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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집회설교

서울예수촌교회 내 생에 가장 소중한 추억 (단1:1-9)

by 오용주목사 2018. 10. 30.

내 생에 가장 소중한 추억
단1:1-9

얼마 전 한 자매님으로부터 이런 푸념을 듣게 되었습니다.
요즘 직장을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겁니다.
저는 힘들다고 해서 몸이 힘들고 피곤한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몸이 힘든 것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고 영혼이 힘들었었던 겁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 이 자매님이 어린이 집에 보육교사로 나가는데 그냥 아이들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이들에 대한 일지를 적어야 한다는 겁니다. 언제 이 이이가 왔는지 언제 밥은 잘 먹었는지, 낮잠은 잘 잤는지... 그런데 문제는 투명 아이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름은 분명 출석부에 올려져 있는데 실상은 아이는 없다는 것이죠.
이유인 즉 선 아이들 이름만 빌려온다는 것이죠. 그러면 국가로부터 월 보조금이 나오는데 그 중 2/3는 원장이 먹고, 1/3은 이름을 빌려준 부모님이 먹는다는 겁니다. 뭐 꿩 먹고 알 먹고 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일지를 원장이 적지 않고 이 자매님에게 적으라고 한다는 는 겁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처음에는 이건 “아니다 아니다” 했는데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한번하고 두 번하고 그렇게 적당하게 타협을 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 모습은 아닌가요?
이런 의미에서 오늘 다니엘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상황과 비교해볼 때 상징적으로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가장 부강했던 사울, 다윗, 솔로몬을 거처 솔로몬 이후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 -> BC722년에 앗수르에 멸망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1,2,3차에 걸쳐 침공을 당함으로 BC586년에 멸망하게 됨
 
오늘 본문 1절은 바벨론의 1차 침공 때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단1:1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이때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데 그 때 나이가 16세 정도로 지금으로 말하면 중학교 3학년 정도 추정됩니다.
여러분! 중3이면 한참 부모님 밑에서 부모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니엘은 그 나이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우울하고 참담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1. 그러면 이것이 누구의 잘못일까요?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 원인을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단1:1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무슨 말입니까?

유다가 망한 이유는 여호야김 왕의 판단 착오라는 겁니다.
똑같은 사실을 열왕기하 24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왕하24:1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 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

무슨 말인가 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 애굽과 신흥 강대국 바벨론의 틈바구니 속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여호야김은 왕이 되고 처음 삼년은 바벨론을 섬겼는데 나중에 바벨론 배신하고 애굽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죄 중에 가장 무서운 죄가 뭔 줄 아시죠? 바로 괘씸죄라는 겁니다.
여호야김 왕이 이 죄에 걸린 겁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누부갓네살의 1차 침공을 받게 됨

여러분! 여기서 지도자 한 사람의 역량, 지도자 한 사람의 무게, 지도가 한 사람의 선택이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지 발견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 안타가운 소식들이 자주 들려오는 것 중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장이 환경을 비관하여 가족동반자살 소식 아닙니까?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아직 꽃도 피어보지 못한 어린 자녀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는 겁니다.
왜 이 어린것들이 이처럼 허망하게 되었습니까? 아빠를 잘 못 만나서 아닌가요? 아버지가 때로는 엄마가 선택을 잘 못해서 아닌가요?

나라도 마찬 가지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잘 못하면 어디 그 지도자만 고통을 당한답니까? 온 나라 온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것 아닌가요?
교회 목사님들이 돈 문제, 여자문제, 이것 그 교회 목사만의 문제인가요? 이 나라 전체교회가 욕먹고, 모든 성도들이 함께 수치를 당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는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정치를 잘하니, 못하니, 목사님이 목회를 잘하니 못하니, 오이코스 리더가 잘하니 못하니 뒤에서 비판하고 판단만 했지 진정 그들을 위해서 기도는 하지 않는 것 이거 우리 모습은 아닌가요?
그러면 왜 기도해야 하는가?
딤전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쉬운 성경 - 딤전2:2 또한 왕과 높은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며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왜 기도해야 한다고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하며 조용하고 평화롭게 생활을 하려 함이라  즉 내 영혼이 안전할 수 있음
 
2. 눈으로 보기에는 여호야김 왕이 외교정치를 잘 못해서 침공을 당한 것인데 영적 통찰력을 통해서 볼 때 또 다른 원인이 있더라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단1: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무엇인가하면? 바로 “주께서”입니다.

이 성경구절을 쉬운 성경으로 보면 더 실감납니다.
단 1:1 유다 왕 여호야김이 왕이 된 지 삼 년째 되는 해에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을 포위했습니다. 단1:2 그러자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을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로로 넘겨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눈으로 보기에는 여호야김 왕이 무능해서 외교정치를 잘 못해서 괘씸죄 때문에 바벨론이 침공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내면을 영적 통찰력으로 바라보면 왜 그렇다고요? 주께서 주께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오늘 눈으로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고, 비난하고, 저주를 퍼 붓고, 하나님을 조롱함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을 영적 안목으로 볼 때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2절 “주께서” “주께서”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일을 주관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겁니다.

왕하24:2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그럼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왕하23:36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스비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23:37 여호야김이 그 열조의 모든 행한 일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정치를 잘 못하고 외교를 잘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고 더 깊은 내막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못된 것, 하나님과 관계가 어긋난 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것이 근본적으로 나라가 망안 이유라는 겁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 깨어진 가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돈이 없어서 입니까? 더 좋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더 비싼 자동차를 타지 못해서 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관계가 잘못 되어서 깨어진 것 아닌가요?

마찬 가지로 오늘 우리의 삶을 보면서 맨날 정치인 탓, 환경 탓, 누구누구 탓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황, 환경 때문 인 것 같고 사람을 잘 못 만나서, 속된 말로 재수가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보면 무엇 때문이라고요? 하나님과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3.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단1: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입니다.
 
목원대학교 이희학교수는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성전 기구 얼마가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속적인 교제가 중단되었음을 뜻한다.
하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축복의 관계는 단지 임시적으로 중단되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한 증거는 느부갓네살이 가져온 예루살렘 성전의 기구들은 전부가 아니라 그 중의 일부일 뿐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불씨가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라 축복의 일부만을 빼앗겼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언제든지 너희들의 마음의 중심이 나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면 회복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언제든지 나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자리로 돌아오면 회복될 수 있다는 겁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회복의 열쇠는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리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준비 시키고,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무엘이었고, 다니엘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패턴입니다.

여러분! 사사기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극도로 타락한 시대가 사사시대 아닙니다.
그 암흑의 시대를 한마디로 사사기 맨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삿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러분 정말 왕이 없었습니까? 하나님이 왕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요
마치 둘째 아들 탕자와 같이 아버지를 더 이상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 암흑의 시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고 계십니까?
사무엘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마찬 가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인들에게 수치를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준비하고, 다니엘을 일으키시고 계셨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수치를 당하지만 다니엘과 같은 다음세대들이 불같이 일어나길 기도해야 합니다.
숨겨진 하나님의 히든카드가 다니엘이 듯이 이 시대를 회복시킬 하나님의 히든카드가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되길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떤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준비했을까요?

1. 올바른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
단1: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과 같이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렇게 다니엘의 이름을 벨드사살이라고 고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거부하고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세요. 아니 포로로 잡혀가 그들에 의해 이름을 고쳐버렸다면
이제 뭐라고 해야 합니까? 나 벨드사살은 이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 다니엘서 7:28, 8:1, 15, 27, 9:2, 10:2,7, 12:5을 보면 여러 곳에서 “나 다니엘” “나 다니엘” 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내 이름을 너희들 마음대로 고쳤지만은 나는 밸드사살처럼 살지 않겠다는 겁니다. 다니엘처럼 살겠다는 겁니다.

다니엘 이름의 뜻 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입니다.
반면 벨드사살은 벧이(바벨론 신들 중 하나)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신다 의 뜻

나는 우상을 섬기고 우상의 영향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 다니엘은 그따위 시시한 우상을 두려워하는 쫄 장부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 자녀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기위해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여러분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를 의식하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누구를 두려워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자주 자주 질문을 해 보아야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환관장은 눈에 보이는 권력자를 두려함, 여론, 사람을 두려워하였지만 다니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그 이름을 벨드사살이라 고침을 당하였지만은 그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 심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곳에서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당 안에서 눈물, 콧물 흘리는 것이 우리 실력이 아니라 바벨론과 같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음에 우리의 실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벨론과 같은 이 땅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날마다 방황하고 배회하고 허망한 꿈이나 꾸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이곳에서 너무나 잘 즉응한 나머지 하나님 자녀로서의 정체감도 버리고 바벨론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세상 종말이 가까워 온다고 사회에 적응도 하지 못하고 가정은 내 팽개치고 교회만 기도원만 찾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세상에 너무 잘 적응하여 하나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도 아니라 이 세상에 적응하며 살되 하나님 자녀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 자녀답게 사는 것, 이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살아가야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다니엘이 이 삶을 살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동화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의 삶 (학교 식사 시간 기도)
이것이 다니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삶의 모습인 겁니다.

2. 뜻을 정한 사람, 결단의 사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만약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포로로 끌려갔다면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떠하던지 그 곳에서 출세하여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다니엘의 어떤 모습입니까?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 마음을 결정했다는 겁니다. 무슨 마음의 결정을 했습니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안마시겠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왕의 음식은 우상 앞에 드려진 음식이기 때문에 안 먹겠다고 해석하는데
볼드인 이라고 하는 주석가는 그 당시 왕의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는 왕에게만 충성하고 왕 만을 의지한다는 언약관계를 상징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를 먹지 않겠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나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지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나는 하나님께 순결을 바친 사람이라는 겁니다.
나는 비록 포로로 끌려와 있지만 느부갓네살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웃기지 말라는 겁니다. 지조가 있는 사람인 거예요.

여러분은 바벨론과 같은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누구의 영향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 –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영향만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맨날 달라고 조르는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녀를 위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우리 자녀들이 이 바벨론 같은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향을 받는 자녀 되게 해 주세요.

우리에게도 그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잠시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이 세상의 것들로 나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갈 것이다.

문제는 뜻은 정했는데 뜻만 정하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뜻을 정했으면 그렇게 살기 위해서 해야 할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말하는 겁니다. 입으로 선포하는 겁니다.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결심했습니까? 그렇다면 이야기 하는 겁니다. 말로 선포하는 겁니다.

아내 결혼 – 10년 연애 성공이유 선포하는 겁니다. 나 결혼할 사람 있다.
이것이 나를 참고 견디고 인내하게 하더라는 겁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긴 사람
지금 다니엘에게 엄청난 평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포로로 잡혀온 주제에 바벨론 왕궁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어야죠. 특히 자기들의 직속상관인 환관장에게 잘 보이고 그의 말을 잘 듣는 것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다니엘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무슨 말입니까? 세상적 기회를 잡기 위해, 자기에게 찾아온 출셋길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게 잘 보이고, 사람들에게 아부하고, 신앙양심을 팔아먹는 그런 비굴한 짓을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대신 하나님과 관계를 원한다는 겁니다.

뜻을 정했다는 말은 어떡하던 사람들의 눈에 드는 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들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인간적인 세상적인 기회를 잡기 위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 일까요?
하나님 없는 기회, 하나님 없는 화려함, 하나님 없는 왕궁생활, 하나님 없는 성공은  모래위에 세운 집과 같다는 것을 다니엘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이 땅에서의 출세, 명예, 성공, 이 땅에서의 성공의 이력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추억)을 원했던 겁니다.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겁니다.

부모는 자녀와 관계를 원하는데, 소중한 추억을 원하는데 그래서 같이 가기를 원하는데 자녀들은 이런 부모의 마음을 자녀들은 전혀 몰라요, 단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용돈이 필요함, 지갑이 필요함. 얼마나 마음이 무너지는지.... 이것이 하나님 마음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원하는데 우리는 맨날 하나님의 손의 능력이나 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러분 보십시오. 모세와 다니엘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화려함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백성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했다는 겁니다.

사실 이후에 이들이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찾아왔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들의 인생을 누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그물이 찢어 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은 후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주님을 선택함으로 그 이후 그의 삶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이 찾아 와 마침내 순교의 재물이 되었지만 누가 그의 인생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그러실거에요. 네가 네 생명이 누구보다 귀한 줄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내게로 향해 있구나 고맙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간 두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와 에녹입니다.
엘리야는 충분히 그런 삶을 살았지만 에녹을 살펴보면 아무런 경력이 없어요. 예쁜 구석이 없는 겁니다.

창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하나님과 동행 ->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무엇을 어마 어마한 일을 이룬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과 동행했데요.
하나님 관계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장5:24절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의 모양 - 신앙의 경력, 영적 경력
경건의 능력 – 하나님과 관계

사랑하는 예수촌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신앙의 경력, 신앙의 이력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까?

오늘 여러분 왜 예배를 드리시나요?
우리 앞에 놓여있는 심각한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인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을 위해서 인가요?
네 그것 필요합니다.

하나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이 문제 해결되기를 원했는데, 네 사업 잘되기를 원했는데, 가정이 경제적으로 회복되고, 내 자녀 좋은 대학을 원했는데 하나님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할지라도 하나님 그곳에 하나님과 만남의 추억이 있다면 나는 이 땅의 성공 부럽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애기를 하더라구요.
하나님 앞에 남편이 하는 일이 질되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은 형편이 너무 어려워 갓난 어린아이 우유하나 사 먹일 돈 초차 없는 환경, 손에 단돈 천원이 없는 환경으로 인도하셨다고요.. 그러나 여러분 그 곳에 하나님을 만나는 추억이 있다면 나는 세상적 성공 부럽지 않다는 겁니다.
 
여러분 요셉을 보십시오
누가 노예의 신분을 원합니까?
누가 감옥을 원합니까?
그런데 요셉에게 있어서 실패의 상징인 감옥이 그의 삶에 있어서 승리의 상징은 총리가 된 것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억울함의 상징인 감옥이 하나님과 추억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쌓여가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 보면 정말 어려운 환경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너무 마음이 아플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어두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추억을 경험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 때문에 기쁘고 즐겁고 성공하길 원했는데 나는 날마다 화려한 전공을 원했는데 성공의 이력만이 있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은 나를 그 초라한 실패의 환경으로 인도해 가시는데 지내고 돌아보니 그 실패의 자리가 없었더라면 화려함만 추구하며 살아가다 놓칠 수 있었던 소중한 추억을 위해 하나님 허락해 주신 축복이더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어려움에서 탈출하는 것만 은혜가 아니라 지금 그 환경이 은혜입니다.
그 어려움이 아니었으면 누가 하나님과 교제의 자리에 들어갔겠습니까?
그 고난의 현장이 내 생에 너무나 소중한 하나님과 추억이 되는 장소가 되더라는 겁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 찬양이 생각이나 수없이 듣고 불렀던 찬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예수님을 십자가를 생각했던 마음으로 작사했던 찬양입니다.
 
(1절) 아름다웠던 지난 추억들, 사랑했었던 많은 친구들, 멀고도 험한 고난의 길을
나 이제 말없이, 주님을 위하여 떠나야지
(후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위해 당신이 바친 고귀한 희생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맞이하네

(2절) 지난 유월절 저녁 성찬때 주님과 함께 마시던 핏잔  그 일이 문득 생각이 나면
어느새 내 뺨에 주르르 눈물만이 흐릅니다
(후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위해 당신이 바친 고귀한 희생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맞이하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봉사, 헌신, 여러분의 섬김,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또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 위해 이 땅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여 외롭게 신앙의 노를 젓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누가 알아주지도 않지만 중보기도의 재물이 되어 날마다 자신을 드리는 그 고귀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을 그러한 삶을 누가 알아주지 않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주님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기쁨을 축복합니다. (주방)

이 찬양은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자기가 실패했던 기억 아파던 추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3절) 새벽닭 울 때 난 괴로 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젠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텐데 
(후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위해 당신이 바친 고귀한 희생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맞이하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이 땅에서 성공, 화려함의 이력이 아니라 초라한 주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과의 추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노랫말과 같은 추억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과 나만의 추억이 있으십니까?
떠올려지면 눈물이 나고
떠올려지면 감사가 나오고
떠올리면 아팠고 괴로웠고 우울증이 찾아왔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만져주셨던 추억이 있는 그 장소가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추억을 원하세요.

이 시간 조용히 기도하실 때
하나님 이 시간 내 문제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서 화려함을 위해 이 자리에 나왔는데 하나님 나를 실패의 자리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 모든 신앙 행위를 내 위주 내 초점으로 했는데 오늘은 하나님 위주로 예배하며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외롭게 해드렸던 것 죄송합니다.
하나님 외롭게 해드렸던 것 회개합니다.
우리 다 같이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가길 원합니다.
하나님 오늘 이 시간부터라도 하나님과 추억을 쌓아가길 원합니다.
화려한 성공만을 구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하나님과 소중한 추억을 추구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찬양 44장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