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리즈설교/믿음에 의한 삶

43강 믿음시리즈(27)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믿음 (막8:34)

by 오용주목사 2018. 10. 28.

43강 믿음시리즈(28)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믿음

8:34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선물로 채워 가십니다. 그런데 그 선물에는 고난의 시련이라는 선물도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러한 고난의 시련이라는 선물을 주시는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3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1. 하나님을 의지 하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2.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기 위하여

3. 예수 그리스도의 타나나실 때에 친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하여

 

오늘은 왜 하나님은 고난의 시련이라는 선물을 주시는가?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의 시련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함으로 고난의 시련을 당하게 되는데 오늘은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왜 믿음을 선물로 주셨을까요? 물론 가장 중요한 답은 구원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아멘입니까? 그런데 이 믿음은 절대로 우리 스스로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 믿음의 선물은 단순히 천국에 가가 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물론 믿음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천국에만 들어가기 위해 창세전에 우리를 미리 아시고, 선택하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믿어지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왜 믿음을 선물로 주셨는가? 하나님의 일에 믿음으로 동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이 650만원을 투자하면 몇 개월 후가되면 몇 백을 받고 몇 년이 지나면 몇 천을 받는다고 투자를 하라는 겁니다.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했습니다. ? 안했느냐?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려면 믿음이 없으면 절대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우리 스스로가 가질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에 우리로 하여금 동참하도도록 하기 위하여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1.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타락의 핵심 구절이 있습니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인간은 자기 길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2: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절대 관심을 둘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믿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 뜻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보셨습니까? 이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과거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지금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까?

 

2.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일이 관심을 갖게 하고 그 길로 가게 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딤전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벧전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여러분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갖게 하고 그 일에 자신을 드리게 하더라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내 자신을 믿고, 무당을 믿고, 사주팔자를 믿고, 갖가지 미신을 믿는 길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믿는 길로 돌이키게 되었습니까? 믿음이 우리를 그렇게 인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소서 2:13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믿음이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인도한다는 겁니다. 이때 나는 못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가 아니라 그 믿음에 순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순종하지 못합니까? 믿음이 교리적 믿음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로는 믿는데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실제가 안 되었다라는 말로 종종 표현합니다.

 

교리적 믿음의 대표적인 인물이 성경에 나오는데 사울 왕입니다. 삼상17장에 블레셋 장수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과 사울 왕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삼상17: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삼상17: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이게 다윗이 한 말인데 그러면 사울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을 몰랐겠습니까?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몰랐겠습니까?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그 앎이 교리적으로 아는 것에 머물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춘천 소양강 스카이 워크를 갔는데 아내는 이론적으로는 강화 유리가 깨지지 않다는 것을 알아요. 이론적으로는 믿어요. 그런데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겁니다. 왜입니까? 교리적으로는 믿지만 실제 믿음이 없으니까,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교리에 머물러 있으면 언제나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멘, 아멘은 하는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 베드로를 보세요.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14: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14: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여러분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베드로의 믿음은 교리적으로 아는 앎을 뛰어 넘어, 성령님의 은혜로 예수님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게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 위로 걸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기를 실었던 겁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의 믿음도 여전히 교리적 믿음에 머물러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싣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의 생각, 자기의 경험에 자신을 싣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로 이끌어갈 때 그 말씀에 자기를 싣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로 가게 하는데 그 길이 어떤 길인가?

그 하나님의 길이 어떤 길입니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한 마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뜻을 부인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신앙은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하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셨는가? 믿음을 주신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닙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기 위하여 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이끄는데 우리는 왜 안 가려고 버티는 줄 아세요? 우리 예수 믿은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구호가 하나 있는데 그게 뭔 줄 아세요? “예수 믿으면 잘 될 거야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될거라 생각하고 그렇게 예수를 믿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도 고침 받고, 어려운 집안 형편도 풀리고, 자녀들도 앞길이 열리고, 이것을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애초에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될거라 생각하고 예수를 믿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뭡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대가지불입니다.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베드로는 깊은 곳에 그 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는 자기를 부인해야만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가지불 하니까 어떤 큰 핍박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가지불은 그런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 생각, 지식, 경험 등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인하는 것이 대가지불입니다.

 

사도바울은 빌3:7-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종교적 열심, 자랑, 스펙, 가문, 학벌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세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드리기 위해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권한을 향유하며 세상적인 온갖 쾌락을 다 즐길 수 있는 위치에 기꺼이 버렸습니다. 버린 것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원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궁에서 일시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것보다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일을 더 가치 있게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들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의 일로 내 삶을 조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만 했습니까? 그 포기가 자기 부인이요. 대가 지불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로 채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눈물로 채우기도 하고, 시간으로 채우며, 물질로 채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믿음의 시련, 믿음의 고난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의 시련을 기꺼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기꺼이 동참함으로 당하는 믿음의 시련이 있습니까?

무엇을 부인하고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드렸습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십시오.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나를 따라오려거든/자기를 부인하고/자기 십자가를 지고/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 나를 따라 오려거든과 ~ 나를 따를 것이니라사이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가 들어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생각을 잘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의 선물을 왜 주셨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믿음의 선물을 왜 주셨는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내 뜻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이 동참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또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 증거는 자기부인입니다. 대가지불입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게 하고 십자가의 길을 걷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하셨느니라

 

벧전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영적 둔감함의 시대입니다.

7:11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7: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따라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영적 민감함이 필요합니다. 조그마한 하나님의 몸짓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적 예민함이 필요합니다. 죄에 대하여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을 각오로 믿음의 길을 걸어 보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위기는 죽을 각오를 하고 믿음으로 살아보려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겁니다. 아직 신앙의 큰 위기도 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두려워한다면 신앙의 큰 위기 앞에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지금부터 영적인 예민함, 민감함으로 믿음의 인도를 잘 따라가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민감할 때 민감하고 둔감할 때 둔감하자

 

찬송가 150(135) 갈보리산 위에

1.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일세

2. 멸시함을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양이 영광 다버리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3.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일세

4. 주가 예비하신 나의 본향 집에 나를 부르실 그날까지

험한 십자가를 항상 달게 지고 내가 죽도록 총성하리

 

(후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