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복음 된 자의 삶
엡5:15-21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형상 히) 쩨렘 으로 “닮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보면 우리와 똑 같지는 않지만 우리를 닮았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똑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단어는 아무 때나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여러분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개나 고양이에게 어,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났네, 이렇게 말하지 않지 않습니까?
마찬 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도 아무 때나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고후4: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에게만 사용되어야 할 단어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굳이 이 형상이란 단어를 쓰신다는 겁니다.
왜일까요?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애초에 만드신 목적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러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영광 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을 영광 한다 -> 하나님을 반사한다, 나타낸다, 보여준다, 증거 한다 의 뜻인데 과연 이 삶을 살아내고 있느냐는 겁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알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우리를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를 보면 압니다.
교회하면 떠오르는 생각 -> 무기력, 무능력, 무영향
그러니 교회나 성도를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습니다.
단 하루도 하나님의 이름이 욕먹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우리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봅니다.
우리가 그들을 걱정해야 하는데 그들이 우리를 걱정합니다.
어! 교회가 저래서는 안 되는데
성도가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교회가 교회답지 않고 성도가 성도답지 않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교회다움, 성도의 성도다움이 무엇일까요?
교회 사이즈가 커지면 그것이 교회다움일까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그것이 교회다움일까요? 아니에요.
여러분! 아이가 비대해졌다고 그것이 건강해진 것이라고 말하면 안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교회 사이즈가 커지고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그것을 교회가 건강해진 것이고, 교회다움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다움이란 무엇일까요?
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것이 교회다움이 아닌가요?
무슨 말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것 이것이 진정 교회다움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의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데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이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이 생각을 하면 참 마음이 슬퍼집니다.
여러분 식당은 많은데 손님을 모시고 갈만한 식당이 없다면 이거 정말 슬픈 일입니다.
교회는 많은데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교회가 없다면 이건 더 슬픈 일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것은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해서 아닌가요?
복음이 변질되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요?
여전히 복음이 이론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요?
이것을 AW 토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교회가 기독교의 진리에 물을 타버렸다. 그리하여 그것이 독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죽일 수 없고 그것이 약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고칠 수 없게 되었다”
복음에 물을 타 버렸다는 겁니다.
복음에 적당히 MSG를 넣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의 참 맛을 잃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이영돈의 먹거리 X파일 (파주 착한 떡볶이집, 강원도 횡성 삼군리 메밀촌)
참 복음의 맛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것 누구의 책임 -> 목회자들
또 한 성도들도 MSG를 넣은 말씀에 익숙하다보니 참 맛에 대한, 복음의 말씀에 대한 기대감도 없습니다.
얼마 전 가족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아내가 국에 화학조미료가 많이 들어갔다고 하니 막내아들 하는 말 “어머니, 여기서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라냐고..”
여러분 이것 오늘 누구의 모습인가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가요?
만약 그렇다면 이거 심각한 거 아닌가요?
그러니 우리의 삶에 참 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겁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는데
여전히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순 엉터리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적 관점, 가치관,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룻기 룻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1: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음
엘리멜렉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 말론과 기론과 함께 흉년을 피하여 모암지방으로 내려갔다라고 말함
여러분! 엘리멜렉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와 왕”이란 뜻을 가짐
그런데 실제적 삶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해 드리는 삶을 살찌 못함
왜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신앙인이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을까요?
혹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이름은 “하나님의 나의 왕” 같이 성도요, 크리스천이라 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 가치관, 살아가는 방법은 순 엉터리 아닌가요?
왜 그럴까요?
한 마디로 복음이 내게 복음 되지 않아서 그래요.
진리가 진리 되지 않아서입니다.
복음이 변질되고 진리가 변질되어서 그것이 독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죽일 수 없고 그것이 약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고칠 수 없게 된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복음에 대한 교리공부나, 복음에 대한 설교가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대한 성경공부를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성경공부, 교리공부, 설교를 많이 들으면 그것을 복음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복음을 알기 위한 수단입니다.
성경에서 말한 진정한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지식, 이론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그분 자신이 복음입니다.
예수님 그 분 자신이 복음입니다.
예) 암 환자 –> 시한부 -> 제약회사 신약을 개발 -> 먹으면 완쾌된다는 소식을 들었음
복음인가요? 아닌가요? 복음, 그럼 약을 만는 과정.. 이론이 생명이 아니라 약 자체가 복음
둘째는 그 예수님이 내게 실제 되는 것입니다.
고전1:30의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바울의 고백처럼 인격체이시고 살아계신 그분이 내 개인에게 실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즉 예수님이 내게 실제가 되는 것 이것이 복음이 복음 되는 것입니다.
암환자 –> 약이 내게 실제 복음 되기 위해서 -> 약을 먹어야 함
마찬 가지로 복음이 복음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먹어야 함 – 성령의 조명으로 깨달아야함
예) 구원이 여러분에게 이론입니까? 실제입니까?
실제라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신약에 나오는 “복음”은 헬) 유앙겔리온 인데 즐겁다, 기쁘다, 희락이 넘치다의 뜻 그러니까 복음 그 자체가 기쁨의 회복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받았다, 구원의 확신의 증거 -> 기쁨
만약 오늘 여러분들이 기뻐하는 기쁨의 원인이 -> 복음으로 인한 본질적 기쁨이 아니라 현상으로 인한 기쁨이라면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복음 된 자의 삶 -> 성령 충만한 삶
1. 성령에 충만한 자의 삶이란?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삶.
여러분은 누구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이끌고 있습니까?
말은 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산다고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는 내 지식, 내 경험, 이세상의 가치관, 세상적 방법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을 보세요.
출발은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감
그런데 문제가 뭔가요?
가나안 땅에 도착하니 그곳에 기근이 심함 ->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창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 세상적 방법으로 애굽행을 택함
이거 우리 모습 아닌가요?
사실 여러분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압니다.
왜입니까?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사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여기 까지는 어렵습니다. 왜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그러나 또 한편으로 쉽습니다.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 말씀을 붙들면 쉽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결정만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똑똑합니다. 너무 계산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너무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용량은 적은데 이해하려고 하면 머리만 더 혼란스러워 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은 이해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뢰 하십니까? 할 때 아멘으로 대답하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혹 우리 가운데 지금 환경이 너무나 힘들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훈련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 신뢰 -> 외줄타기
2. 성령에 충만한 자의 삶이란? 성령의 통치를 받는 삶
복음 내게 복음 된 자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데 성령 충만 자의 삶
1)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 삶
2) 성령의 통치를 받는 삶입니다.
행2장은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성령의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성령 충만 하니 그 즉시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성령 충만하니 가장 먼저 가장 강력한 변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언어의 변화입니다.
입술이 달라졌습니다.
말하는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입술이 성령님의 통제를 받기 시작하드라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진짜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보다 더 엉터리입니다.
언어가 공경적임
언어가 비판적임
입술이 정직하지 못해요.
여러분이 상처 받았다 상처 받았다 하는데 그 상처의 주범 무엇입니까? 바로 말아닙니까?
얼마 전 EBS와 한국교총에서 중,고등학생들의 언어를 4시간 동안 녹음을 해서 분석 했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어요. 4명의 학생이 4시간 동안 대화한 내용 중에 학생 1명이 4시간 동안 욕을 내 뱉는데 194.3회, 시간당 평균 약 50번, 1분 15초에 한 번씩 욕설을 쉴 새 없이 욕을 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조사에서 우리의 자녀들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왜 이들이 이렇게 욕을 할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 내면의 상처가 욕으로 분출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상처의 주범이 누구냐? 그것이 바로 부모님들이라는 겁니다.
오늘 왜 자녀들이 가장 사랑을 받아야 할 부모로부터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 줄 아세요.
왜 일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 부모님들의 입술이 성령의 통제를 받지 않아서 그래요.
교회 안에서 상처 -> 1순위 -> 말(판단, 비판, 비방, 후욕) -> 성도들이 입술이 통제 불능상태가 되어서 그래요.
오늘 왜 이 복음이 생명인데 사람을 살릴 수도 없고, 독이라고 사람을 죽일 수도 없게 되었나요?
오늘날 강단이 하나님의 통제, 성령 하나님의 영향력을 받지 않아서 아닌가요?
행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함.
저는 오늘 우리 모두의 언어가 성령의 통제를 받는 언어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입술이 성령의 통제를 받는 입술이 되길 원합니다.
너무 기질을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그 기질이 누구의 통치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염영철
성령의 영향력을 받는 삶 – 자동차 리모컨 내차 한 대만 영향력을 받음
우리가 성령의 인도와, 성령의 통제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중요한 4가지
성령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인정해야 함.
잠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믿음이 필요함
성령님이 계신 것과,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고, 성령님을 의뢰할 때 가장 선하고 안전한 길로 이끄시는 분임을 인정하고 신뢰함이 필요함.
출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 나를 인정해 다오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따라서 항상 성령님 하나님을 묵상하고, 예배하고,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정하고, 행하신 일에 대하여 묵상하고 경배, 경외, 존중,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구체적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인식, 의식하고 신뢰하고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 포도나무교회 – 전화 – 왜 성도들은 조그마한 일을 해 놓고 인정받고 싶어하느냐?
사람이기 때문에... 인격자 이기 때문에...
마찬 가지로 성령 하나님도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인정받기를 원하심
언젠가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가족이라는 시를 써가지고 그것이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아버지들이 열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엄마가 있어서 좋다 나를 이뻐해주셔서
냉장고가 있어서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서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것 같아 씁쓸함
여러분 앞에 말씀 드렸던 초등학생이 범한 우가 무엇입니까?
이 아이는 어려서 온통 눈에 보이는 것 밖에는 볼 줄 모르는 철이 없고 미숙하다 보니 제 엄마가 먹을 것 주면 엄마가 고맙고, 냉장고에 먹을 것이 많으면 냉장고가 고맙고, 심지어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까지 고마워하면서 사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기가 누리는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하도록 일은 아침 이 꼬맹이가 눈뜨기도 전에 회사로 달려 나가 뼈 빠지게 수고하는 아버지의 수고가 보이지 않아서 애는 철부지라는 겁니다.
이 시를 오늘 성도들에게 적용해보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있어서 좋다 나를 이뻐해주셔서
장로가 있어서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오이코스 리더가 있어서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그런데 하나님은 왜 있는지 모르겠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합니까?
혹시 여러분 교회 안에 우리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가장들이 가지고 있는 그 섭섭함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 아닐까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눈에는 누가 보입니까?
교역자만 보이고, 리더만 보인다고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교회를 교회 되도록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그런 교회라면 그 교회는 병든 교회입니다.
여러분 철이 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구나 우리 아버지 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위해 애쓰시는 구나 이것이 보이는 것이 철이 드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영적으로 철이 든다는 것은 뭘 이야기 하겠습니까?
우리 예향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 교회의 호주 되시고 아버지 되심을 볼 줄 아는 것이 영적으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하나님의 인도, 통치를 받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무슨 말입니까? 이후 모든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첫 단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심의 인정,하는 것, 선언 하는 것 이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는 구체척인 것 -> 자주 묻는 것
예) 상담. 설교
우리가 성령의 인도와, 성령의 통제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중요한 4가지 중 2번째
2. 성령 하나님께 민감 하자
오늘의 우리의 문제 민감할 때 둔감하고 둔감할 때 민감 하는 것이 우리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민감해야하는데 거기에는 둔감함
사람들의 소리에 둔감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민감함
사울 왕 – 한마디로 처음에 좋았으나 끝은 실패한 사람
사울 왕의 문제: 민감해야할 하나님께 둔감하고 둔감해야할 백성들의 소리에 민감한 사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오늘 여러분은 어떠세요? 어디에 민감하세요?
하나님의 작은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함.
초음파 검사 때의 의사의 눈빛에 민감함과 같은 민감함.
다윗 성령 하나님께 민감한 사람
삼상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4: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24: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만약 다윗의 하나님께 민감하지 않고 환경에 민감했다면 그 날 사울은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다윗의 사람에게 민감했다면 그날 나단은 목숨은 붙어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윗의 범죄 했지만 우리가 다윗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성령 하나님께 민감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은 마치 칼과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께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됨.
우리가 칼을 사용하지 않고 가만 두면 그것이 칼이라 해도 무엇도 벨 수 없는 무딘 것이 되듯이 성령 하나님께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우리가 심령이 무디어져서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됨
“닭아 없을 지언정 녹슬게 하지는 말자”
우리가 성령의 인도와, 성령의 통제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중요한 4가지 중 3번째
3. 성령 충만을 갈망하라
갈망하는 것 – 목말라함
지독한 가뭄 때 '헐떡거리는' 들짐승들을 묘사하는
요엘1:20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요엘1:20의 문맥을 고려할 때 이 용어는 '찾기에 갈급함같이로 번역하기보다는 '울부짖으며 찾음과 같이'로 번역해야 원문의 의미가 살아날 듯싶다(Luther).
아이가 성장하려면 반드시 성장통이 있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을 갈망한다면 성숙에는 반드시 성장 통이 따름을 기억해야함.
성장 통이 없는 리더는 병든 리더다.
여러분! 운동. 엘리베이터 두고 걸어서 올라감.
아파야 해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만족하면 안 된다.
성장하면 통증이 있게 되어있어요.
아무런 성장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 – 병들었다는 증거임을 자각해야 함.
고통이 느껴지십니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건강한 교회를 향한 갈망이 있는가?
갈망이란 내가 살아있다는 가장 중요한 감정이다.
아프다는 것, 갈망이 있다는 것 ->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정말 가정을 위하여 정말 갈망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부부 사이가 회복되길 원하면 갈망이 회복의 원천임을 믿습니다.
교회가 회복되기를 정말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갈망이 교회 회복의 원천임을 믿습니다.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세워지길 갈망하십니까?
그렇다면 갈망이 회복의 원천임을 믿습니다.
성도들이 회복되기를 정말 원하십니까? 갈망이 성도들의 회복의 원천입니다.
영혼이 건강해 지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게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 만나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갈망이 주님 만나는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와, 성령의 통제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중요한 4가지 중 4번째
4.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함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성결(카다쉬): 잘라내다.
타락하고 변질된 세상에서 불순하고 더러운 것들을 날마다 잘라야 합니다. 끌려 다니면 안 됨.
나의 약한 것들을 날마다 잘라야 합니다.
옷을 바꿔 입다. 옷을 빨아 입다. 예배시간, 오이코스, 모임을 통하여 지난 한주 동안 세상에서 흙탕물을 세탁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수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우리는 수없이 많이 십자가의 복음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복음이 복음 된 자의 삶을 살고 있느냐입니다.
복음이 복음 된 자의 삶은 -> 성령충만한 삶
즉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통치를 받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
1)성령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
2)성령 하나님께 민감하게 반응하기
3)성령의 충만함을 갈망하기
4)성결한 삶을 살아가기
사실 이런 설교 우리 한 두 번 들었습니까?
문제는 들어도 잘 안 되더라는 겁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늘소리 콰이어 – 은혜 아니면
어둠 속 헤매이던 내 영혼
갈길 몰라 방황할 때에
주의 십자가 영광의 그 빛이
나를 향해 비추어주셨네
주홍빛 보다 더 붉은 내 죄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어
완전한 사랑 주님의 은혜로
새 생명 주께 얻었네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십자가의 그 사랑 능력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놀라운 사랑 그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나의 노력과 의지함이
오직 주님의 그 뜻 안에서
의로운 자라 내게 말씀하셨네
완전하신 그 은혜로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롬8:26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어떨 때 도우십니까? 내가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그분의 통치 가운데 거하기를 사모하는 한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 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구절은 마치 독수리가 열심히 날개 짓을 해서 창공을 비상하는 것을 연상합니다.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 너무나 잘 못 된 것
어떤 성경 soar on wings like eagles (쏘오링 온 윈스 라이크 이글스)
쏘오링: 이 단어는 자기가 날개 짓 한다는 의미가 아님
이 쏘오링은 글라이더의 활공을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글라이드는 자기가 날개 짓을 해서 하늘을 나는 도구가 아니잖아요.
글라이드는 날개를 펼쳐서 공기의 기류를 이용해서 나는 도구임.
마찬가지로 독수리가 하늘을 높이 날아오를 때 자기가 날개 짓 해서 나는 것이 아니고 태양열이 땅을 비취면 공기가 따뜻해 짐, 그러면 그 따뜻해진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독수리는 그 따뜻한 공기가 위로 상승할 때 그 상승 온난 기류를 찾아서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상승온난기류를 만나면 날개 짓 대신에 그 큰 두 날개를 펼쳐서 기류를 타면서 올라간다는 겁니다.
독수리는 나는 것에 굉장히 약한 조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독수리가 날개를 펴면 대약 2m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육중한 날개 무개 때문에... 참새는 날개가 작기 때문에 자기의 날개 짓으로 날수 있지만 독수리는 너무나 무개가 육중해서 날개 짓을 하기 어려운 조류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독수리가 하늘을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의 날개 짓이 아니라 지구의 상승 온난 기류를 만난 것라는 겁니다. 그 기류를 만날 때 날개를 펼치기만 하면은 글라이딩처럼 쏘오링 창공을 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독수리에 반해 참새는 자기 날개 짓으로 하늘을 나는 존재임
그런데 여러분 참새가 높이 납니까? 독수리가 높이 납니까?
참새는 자기 날개 짓으로 금방 지칠 수밖에 없어요.
사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지치고 탈진합니까?
우리가 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 보겠다고 애쓰면 애쓸수록 돌아오는 것은 실망뿐입니다.
자기의 날개 짓으로 날면 피곤하고, 곤비하며, 넘어지고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참새처럼 자기 날개로 파닥파닥 거리며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 우리 몸을 맡기고 날개를 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그 온난 기후에 내 몸을 맡기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글라이딩 하는 사람들이 한번 상승기류를 만나면 그 상승기류를 벋어나려고 하지 않듯 하나님의 은혜의 상승기류를 벋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몸부림이 이 하나님의 영역 안에 벗어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날개 짓으로 사역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저 날개만 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날개 짓을 한두 번 해보셨습니까?
자녀를 위하여 날개 짓 한두 번 해보았습니까?
아무리 날개 짓을 해도 돌아오는 것은 피곤하고 지치고 낙심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제 영적인 상승기류를 만나서 하나님이 주신 그 큰 날개를 펼치기만 하면 참새 같은 몸부림으로 날 수 없었던 저 놀라운 창공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 찬양이
172장 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펴) 올라가 듯 나주님과 함께 이러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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