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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믿음에 의한 삶

16.믿음시리즈(3)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엡2:8-9)

by 오용주목사 2018. 4. 22.

16강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2:8-9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와 생각과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엡2:8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야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사고와 이해와 상식에서 벗어나 계신 분임을 뜻합니다. 만약 우리의 사고와 이해로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예수님이라면 굳이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한 오해

 

1) 강한 신념이나 긍정적인 생각이 믿음이라는 오해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강한 신념이나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여깁니다. 잘될 것이라고 믿고, 기도 응답을 믿고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에 대해서도 무조건 믿으세요!”, “구원받았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을 믿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 텍사스주 휴스턴 레이크우드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 긍정의 힘

 

2) 열심

우리는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주변의 선배신앙인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기 쉽습니다. “열심히 다녀. 예배도 빠지지말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어야 돼. 그래야 신앙이 자라는 법이야.” 열심 그 자체는 매우 귀한 것입니다. 실제로 믿음이 제대로 자라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은 일이나,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일이나,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이 곧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열심히 곧 믿음이라면 바리새인들의 믿음은 정말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믿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열심히 있었습니다. 헌금, 봉사, 헌신 등 어느 면에서도 그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열심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보아도 열심이 곧 믿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우, 소위 말하는 열심이 특심인 성도들로 인하여 많은 아픔이 교회 내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봉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상처를 남기고 목회자와 갈등을 빚으며 아픔을 남겼던 일들이 많습니다.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처럼 열심이 곧 믿음이라는 오해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사상 즉 공을 많이 들이면 복을 받고 형통할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관을 낳았습니다. 물론, 믿음이 있으면 열심히 있게 마련이지만 열심히 곧 다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3)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되는 범위 안에서 믿는 것을 믿음이라는 오해

또 어떤 사람은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되는 범위 안에서 믿으면서 그것을 참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믿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믿는다고 하는 믿음이 우리의 사고와 이해와 상식에 맞아 떨어질 때 믿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바로 그러한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을 믿는 것이고, 이성의 이해와 상식을 믿는 것이게 때문에 이 믿음은 가짜 믿음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자기 생각에 해결될 가능성이 있으면 하나님 해결하실 줄 믿습니다. 하지만 그러나 자기가 생각할 때 도저히 불가능하다 생각되면 믿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믿음을 인간의 이성, 상식, 논리 위에 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혹시 주위에서 이런 말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나는 어떤 성경은 믿어지는데 어떤 성경은 안 믿어진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성경은 도대체 어떤 것이고, 또 어떤 성경은 어떤 것입니까?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은 믿어지고,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안 믿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한 믿음은 아닙니다.

4) 환경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는 오해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하면서 실제로는 환경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은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이 잘 될 때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찬송을 부르지만, 환경이 어려워지면 이내 곧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참다운 믿음은 환경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환경에 의존한 믿음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닙니다. 환경에 의존하는 믿음은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 환경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과 사람이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또 스스로 믿음을 자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도 노력하면 믿음을 향상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합니다. 또 자기의 믿음을 향상시켜서 소위 큰 믿음으로 자라게 해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소원을 이루고 기도 응답을 받으려고 합니다.

 

만약 이 말이 맞는다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데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그 불완전한 믿음을 완전한 믿음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되고 맙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구원도 완전치 못한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열심히 그 불완전한 구원을 완전한 구원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믿음은 완전한 믿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2. 우리가 우리 스스로 믿음을 가지거나 자라게 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결과 우리의 상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은 하나님께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물 헬) 파랍토마, 옆으로 미끄러짐, 탈선, 계획적

죄 헬) 하말티아, 과녁에서 벗어남

죽었던, 네퀴스(시체)에서 유래, 네크로스, 완전히 죽음을 의미

 

성경은 인간을 죽은 자로 간주하고 시작합니다. 아니, 지금 나는 살아 있는데, 죽었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는데, 인간은 크게 영과 육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라고 할 때는 영과 육이 분리된 상태를 죽었다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죽었다는 말은 가장 일차적으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이 죽은 자라고 할 때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인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일어나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도, 하나님에 대한 감각도 없으며, 하나님을 알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의 상태를 2,3층 높이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갈비뼈도 몇 개 나가서 자기가 도움을 요청해서 살아났다는 정도로 인식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상태는 100층 높이서 떨어진 상태와 같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죄로 인하여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완전히 끊어져 죽은 상태입니다.

 

여러분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설령 믿음을 가졌다 해도 그 불완전한 믿음을 완전한 믿음으로 자라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이런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났다. 내가 구원받았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죄로 인하여 죽은 영혼을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거듭났다라고 말하며 신학적 용어로 중생이라고 합니다. 죽었던 영혼이 다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3.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본문을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믿음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나의 의지나 열심에 의해서 예수 믿는 나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14: 9,10절을 보면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앉은뱅이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소리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앉은뱅이를 걷게 한 것은 사도바울의 능력입니까? 아니면 앉은뱅이에게 있었던 믿음입니까? 분명 앉은뱅이에게 있었던 믿음이 그를 일어나 걷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열심히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앉은뱅이는 세상적으로 보면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주어질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가 소위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믿음은 사람을 보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무슨 열심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앉은뱅이를 택하시고 믿음을 주신 것뿐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앉은뱅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만한 공로를 쌓은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초라한 사람일 뿐이고 자랑할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너는 왜 예수를 안 믿어라든가 너는 왜 믿음이 없어라는 말 자체는 죽은 자에게는 성립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라면 자기를 자랑하고, 내 세울 것 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다 하면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내 세운다는 것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가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깨달은 자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신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누구의 믿음이 좋다고 인정해주거나 인정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인정하고 인정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행위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을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믿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면 그리고 그 믿음은 완전한 것이라면 믿음에서 자라라란 말의 의미는?

 

벧후 3:18절에 보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고 말합니다.

 

자라가라는 것은 분량의 확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의 키가 자라는 것처럼 믿음이 자라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키가 자라듯 믿음도 자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결국 믿음은 경쟁과 차별로 나아가게 됩니다. 키가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믿음을 큰 믿음과 작은 믿음으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의 자람에 차이가 있다면, 구원도 믿음으로 받기 때문에 구원에도 차이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많이 배움으로 지식이 많아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룩도 마찬 가지입니다.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 하느냐하면 내가 거룩을 위해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여러분 거룩은 내가 어떻게 도를 닦아서 거룩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속 될 때 만 우리를 거룩하다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에서 자란다는 말의 의미를 아시겠죠?

이 말은 죽은 자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혜택을 누리고 있는가를 알아감으로써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와 기쁨이 더욱 깊어지고 충만해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도는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성도를 온전하다고 말하는 것이고, 거룩한 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점점 알아가는 것이 거룩해 지는 것이고 믿음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믿음을 강요하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라고 하고 믿음에 열심을 내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에 담겨 있는 믿음의 주체 자는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에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이 뜻하시는 사람으로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일은 통째로 묻히고 믿음을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인간의 모습만 가득합니다.

인간의 종교성에 의해 나타나는 믿음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은 분명 다릅니다. 인간의 종교성에 의한 믿음은 인간에게 초점을 둡니다. 믿음을 자랑하고 믿음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모든 초점과 관심이 그리스도에게로만 향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자랑하게 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이 믿음의 세계에서 모든 신자는 동일하고 공평한 한 몸의 관계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과 열심에 의해 받는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복은 행함으로 받는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는데 이것은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는 비성경적인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연 행함으로 복 받은 사람이 존재합니까? 여기서 말하는 복은 죽은 자가 살아남을 입은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남을 입은 영생의 복 앞에 복이라는 가치로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복에 거하는 신자는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3:8).

 

성경은 인간을 죽은 자로 간주하고 시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인생에 대해서도 영생이 없는 죽은 자인 것을 전제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었든 결과는 영생 없는 자로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인생임을 간과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영생 없는 인생에게 최고의 복은 영생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 오신 분이 예수님이기에 예수님은 최고의 복을 선물하신 것입니다. 이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성도가가 이 같은 복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영원한 생명이라는 최고의 복을 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할 뿐이며 주의 이름을 부르며 자랑하고자 할 뿐입니다. 영생을 받은 자신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로 여길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 또 뭔가를 행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행함을 보시고 믿음을 주신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보상입니다. 그리고 보상은 자랑거리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철저히 차단한 채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나게 하는 것이 선물로 주신 믿음의 의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에 걸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에 관심 두지 말기 바랍니다. 믿음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행함과 실천에 관심을 두게 되고 예수님의 행하심에 대한 관심에서는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사탄의 계략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예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일에 모든 마음을 집중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행하심과는 전혀 다르게 사는 나를 보게 하면서 상한 심령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은혜로만 끌어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5. 믿음을 선물로 주신 이유

1) 행위를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2) 자랑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3) 선한 일을 위하여, 여기 선은 히)토브, 보시기에 좋았더라, ) 아가도스