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에 의한 삶(한서교회) 2강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
갈6:7~8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어제 저녁 인생이란, 삶이란 근본적으로 심고 거두는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의 특징을 한마디로 - 육체를 위하여 심고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삶과, 성령을 위하여 심어 영생을 거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조차도 여전히 육체의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난 지간에 네 가지 범주로 살펴보았습니다.
성적인 범주, 세상 사랑의 범주, 이 세상의 영향을 받는 범주 그리고 깨어진 인관 관계의 범주
갈5장에 육체의 일을 열거하는데 한 번 보세요.
갈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쭉 열거된 것 보세요. 쭉 열거되는 인간의 저급한 본성을 들여다보니 대부분이 인간관계와 연관되어 있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짖는 것, 분열 이거 전부 인간관계와 관련된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인간의 타락으로 그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살 때 가장 무서운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옴
그런데 반해서 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들을 보니까?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러고 보니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는 성령의 열매를 보니 이것들 모두 전부다 관계적인 측면이에요.
인격이 변화됨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는데 사용되는 열매들이 바로 성령의 열매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된 육체의 욕심이 하나같이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이간질 하고 수군수군 거리고 뒤에서 비방하는 성질의 것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는 그렇게 해서 무너지고 깨어진 인간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데 필요한 열매들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성령 충만해서 방언을 하고, 기도사역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지만 뒤로 전화해서 누구 비방하고 욕고 험담하고 이러는데 익숙한 분이 계시면 여러분 반드시 점검해 보세요. 이것이 성령 충만 인지 알 수가 없어요.
여러분 우리는 성령이 충만하면 어떤 방언이나, 방언통역이나, 신유나 이런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요.
왜냐하면,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필요한 대로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방언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성령 충만하다면 깨어진 관계를 복구 시키고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이간질 시켜서 나와 너 사이가 건너간 것들이 치유되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도덕성이나 영적 경험이 아니라 그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어떻게 행동하는 가로 측정할 수 있다.
성령 충만은 기도를 몇 시간 하느냐, 방언이 얼마나 원활하냐. 어떤 신령한 은사를 경험했느냐 이것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행동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 됨을 추구하는가 이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창33에 보면 오래 원수로 지낸 형제 에서와 야곱이 극적인 화해를 하는 참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데 이런 일이 있기 바로 직전인 창32장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하면
창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무슨 말입니까? 형에서를 만나기 전에 강력한 성령의 충만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영적인 충만함을 경험하고 그 충만함을 가지고 33장에서 형 에서를 만나 뭐라고 말합니까?
창33:10절 하반절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예전엔 형을 인격적 관계로 상대하지 않고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형 손에 들려질 축복을 빼앗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취하기 위해 아버지와의 관계, 형과의 관계를 깨트리는 것도 불사하고 그래서 야곱의 가치관은 이까짓 인관관계가 무슨 소용이냐는 거예요 .
세상에서 내가 성공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러면서 사람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것이 야곱이에요.
오늘도 성령 충만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야곱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야곱은 진정성을 가지고 형을 만나고 후대 하니 형에서의 마음이 녹아 내려 화해가 이루어짐
그러면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따라 깨어져 버린 관계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컴퓨터를 하다보면 바이러스 침투로 프로그램이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이 비 정상적인 상태를 정상적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구 프로그램 아닌가요?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죄의 바이러스로 인하여 치명적인 상처를 받아 총체적 위기로 믿는 성도들조차도 가정이 깨어지고, 관계가 깨어지고, 세상의 화려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오늘의 시대 속에서 이 깨어진 관계를 다시 정상적으로 복구 시킬 수 있는 복구 프로그램이 무엇인가?
오늘 성경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다 말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란?
1.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무엇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대답은 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내 지식, 경험, 이세상의 방법이 아니면 어떤 기도사역..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의 삶에 현장에 하나님이 실제 경험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삶은 무엇을 의미한가요?
1)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따라 사는 삶
느헤미야를 보면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함
그러면 다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느8: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지금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성벽을 다 재건하고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말씀을 들려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까요? 왜 그들이 다른 것을 요청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달라고 요청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이 생명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인 것을 알고 믿는 자는 –>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게 되어있음
예를 들어)
민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출애굽 시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의 마지막 재앙이 장자재앙이죠.
그 재앙을 피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것이었습니다.
출12: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12:6 이 달 열 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12: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동방박사 – 말씀을 따라 순종 ->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
저는 여러분들에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으로 들려 지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고민이라고 합니다.
이런 분들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렇게 강퍅했던 사울,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옥에 가두기 위해 공문을 받아들고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 주님의 음성을 들려질 때 바울사도로 변하는 사건이 일어나더라는 겁니다.(행9)
다메섹 도상에서 다른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에요.
사울아 사울아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에 임하니까 그것이 인생이 변하는 사건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하나님 오늘 죄 안 짓고 살게 해주세요. 기도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합니까?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좋은 성격주세요,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 되게 해주세요. 기도하십니까?
지체들을 위해서 무엇을 기도합니까?
죄짓지 않게 해주세요, 기도하지만 그런데 이렇게 죄악의 폭우가 쏟아지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그 죄악의 흙탕물이 조금도 튀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결단이 일어나고 회개가 일어나고 우리 삶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 예배를 통하여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 문제가 해결되고,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인가요? 좋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게도 말씀을 들려지는 인생이 되게 해주시오.
오늘도 예배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은혜를 부어주세요.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인생이 되게 해주세요.
여러분은 무엇이 있어야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이 땅의 것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떡이 뭔가요? 이 세상의 좋은 직장,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여러분 이것이 부흥입니다. 진정한 영적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목말라 하고 진리에 대해 목이 타는 갈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싶어 하고
내 삶이 이 진리의 지배를 받고 싶어 하는 이 안타까운 마음,
이 진리의 말씀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의 행렬,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갈증에서 부흥은 시작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도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뼈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성도가 목사님 설교를 듣다가 아직 애들이 어린데 갑자기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을 소집해서 미리 유언을 말했답니다. 무슨 유언을 해야 하나 생각하다 갑자기 요한복음 14:6절 말씀이 생각이 나더랍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랬더니 조끄만 한 애가 이렇게 도발적인 질문을 하드랍니다. 아빠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순간적으로 당황 했는데 아빠의 대답 “아빠가 가 봤어”
성경이 그렇게 말해, 옆집 아저씨가 그랬다가 아니고 “아빠가 가 봤어” “엄마가 가 봤어” 이렇게 대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은 성령의 인도 즉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치유되지 못한 상처입니다.
치유되지 못한 상처의 위험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드는 고리를 만듦
요나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고리를 만듦
많은 사람 - 내면의 상처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됨
순종의 사람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처가 치유되어야 함.
우리 모두는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함, 왜?
그래야 내가 잘되니까?
그래야 문제 해결이 되니까?
그래야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으니까?
아니에요. 왜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그래야 하나님 앞에 순종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상처치유?
① 하나님의 성품과 주권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가장 옳은 길로 인도하심
하나님은 전지하심 - 최선의 길로 이끄신다.
전능하심 -완전한 길로 인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왜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게 하셨는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여기서부터 과거의 상처를 봐야한다.
나를 사랑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실수하지 않으신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은 옳아요 라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
나의 상처와 아픔을 주님이 알고 계심을 아는 것이 중요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의 상처를 다 알고 계신다는 이것 하나만 인식한다면....이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우리에게 그러한 일이 왜 일어났는가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은 분이심을 알아야함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왜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는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실 수 하지 않은 분이심을 아는 것이 중요함.
② 과거 상처를 다루심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빚어 가신다.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
시66: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 66:11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66:12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관계 어려움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해
하나님 쓰셨던 인물들은 다루셨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면 상처로 남을 수 있음.
예) 요셉 - 6살 때 어머니 주금, 아버지의 편애를 받음
형들에 의해 팔려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여 세우심
안정을 누리 때 위기가 옴 - 보디발 아내에 의해 감옥에 감.
감옥에서 꿈 해석 후 기억해달라고 했는데 잊어버림.
우리는 국무총리가 되었다면 보디발 집에 찾아갔을 것이다.
형들을 복수했을 것이다.
창50:18-21, 창50:18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50:21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다른 각도로 해석이 끝남 -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려고 그 일을 이루셨다. 그래서 자기를 판 현들의 가족까지 돌보겠다고 함, 다루심의 통로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재해석 됨.
상처가 하나님이 나를 빚어 가시는 과정으로 보아야
과거의 상처를 다루심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 현장실습하기 위해서
피차는 조교 노릇한다.
다루심을 이해하고 나면 상처를 안 받는다. 그 뒤에 하나님의 의도가 계시기 때문
과거를 상처가 재해석이 된다.
다루심 속에서 내가 다루어 질 뿐 아니라 상대방을 내가 용서할 때 그들이 자유케됨 - 욥
욥42: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42: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③ 십자가의 사랑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
십자가의 사랑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것이 내려져야 한다.
자기 야망, 욕심, 인정받으려는 것에서 기인하여 상처를 받으면 회개해야 한다.
야망 : 자기를 세우려고 하는 것, 우리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유일한 배경 : 하나님
내 문제 하나님 아신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죄, 죄책감의 문제 - 십자가에서 바라보면 해결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無
변호사의 음성을 거절하는 것
십자가를 이해하면 상처를 받지 않음 - 온유함
이것이 안 되면 자기를 과신하고 왜곡된 이해를 한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삶이란?
행7장을 보면 스데반의 순교가 나오며
행8장에 와서 예루살렘 교회의 큰 핍박이 일어나 사도 외에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짐.
이 때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들에게 전파합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음.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행8: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8: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마리아 성에 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이렇게 사역을 잘하고 있는 빌립에게 성령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죠?
(행8:26)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가라는 겁니다.
갑자기 방향전환을 말씀하심.
이해가 안 되는 인사 조치입니다.
승진이 아니라 좌천된 것 같습니다.
사역 적으로 볼 때도 비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의 부흥의 불길에 찬물을 끼 얻는 것 같습니다.
이 명령에 빌립의 반응은 즉시 순종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삶인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압니다.
사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여기 까지는 어렵습니다. 왜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그러나 또 한편으로 쉽습니다.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 말씀을 붙들면 쉽습니다.
여러분! 때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광야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그곳에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려면
“사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을 알아야 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결정만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똑똑합니다.
너무 계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의 인도에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너무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용량은 적은데 이해하려고 하면 머리만 더 혼란스러워 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은 이해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음성)을 잘 받아야합니다.
2. 성령의 통치를 받는 삶
성령으로 심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삶
성령의 통치 가운데 사는 삶
성령의 영향력을 받는 삶 – 자동차 리모컨 내차 한 대만 영향력을 받음
여러분은 누구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행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성령 충만 하니 그 즉시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성령 충만하니 가장 먼저 가장 강력한 변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언어의 변화입니다.
입술이 달라졌습니다.
말하는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입술이 성령님의 통제를 받기 시작하드라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진짜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보다 더 엉터리입니다.
언어가 공경적임 -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부사이, 자녀들에게, 성도들에게 저주에 가까움
언어폭력이 가정에 얼마나 가득한지....
언어가 비판적임
입술이 정직하지 못해요.
릭 조이너 - 빛과 어둠의 전쟁
사탄이 성도들의 공격 - 말을 타고 불화살로 공격 - 불화살 - 성도들의 말
오늘날 판단, 후욕, 비방 하는 말이 얼마나 난무한지 - 교회 공동체 안에 있음
당연시 여김, 다 하는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면 강단이 바뀌게 됨.
오늘날 교회의 무기력은 강단의 무기력입니다.
강단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지 않음.
성도들이 듣기에 좋아하는 말씀을 전하는 강단이 너무 많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들을 의식하며 설교하는 강단이 너무 많음.
행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함.
저는 오늘 우리 모두의 언어가 성령의 통제를 받는 언어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입술이 성령의 통제를 받는 입술이 되길 원합니다.
너무 기질을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그 기질이 누구의 통치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염영철
우리가 성령의 인도와, 성령의 통제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중요한 3가지
성령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인정해야 함.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믿음이 필요함
성령님이 계신 것과,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고, 성령님을 의뢰할 때 가장 선하고 안전한 길로 이끄시는 분임을 신뢰함이 필요함.
따라서 항상 성령님을 묵상하고, 예배하고,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정하고, 행하신 일에 대하여 묵상하고 경배, 경외, 존중,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구체적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인식, 의식하고 신뢰하고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젠가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가족이라는 시를 써가지고 그것이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아버지들이 열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엄마가 있어서 좋다 나를 이뻐해주셔서
냉장고가 있어서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서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것 같아 씁쓸함
여러분들은 언제 가장 기분이 좋으세요.
두 말하면 잔소리지요. 인정받을 때
직장에서 위에 분들이나 동료들에게 인정받을 때
가정에서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에게 인정받을 때 가장 행복하죠.
마찬 가지로 성령의 인도, 통치를 받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혹시 성경 안에서만 인정하는 것은 아닌가요?
어떤 성도들은 성경 안에서의 성령 하나님은 인정하고 믿는데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무슨 말입니까? 이후 모든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첫 단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심의 선언 이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입니다.
반대로 성령 하나님의 인도, 통치를 받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가 무엇일까요?
즉 성령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
아내들에게 질문? 언제 가장 기분 나쁘세요?
남편들에게 질문? 언제 가장 기분 나쁘세요? 직장 갔다 왔는데 밥상도 안차려 줄 때?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무시당했다는 겁니다.
우리교회 성도 분들 중에 가끔 시험 들었다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중에 시험 1순가 뭔 줄 아세요.
왜 목사님은 인사하는데 자기 인사를 받지 않느냐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왜 자기를 무시하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왜 자기를 무시하면 기분 나쁜 줄 아세요? 사람이기 때문에(인격체)
성령 하나님도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무시당하면 근심하세요.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구체척인 - 자주 묻는 것
예) 상담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기 위해 전제가 되어야 할 것 한 가지
내가 누가인가를 먼저 인식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누구입니까?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권속 – 헬) 오이케이오스 – 가정이란 뜻 – 한 집에 거느리고 사는 식구
그러면 누가 거느리고 있나요? 아버지가 거느리고 있다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여기에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이 전제,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심이 전제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뭔가요? 아까 어떤 아이의 시처럼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이 시를 오늘 성도들에게 적용해보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있어서 좋다 나를 이뻐해주셔서
장로가 있어서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오이코스 리더가 있어서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그런데 하나님은 왜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 교회 안에 눈에 보이는 목사가 설교하고, 중직자들이 교회를 섬기고, 오이코스 리더들이 성도들을 섬기니 하나님은 왜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교회에 하나님이 안보여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오늘 교회의 변질 아닙니까?
여러분 앞에 말씀 드렸던 초등학생이 범한 우가 무엇입니까?
이 아이는 어려서 온통 눈에 보이는 것 밖에는 볼 줄 모르는 철이 없고 미숙하다 보니 제 엄마가 먹을 것 주면 엄마가 고맙고, 냉장고에 먹을 것이 많으면 냉장고가 고맙고, 심지어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까지 고마워하면서 사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기가 누리는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하도록 일은 아침 이 꼬맹이가 눈뜨기도 전에 회사로 달려 나가 뼈 빠지게 수고하는 아버지의 수고가 보이지 않아서 애는 철부지라는 겁니다.
요즘 아버지는 가정에 찬밥신세인거 아세요.
기정에서 왕따를 당하는 주인공이 다 아버지들이에요.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합니까?
혹시 여러분 교회 안에 우리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가장들이 가지고 있는 그 섭섭함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 아닐까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눈에는 누가 보입니까?
교역자만 보이고, 리더만 보인다고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교회를 교회 되도록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그런 교회라면 그 교회는 병든 교회입니다.
여러분 철이 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구나 우리 아버지 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위해 애쓰시는 구나 이것이 보이는 것이 철이 드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영적으로 철이 든다는 것은 뭘 이야기 하겠습니까?
우리 포도나무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 교회의 호주 되시고 아버지 되심을 볼 줄 아는 것이 영적으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2. 성령 하나님께 민감 하자
오늘의 우리의 문제 민감할 때 둔감하고 둔감할 때 민감하는 것이 우리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민감해야하는데 거기에는 둔감함
사람들의 소리에 둔감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민감함
사울 왕 – 한마디로 처음에 좋았으나 끝은 실패한 사람
사울 왕의 문제
민감해야할 하나님께 둔감하고 둔감해야할 백성들의 소리에 민감한 사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오늘 여러분은 어떠세요? 어디에 민감하세요?
하나님의 작은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함.
초음파 검사 때의 의사의 눈빛에 민감함과 같은 민감함.
다윗 성령 하나님께 민감한 사람
삼상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4: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24: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만약 다윗의 하나님께 민감하지 않고 환경에 민감했다면 그 날 사울은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다윗의 사람에게 민감했다면 그날 나단은 목숨은 붙어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윗의 범죄 했지만 우리가 다윗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성령 하나님께 민감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은 마치 칼과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께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됨.
우리가 칼을 사용하지 않고 가만 두면 그것이 칼이라 해도 무엇도 벨 수 없는 무딘 것이 되듯이 성령 하나님께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우리가 심령이 무디어져서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됨
닭아 없을 지언정 녹슬게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3. 성령 충만을 갈망하라
갈망하는 것 – 목말라함
지독한 가뭄 때 '헐떡거리는' 들짐승들을 묘사하는
요엘1:20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요엘1:20의 문맥을 고려할 때 이 용어는 '찾기에 갈급함같이로 번역하기보다는 '울부짖으며 찾음과 같이'로 번역해야 원문의 의미가 살아날 듯싶다(Luther).
아이가 성장하려면 반드시 성장통이 있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을 갈망한다면 성숙에는 반드시 성장 통이 따름을 기억해야함.
성장 통이 없는 리더는 병든 리더다.
여러분! 운동. 엘리베이터 두고 걸어서 올라감.
아파야 해요.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만족하면 안 된다.
성장하면 통증이 있게 되어있어요.
아무런 성장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 – 병들었다는 증거임을 자각해야 함.
고통이 느껴지십니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건강한 교회를 향한 갈망이 있는가?
갈망이란 내가 살아있다는 가장 중요한 감정이다.
아프다는 것, 갈망이 있다는 것 ->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정말 가정을 위하여 정말 갈망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부부 사이가 회복되길 원하면 갈망이 회복의 원천임을 믿습니다.
교회가 회복되기를 정말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갈망이 교회 회복의 원천임을 믿습니다.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세워지길 가망하십니까?
그렇다면 갈망이 회복의 원천임을 믿습니다.
성도들이 회복되기를 정말 원하십니까? 갈망이 성도들의 회복의 원천입니다.
영혼이 건강해 지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게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 만나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갈망이 주님 만나는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스티브 잡스 – “항상 갈망하라”
2013년에 주신 단어: 항상 갈망하라
5.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함
성결(카다쉬): 잘라내다.
타락하고 변질된 세상에서 불순하고 더러운 것들을 날마다 잘라야 합니다. 끌려 다니면 안 됨.
나의 약한 것들을 날마다 잘라야 합니다.
옷을 바꿔 입다. 옷을 빨아 입다. 예배시간, 오이코스, 모임을 통하여 지난 한주 동안 세상에서 흙탕물을 세탁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수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삶 (빌립)
성령의 통치 가운데 사는 삶 (사도들)
성령의 인도와 통치 가운데 살기 위해서
1.성령 하나님을 인정
2.성령 하나님께 민감
3.성령의 충만함을 갈망하라
4.성결한 삶을 살아야 함
결과 영생을 거두게 됨
이 삶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야 하며 여러분의 자녀들이 살 수 있도록 이 신앙을 전수해야 합니다.
우리나 우리 자녀들이 육체의 일에 노출되어 신음하는 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애2: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2: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바벨론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백성들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지는 이때 우리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울라는 거예요.
표준새번역 - 애2:18 도성 시온의 성벽아, b) 큰소리로 주께 부르짖어라. 밤낮으로 눈물을 강물처럼 흘려라. 쉬지 말고 울부짖어라. 네 눈에서 눈물이 그치게 하지 말아라. (b. 히) 그들의 마음이 주께 부르짖었다) 2:19 온 밤 내내 시간을 알릴 때마다 일어나 부르짖어라. 물을 쏟아 놓듯, 주님 앞에 네 마음을 쏟아 놓아라. 거리 어귀어귀에서, 굶주려 쓰러진 네 아이들을 살려 달라고, 그분에게 손을 들어 빌어라.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우리 자녀들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찬229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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