는 무엇보다 간청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의 중심에서 항상 자기 필요와 목적을 위한 간청이 놓여 있습니다.

 

중보

저를 위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변화시켜 주세요.

다른 사람들과 저의 환경 속에서 역사하시되, 저의 안위를 생각해서 그렇게 해 주세요.

 

그들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크랩 박사가 말하는 중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말하는데,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결국 자기의 목적과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자기 교회의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그 목회자가 설교를 더 잘 하고 더 성숙해져서 자기를 보다 잘 섬겨주고, 자기가 은혜 받게 되도록 그렇게 기도합니다.

 

감사

저에게 주신 축복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아주 쓸 만하시네요.

맘에 들어요.

계속 수고해 주세요.

 

자기중심적인 기도에도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사는 하나님께서 자기중심적인 필요와 목적을 이루어주셨을 때 드리는 조건적인 감사에 불과합니다. 그 배후에는 위에 나오는 그러한 가치관이 깔려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전혀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필요와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예배

좋은 예배를 위한 비법

당신이 내게 주신 것들로 인하여 당신을 찬양하며 노래하겠습니다.

야호, 예배 한 번 쉽네, 그저 감정만 열심히 부추기면 되니까. 희생은 필요 없잖아요.

 

그들은 예배를 드리되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어주시는 조건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는 간절함이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배고픔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희생은 필요 없는, 감정적인 민족을 얻는 예배면 족합니다.

 

관계 맺기

만사가 계속 잘 굴러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세요.

하나님이 많은 역할을 계속 해 주시는 한, 저도 제 역할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와 목적을 이루어주시는 것을 토대로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참 쓸 만하신 분이네요. 계속 저를 위해 수고해 주십시오. 그럼 저도 하나님을 잘 믿겠습니다." 라는 가치관이 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밑바탕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래리 크랩 박사가 말한 자기중심적인 잘못된 기도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저 자기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자기의 목적과 뜻을 이루어주시도록 하나님께 줄기차게 구하는 잘못된 기도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신 중언부언하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6:7-8).

 

여기서 말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그저 단순히 어떤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강청하는 기도의 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마태복음 6장을 계속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방인들처럼 세상에서의 자기 목적을 위해 줄기차게 외쳐대는 기도를 말합니다. 엘리야 시대 자기들의 기도를 응답해달라고 "바알이여, 바알이여" 를 반복적으로 외쳐댔던 이방신의 선지자들처럼, 그리고 오늘날 일정 문구를 계속해서 반복하며 몇 시간 동안이고 기도하는 모 종교처럼, 많이 외쳐대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자기들의 목적과 뜻을 이루어달라고 줄기차게 외쳐대는 기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곧 이방인들이 하는 것과 같은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적지 않은 성도들이 그 대상과 기도하는 방법만 약간 다를 뿐 불교 신자나 힌두교 신자와 똑같은 기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들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다 잘못된 기도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의 필요를 위한 기도의 자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과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너희의 필요를 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방인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이방인들은 세상에서의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너희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의 필요는 채우실 것이다.’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1-33).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의중은 우리가 흔히 주기도문이라고 부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6:9-13).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기도에서 그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이방인들과는 달리 우리의 삶의 목표가 세상에서 더 잘 살고 더 잘 먹는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우리에게 필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도 우리는 그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그 필요를 채워달라고 하나님께 줄기차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그 필요를 아뢰되, 무엇보다 그 환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중과 길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중과 길로 우리의 삶을 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시는 분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실 만큼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실 만큼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두 번째는 기도를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 잘못된 이해는 첫 번째 잘못된 이해와 서로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 잘못된 이해는 기도를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내기 위한 하나의 공로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필요와 목적을 위해 기도하되 그들의 정성과 힘을 다해 구하면, 다시 말해서 금식하면서 기도한다든지, 날짜를 정해놓고 일정 기간 기도한다든지, 많은 헌금을 드리며 기도한다든지 등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하게 타락한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십자가의 공로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조차 전혀 모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우리가 치룬 대가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일로 생각하는 성도들은 그들의 이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로 소위 강청하는 기도에 대한 성경구절들을 듭니다.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8:1-8).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11:5-8).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두 구절 모두 그저 우리가 우리의 목적과 뜻을 따라 하나님께 줄기차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하는 구절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강청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두 구절 모두에서 그들이 간절히 구한 것이 다 옳은 것, 즉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선 누가복음 18장의 과부의 경우, 그 과부가 옳았습니다. 그런데 불의한 재판관이 힘없는 과부를 무시하고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부가 밤낮으로 재판관을 찾아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더니 그 불의한 재판관이 귀찮아서 그 과부의 요청을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이 구절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그렇게 악한 재판관이 세상에 있겠느냐? 그런데 설령 그런 재판관이 있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의 과부처럼 지속해서 구하면 재판관으로서의 양식과 양심을 인해서는 아닐지라도 귀찮아서라도 그 원한을 풀어줄 것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한없이 좋으신, 한없이 공의로우신 재판관이신데 지속해서 구하는 자기 자녀의 옳은 기도를 얼마나 더욱 더 잘 들어주시겠느냐.’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동네의 한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그 온 동네가 그 손님을 함께 대접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친구가 찾아온 사람이 그 이웃에 사는 옆집 친구에게 먹을 것을 좀 빌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요점도 다음과 같습니다. ‘아니 이웃집에 사는 친구가 찾아와서 먹을 것을 좀 빌려달라고 요청하는데, 그것도 응당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요청하는데, 아이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고 해서 그 요청을 거절하는 친구가 세상에 있겠는가? 그런데 설령 그렇게 악한 친구가 있다 할지라도 지속해서 요청하면 친구 됨으로 인하여서는 아닐지라도 그 강청에 귀찮아서라도 그 요청을 들어줄 것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정당한 요청을 얼마나 더욱 더 들어주시겠느냐.’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비유 모두 옳은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이 비유를 소위 주기도문의 기도와 연결시키고 있고, 이어서 성령을 부어달라는 기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제자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강청하는 기도의 자세로 기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그 기도를 들으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비유 모두 대조법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실 것을 그만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 나오는 강청하는 기도에 관한 구절들은 우리가 그저 우리의 목적과 뜻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것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강청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말하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실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기도를 보아도 참다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면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 또한 우리 기도의 가장 온전한 모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필요와 목적을 위해 줄기차게 기도하셨습니까?

우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목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셨습니다(5:30).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그 일에 삶을 드리는 것을 자신의 양식으로 아셨습니다(4:34). 사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양식과 자세를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22:42-44). 이 예수님의 삶과 기도를 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이방인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2) 두 가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들에 휩싸여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대표적인 두 가지는 염려와 자기 목적입니다.

 

모든 염려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반드시 내려놓아야 할 하나가 바로 염려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4:6-7). 성경은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버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시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염려 대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갈 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염려를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는 염려(문제)에 휩싸여 전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없게 됩니다. 염려는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고 의지하는데서 나온 것으로써 그 배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벽을 통해서 반대편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염려를 가지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벽의 반대편을 보려면, 눈을 들어 벽 너머를 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보려면 환경 너머로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바라보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의 하나님임을 반드시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최종적으로 온전하게 확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최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 마음의 생각, 우리의 처지와 필요 등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온전하고 옳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우리로 하여금 그 뜻 가운데 행하도록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며,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시키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모든 의제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갈 때, 우리의 염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의제를 반드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설령 그 의제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의제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을 구하여 나가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중요한 의제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들과 의도들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그 의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구하여 나간다는 말입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기도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의제를 내려놓고, 그저 상대방이 좋아서, 상대방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서로 만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한 가지 방법은 그것들을 마음에 품고 나가되,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개인적인 문제를 마음에 품되,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맡기고, 오직 주님만을 구하여 나가면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 문제에 대한 길을 제시해 주시기도 하고, 응답을 주시기도 합니다.

 

3)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과 길을 구하여 나갑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길을 구하여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앞에서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8장 다윗의 장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을 복습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시작합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마음껏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 그분으로 인하여 마음껏 기뻐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중보기도뿐 아니라,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출발점입니다. 래리 크랩 박사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한 관계형 기도에 해해 말하면서 그 첫 출발을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기에 홀로 합당하신 분입니다. 찬양과 경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상의 형태의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와 의제를 내려놓고, 영광의 주님이시며 사랑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가 오직 그분을 예배함으로 나갑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은 예배에 대한 이해와 가치와 자세입니다. 우리는 9장에서 다윗의 장막과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예배에 대한 핵심적인 부분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을 잘 숙지하고, 그 이해와 가치와 자세를 따라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에 성공하면 그날 중보기도는 참으로 신나는 복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 반대로 우리가 예배에서 별로 성공하지 못하면, 그날 중보기도는 매우 건조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찬양과 경배에서, 다시 말해 예배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9장에서 살펴본 경배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를 따라 하나님께 경배로 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 가운데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을 추구하며, 하나님만을 높이고, 하나님만을 기뻐함으로 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귀한 일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더 깊은 친밀함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도 하고, 우리의 길을 지도하시기도 하고,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에게 보여지기도 하고, 치유가 일어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중보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열릴 것이니까, 혹은 드디어 사역의 문이 열릴 것이니까, 혹은 드디어 사역의 문이 열릴 것이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중보기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열망이요, 기쁨이고, 우리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물며,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기뻐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하고, 그분을 갈망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길을 구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래서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길과 의중을 구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의중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예배보다 앞서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더욱 알기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만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없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길과 의중을 구하면,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타락한 예배입니다. 또한 우선적인 예배와 감사 없는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과 열망은 우리를 해로운 강박관념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교회가 주님을 따라가면서 환경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개척되어진지 8년쯤 지났을 때, 우리는 그 당시에 사용하고 있던 본당을 교육관 및 24시간 중보기도 할 수 있는 장소로 사용하고, 더 넓은 장소를 본당으로 사용하기 위해 가까운 한 장소를 경매를 통해 구입했습니다. 구입을 마치고 인테리어 공사를 하려고 하는데 그 건물이 있는 단지의 아파트 주님 자치회에서 적극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단지 내 건물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사소송까지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행정소송을 하든지 민사소송을 하든지 우리가 이길 수 있었습니다. 단지 내 상가에 교회가 들어가는 것은 합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수년 동안을 소송에 매달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월 그 건물을 구입할 때 받은 은행 융자의 이자와 건물을 비워놓아도 내야하는 관리비는 그 당시 우리의 재정 중 남은 모든 것을 다 집어넣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처했습니다. 거기에다 더 나아가 일이 이렇게 되자 성도들의 마음이 급속도로 나누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특별기도회로 모였습니다.

 

특별기도회로 모였을 때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모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초점은 그 문제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에 품고 나가되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라고 묻는 자세로 나갔습니다. 우리는 교회적으로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거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러한 일이 닥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조정할 부분이 무엇인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주님을 찾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모여 주님만을 예배하고, 주님을 찾기 시작하자, 주님은 우리의 안일함, 우리의 높아진 생각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로 인하여 오히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을 소홀히 한 것 등 우리의 죄악들을 들추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돌이키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던 중 2일째인지 3일째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 중에 다음 단계로 나가라고 분명하게 인도하셨습니다. 다음 단계는 부지를 사서 건물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우리는 우리의 방향을 조정했습니다. 우선 그 장소를 임대로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주간에 곧바로 그 건물이 임대로 나갔습니다. 관리비와 이자 등 문제가 일순간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부지를 알아보기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예배당을 신축해서 지금 포도나무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신갈로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포도나무교회의 규모 등 우리가 처해 있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지 구입비와 건축비 등 60억 원이 넘는 신축 프로젝트로 곧바로 인도하셨다면 저부터 시작해서 아무도 따라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셨고, 아무도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환경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당연히 그 문제를 마음에 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우리를 압도해서 우리의 모든 관심이 오직 그 문제의 해결에 있거나, 하나님께 나갈 때에도 오직 그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혀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하던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온갖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의중과 길을 전혀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계획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세가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일에 힘쓰고, 주님을 찾고 예배하는 일에 힘쓰고, 주님께 순종하기를 힘씁니다. 중보기도로 나갈 때에도 우리는 그 문제를 우리의 마음에 품고 나가되, 그것은 주님께 맡기고, 오직 주님을 구하여, 오직 주님을 예배하여 나갑니다. 우리가 드리는 한 찬양의 가사가 바로 우리의 그러한 자세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이 고요한 시간

주님의 보좌 앞에 내 마음을 쏟네.

모든 것 아시는 주님께 감출 것 없네.

내 맘과 정성 다해 주 바라나이다.

 

나 염려하잖아도 내 쓸 것 아시니

나 오직 주의 얼굴 구하게 하소서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감사하며

날마다 순종하며 주 따르오리다.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온 맘 다해 주 알기 원해요.

내 모든 삶 당신 것이니

주만 섬기리 온 맘 다해.

 

우리가 그렇게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구하고, 주님만을 예배하고, 주님께만 순종하며 나가면 주님이 주님의 때에 우리의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길을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길을 따라 우리의 삶을 조정하고 순종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4. 기도와 간구(중보기도)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뻐함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임재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4:8)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임재하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못한 다고 해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덜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서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나갈 때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길들을 보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을 우리에게 조명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간절한 중보기도로 이어집니다. 이 부분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강청하는 기도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강청하는 기도는 자기 목적을 위해 줄기차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구하는 기도입니다. 모세, 사무엘, 다니엘, 느헤미야, 이사야, 안나, 시므온,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5. 순종

 

우리의 중보기도는 중보기도로만 끝나면 안 됩니다. 중보기도를 통해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길을 따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조정하여 순종하는 데까지 가야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중보기도가 온전할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과 실제로 동행하는 삶에서 자라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알리시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조정하여 그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은 우리로 그 목적에 동참하라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길을 우리에게 보이시면 우리는 그 길에 순종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